현실이 허구를 압도하는 사회에 이야기로 정면승부


현실이 허구를 압도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것도 변명이다. 인류가 사랑해 마지않는 최고의 작품들은 험난한 역사 가운데서 태어났다. 전쟁과 독재, 억압과 슬픔 가운데서도 꺾이지 않는 것, 그게 바로 소설이다. 그러므로 뉴스가 너무 재미있어서 이야기가 독자를 뺏긴다는 것은 궁색한 변명이다. 그럴수록 이야기는 더 흥미로워져야 한다.

2017년 세계문학상 심사 과정에서 만난 응모작들은 변화의 조짐을 갖고 있었다. 생과 죽음처럼 근본적이며 심원한 질문들을 던지는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는 소설이 경량화되기 시작한 1990년대 말 이후 거의 사라졌던 소설적 대응 중 하나이다. 질문의 깊이나 진지함을 보니 시대적 난제에 대해 산문적 탐구로 답하는 서사적 체위 변화가 엿보였다. 그 변화가 반갑고 흥미로웠다.

제13회 세계문학상 심사위원들이 지난 25일 서울 광화문에서 최종 심사를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영화 제작자 엄용훈, 문학평론가 정은경, 소설가 임철우, 문학평론가 김성곤, 소설가 구효서, 문학평론가 강유정·정홍수.


예심을 통과한 9편의 작품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솔직한 의견을 나누고 진지한 토론을 거듭했다. 본심 과정에서 주목한 작품은 ‘저스티스맨’ ‘노란 잠수함’ ‘살기 좋은 나라?’ ‘큰 비’ ‘깔때기포트’였다.

‘깔때기포트’는 삼류 건달과 인천의 숨은 역사가 어우러져 속도감과 재미를 주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건달 캐릭터가 상투적이고 여성 인물의 경우 기시감을 넘어서 시효만료에 가까운 유형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여로형 서사인 ‘노란 잠수함’은 청년 백수와 무력한 노인 세대를 길 위에서 결합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들이 길에서 겪게 되는 일들이 지나치게 우연하고 돌발적이라 유보감이 들었다.

집중적으로 논의한 작품은 ‘저스티스맨’ ‘살기 좋은 나라?’ ‘큰 비’였다. ‘살기 좋은 나라?’는 신도시 고급 사우나라는 작은 공간을 통해 세상을 보는 작품이다. 잠정적 실업자이자 소설가인 화자는 고급 사우나에 매니저로 일하며 그들의 삶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운율이 잘 맞는 문장과 맛깔스러운 문체가 흥미로웠지만 한편으로는 세태소설로서의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는 게 중론이었다.

‘큰 비’는 미륵사상, 무속신앙, 민중혁명과 같은 소재를 조선 숙종기를 배경으로 풀어낸 역사소설이다. 고답적 문체와 제한적 소재를 풀어내는 솜씨가 주목을 끌었고, 상당한 자료 조사에 들었을 품이 넉넉히 짐작되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2017년 현재, 왜 하필 만신이며 미륵인지를 설득하는 데엔 실패하고 있었다. 역사학을 넘어서는 서사적 필연성이 아쉬웠다.

‘저스티스맨’은 표제로 등장한 인물을 통해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비윤리적인 범죄와 그 범죄에 부작위로 동참하는 사회적 책임 회피에 대해 다루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저스티스맨조차 이름과 달리 정의롭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 자체가 소설적 흥미를 배가했다. 과연 진정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어느새 악이 만연해 체감조차 되지 않는 현실을 질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르적 포즈를 내세워 독자들에게 승부를 거는, 작가적 의욕이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심사위원들은 ‘저스티스맨’을 대상으로 선정했다. ‘살기 좋은 나라?’와 ‘큰 비’는 다시 논의를 거쳐 우수작으로 최종 확정했다. 세 작품 모두 허구가 곤란을 겪는 시대임에도 이야기로 세상과 정면 대결해보고자 하는 의욕이 충만한 작품들이다. 무릇 세상에 나아가 많은 독자들과 만나고, 싸우고, 함께 어우러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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