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명 :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로서의 역사소설의
경향 -소설의 전유(專有)와 향유(享有)
성 명 : 최성민

1. 글쓰기의 한계와 복제의 글쓰기

소설을 쓴다는 것은 욕망이다. 소설은 하나의 허구적 세계에 대한 욕망을 언어로 담고 있다. 소설의 언어는 그 욕망을 때로는 감추고, 때로는 드러내는 도구이자 장치이다. 언어는 현실을 재료 삼아 재단된 가상적 기호이며, 그러한 언어를 통하여 소설은 허구적이고 가상적인 세계를 구성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이미 현실로부터 이중적(二重的)으로 멀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21세기. 구조주의를 넘어서, 또 정신분석학을 넘어서, 수많은 담론들이 높바람처럼 불어대는 바로 지금은 언어의 허구성이 모조리 폭로된 시대다. 소설의 운명을 자각하고 있는 바로 그러한 시대에 또다시 새로운 허구의 세계, 우리의 소설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 이미 있었던 과거의 이야기를 오늘날 다시 끄집어내어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 세계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들이 있다. 과거 이야기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이다. 말하자면, 현실이 아니라 ‘이미 이야기인 것’을 원재료로 삼는 새로운 이야기이다. 이미 있었던 이야기를 대상으로 삼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패러디한다는 것은 사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언어의 허구성이 모조리 드러나 있고, 모든 텍스트는 상호 참조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포스트 모던’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러한 경향의 글쓰기는 ‘글쓰기’에 대한 또 다른 복제일 수밖에 없으며, 소설은 ‘자기 복제’를 통해서만 쓰여진다는 자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데리다가 ‘텍스트 바깥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텍스트는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다’라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텍스트를 다시 쓴다는 것은 이미 쓰여진 텍스트 속에서 일어났던, ‘약호화(encoding) 과정’과 ‘글쓰기 행위’를 다시금 되짚어가면서 해호화(decoding)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글쓰기 행위 자체를 주목하는 것이 된다. 롤랑 바르트가 ‘작품’이 아닌 ‘텍스트’를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저자의 권위에 의한 저술이 아니라 스크립터에 의한 전사(轉寫)를 언급하는 것은, 백색의 창조라는 허위를 벗겨내고 ‘다시 쓰기’의 문제를 깊이 고민한 결과이다. 바로 지금, 글쓰기의 한계와 서사의 한계를 깨달음으로부터 다시 ‘글쓰기’를 시작하는 소설들이 있다. ‘글쓰기의 복제’를 통해 돌파구를 마련한 글쓰기가 있다. 그것은 텍스트 주변 언저리보다는 텍스트 자체와 소설의 위상을 비추어보는 ‘자기 반영적’이고 ‘패러디’적이며, ‘나르시스적 서사’이다. 어쩌면, 진실과 실체에 사로잡혀 있는 형이상학적 사고는 이미 처음부터 그 자체로 허구일 가능성이 많다. 김탁환과 황석영의 근작을 비롯한 역사소설들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것은 이러한 글쓰기 흐름과 무관하지 않으며, 여기 특별히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두 편의 장편소설을 주목한다. 김훈의 ‘칼의 노래’(생각의 나무, 2001)와 김영하의 ‘아랑은 왜’(문학과지성사, 2001)가 그것이다.


2. 삶과 죽음 사이를 갈라내는 ‘칼날’의 텍스트


김훈의 ‘칼의 노래’는 ‘난중일기’를 비롯한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물들을 밑바탕으로 하여 허구적으로 다시 써 내려간 소설이다. ‘칼의 노래’가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배경과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실존인물을 서술자로 삼고 있다는 점은 ‘다시 쓰기’를 시도하는 소설이 출항을 앞두고 거두어들여야 할 닻의 무게가 만만치 않음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임진왜란이라는 사건의 역사적 크기,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한 관습적인 이미지, 그리고 그 사건과 그 인물과 관련된 상투적이고 반복적인 기존의 이야기들. 그것들을 넘어서서, 다시 무언가를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낸다는 것부터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그 전쟁터에 목숨을 내걸고 있는 한 장군의 입과 목소리를 빌려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를 떠올리지 않아도, 이야기의 끝이 곧 죽음과 맞닿아 있다고 한다면, 이미 있는 이야기를 다시 써 나가는 과정은 죽음으로부터의 연기(延期)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칼의 노래’는 한 인물의 죽음보다 훨씬 이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이야기의 끝을 유보하고는 있지만, 끝내 인물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그곳에서 이야기는 다시 끝이 날 운명인 글쓰기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전장에서의 이순신의 삶은 ‘난중일기’와 함께 시작하여 끝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며, ‘칼의 노래’는 ‘난중일기’에 대한 ‘다시 쓰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칼의 노래’는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 위에서만 존재하는 ‘외줄타기’의 텍스트이다. 이 외줄타기가 이어지는 한, 외줄 위의 이순신의 생명은 유지될 수 있게 된다. 또한 그 생명이 유지되는 한, 전쟁은 끝나지 않으며, 이야기도 끝나지 않고 소설은 지속된다. 따라서 이 소설은 마치 이순신의 ‘장계(狀啓)’와 같은 텍스트라고도 할 수 있다. 장계는 이순신의 생명을 유지시켜줄 것이며, 이야기를 이어나가게 할 것이지만, 결국은 그 장계는 이순신의 목을 겨냥하는 칼날이 되며, 그를 죽음으로 이끄는 미끼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붓을 들어 맨 마지막에 한 줄을 더 써넣었다. 나는 그 한 문장이 임금을 향한, 그리고 이 세상 전체를 겨누는 칼이기를 바랐다. 그 한 문장에 세상이 베어지기를 바랐다.


…… 신의 몸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1권 58∼59쪽)


‘칼의 노래’가 충무공에 대한 수많은 기존의 텍스트들을 새롭게 쓸 수 있었던 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실존적 문제, 바꾸어 말하자면 완전한 허무와 무의미에 저항하여 발버둥치는 한 인물의 실존적 문제를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전쟁이란 상황 속에서 더욱 극단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위악적 태도도 피할 길이 없다. 죽음이란 사회적 삶을 사는 인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완전히 홀로되어 감당해야하는 사건이며, “끝내 소통되지 않는 각자의 몫”(1권 124쪽)이기 때문에 그것은 외로운 싸움이고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죽음에 직면한 충무공의 고통은 부하들이 굶어 죽는 가운데, 그야말로 ‘먹고 살아가는 사치’를 누리는 스스로에 대한 고뇌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그해 겨울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격군과 사부들이 병들어 죽고 굶어 죽었다. 나는 굶어 죽지 않았다. 나는 수군 통제사였다. 나는 먹었다. 부황 든 부하들이 굶어 죽어가는 수영에서 나는 끼니 때마다 먹었다. 죽은 부하들의 시체를 수십 구씩 묻던 날 저녁에도 나는 먹었다.(2권 53쪽)


이순신은 ‘수군 통제사’였기 때문에 살아야 했고, 소설 속의 ‘나’는 소설을 통제하는 서술자이기에 살아남아야 한다. 죽음은 생명의 끝이면서 이야기의 끝이다. 그러나 다시 쓰는 이야기는 이미 그 죽음의 결말을 알고 있으며, 죽음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죽음을 유보시키면서 이어지지만, 어쩌면 죽음을 향해 진행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더욱이 그 죽음이 없었다면 애초에 다시 쓰기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죽음은 다시 쓰는 이야기의 출발이면서 결말이고, 이야기는 그 가운데에 존재한다. 이러한 역설적 문제가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이순신의 숙사 방안에 걸어놓은 환도 두 자루와 면사첩(免死帖)이다. 이순신은 수군 진영을 옮겨가면서도 이것들을 계속 자신의 방안에 걸어두고 바라본다. 그러면서 “그것이 내 운명의 지표인 것 같”(1권 168쪽)다고 말한다.


칼을 올려놓은 시렁 아래 면사첩을 걸었다. 저 칼이 나의 칼인가 임금의 칼인가. 면사첩 위 시렁에서 내 환도 두 자루는 나를 베는 임금의 칼처럼 보였다.(1권 129쪽)


죽음에 대한 공포와 죽음 충동 사이를 갈라낸 자리에서 이순신이 겪어내고 있는 전쟁의 상황은 임금을 중심으로 한 국가와 그 국가를 쳐들어온 적들 사이의 대결이다. 이순신은 그 외적들과 맞서 싸운 민족사의 영웅이다. 그러나 ‘칼의 노래’에서의 이순신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안겨주고 있는 대상은 외적뿐만 아니라 임금이기도 하다. ‘면사첩’을 보내온 것은 다름 아닌 임금이며, ‘면사첩’은 죽음을 면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이면서, 동시에 언제라도 상대의 목숨을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위협이다. 그리고 칼은 자신의 목숨을 지켜주는 무기이면서, 적의 손에 쥐어져 있는 칼, 혹은 임금의 칼은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갈 수 있는, 죽음을 부르는 도구이다. 칼이 겨누는 곳은 어디라도 될 수 있고, 겨누는 곳이 달라질 때, 삶과 죽음은 경계를 넘나든다.


칼로 적을 겨눌 때, 칼은 칼날을 비켜선 모든 공간을 동시에 겨눈다. 칼은 겨누지 않은 곳을 겨누고, 겨누는 곳을 겨누지 않는다.(2권 21쪽)


면사첩과 두 개의 환도, 그들 사이 어딘가에 삶과 죽음의 틈바구니가 있고, 그 틈을 가로질러 베어낸 곳에 이야기가 있다. 죽음이 출발이자 끝이 되며, 그 중간에 위치하는 이야기. 그것은 바로 ‘다시 쓰는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다시 쓰여지기 위해서는 하나의 이야기가 종결되는 지점이 전제되어야 하며, 그것이 다시 쓰기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다시 쓰는 이야기는 또다시 종결을 향해 치닫는다. 따라서 죽음을 피하고 유보시키면서 텍스트는 탄생하지만, 그것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선 죽음 충동을 통해 또 다른 종결을 향해 나아간다.


임금이 보내온 고기 덩어리를 보면서 “적의 칼에 베어지거나 임금의 칼에 베어질 때, 나의 베어진 단면”(1권 158쪽)을 떠올리면서도 스스로 적장 아베를 칼로 베어내며 그 목숨을 가로지르는 칼날에서 “뜨겁고 뭉클한 진동”(1권 176쪽)을 느끼는 것이나, 자신이 죽을 사지(死地)를 물색하며 찾아다니지만 “죽어야 할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답답함”(1권 151쪽)에 조바심을 느끼는 것은 바로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것이면서, 동시에 죽음에 대한 충동이라 할 수 있다. 죽음 충동은 이야기를 종결로 이끌어 나가는 힘, 그러니까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며 에너지이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가장 원초적인 자기애의 감정일 것이며, 나르시시즘을 넘어선 곳에는 늘 타나토스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끝나는 순간에 찾아올 것이다. 적의 칼과 임금의 칼이 맞서고 있는 치열한 대립의 종결에, 죽음이 있고 이야기의 끝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칼의 노래’의 ‘나’ 이순신의 몸에는 “적과 임금이 동거”(1권 182쪽)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묘한 역설을 통해 ‘이미 있던 이야기’를 되살려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간 ‘칼의 노래’란 텍스트의 본원적 욕망은 무엇일까? 그것은 쓰러져 있던 육체를 부활시키거나 죽어있던 생명을 새롭게 부활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던 시절로, ‘이미 있었던 진실들’로 되돌아가려는 욕망이다. ‘이미 있었던 진실들’로써 허무와 무의미, 무내용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소설 속의 언급처럼 “목숨을 벨 수는 있지만 죽음을 벨 수는 없”(1권 114쪽)는 것이건만, 그리고 “죽이되, 죽음을 벨 수 있는 칼이 나에게는 없었다”(1권 124쪽)고 말하건만, 완전한 허무, 즉 죽음은 무척이나 두려운 대상이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마치 칼로 잘라낸 것처럼 그들 틈 사이에 있지만, 그 갈라진 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이 소설 전체를 억누르고 있고, 그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실천이 바로 이 텍스트이다. 그런데 그 실천으로서의 ‘다시 쓰기’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의 근원을 되찾으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삶과 죽음을 복원하려는 ‘근원적 사실’에 대한 욕망이다.


나는 김수철의 초안을 대폭 수정했다. 적병의 숫자를 모두 지웠고, 포격과 불화살로 깨뜨린 적선은 30척이며, 적의 수급(首級) 여덟을 얻었다고 고쳤다. 그것도 모두 사실이었다. …(중략)… 임진년에 여러 포구에서 이겼을 때, 매번 적병의 숫자를 장계에 써 보낸 것이 5년이 지난 정유년에 조정에서 문제가 되었다. 전공을 허위로 보고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조정을 능멸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죽어야 할 죄목의 하나였다. 견내량에서 이겼을 때부터 나는 장계에 적병의 숫자를 적지 않았다. 그날 견내량 싸움을 끝내고 한산 통제영으로 돌아와 장계를 쓸 때, 나는 그 숫자가 어느 날 나를 죽이게 되리라는 예감에 몸을 떨었다.(1권 124∼125쪽)


김수철이 쓴 장계의 초안을 고치는 것은 ‘사실’이 ‘허위’로 인식될 때 죽음이 다가올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며, 그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의 역사와 진실된 근원에 대한 일종의 강박증적 태도로 보인다. 소설 속의 ‘내’가 진실에 집착하며, 그 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온다고 느끼듯이, 이 소설 자체는 ‘진실’의 존재를 크게 의식하고 있다.


근원적 ‘진실’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두 권으로 된 이 소설의 뒤에 ‘연보’와 ‘인물지’를 덧붙여 놓으면서 그것을 통해 “소설과 사실의 차이가 드러나길 바란다”고 말한, 작가의 일러두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과거의 역사가 모두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소설은 그 역사로 되돌아가 이순신의 ‘실존’과 진실을 탐구하기를 욕망한다. 이 소설에서의 ‘다시 쓰기’는 한 인물의 감춰진 진실의 내면을 밝혀내는 숭고한 탐색이며, 이데올로기로 착색된 ‘난중일기’를 그 내면의 근원적 기록으로 되살리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근원적 ‘진실’로 돌아가려는 시도이자, ‘이미 있었던 것’을 새로이 확고히 하는 것이면서, ‘이미 있었던 것’을 근원 회귀의 순환 고리 속에 가두어두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새로 쓰는 텍스트’를 통해 과거의 텍스트를 전유(專有)하려는 시도이다. ‘전유’란 본래 탈식민주의 이론에서 활용되는 개념으로, 식민지배 관계에서 상대의 것을 받아들이되 자신들의 전적인 지배와 권한 하에 다시금 가져다놓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칼의 노래’는 기존의 ‘역사’와 ‘과거’를 다시 쓰되, 본래 그것이 누리던 ‘진실’의 권한을 누리고자 하는 텍스트적 욕망이 담겨 있는 ‘전유의 텍스트’라고 볼 수 있다. 그 소설적 욕망은 마치 ‘칼날’처럼 텍스트를 자신의 의도대로 저며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낸다. 그리고 소설은 역사와 과거를 전유하는 텍스트가 된다.


3. 텍스트 판본들의 향기 속을 헤매는 ‘나비’의 텍스트


김영하의 장편 ‘아랑은 왜’는 그야말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즉 메타적 이야기라 할 만하다. 다시 말해서 ‘누가 무엇을 얘기하는가’보다 ‘어떻게 이야기하는가’의 측면을 극단적으로 집중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본래 ‘아랑은 왜 나비가 되었나’(‘동서문학’ 98년 여름호)라는 중편 소설이었는데, 본래의 중편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던 현재시점의 ‘영주’란 인물을 통해 그녀를 설화 속 ‘아랑’과 중첩되게 만듦으로써 장편소설 ‘아랑은 왜’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이미 여러 논자들이 평했듯이 ‘아랑은 왜’는 매우 복잡하고 중층적인 이야기 겹들을 가지고 있는 다층적 액자 소설이다. 첫 번째 이야기 겹은 원설화(原說話)라고 할 만한 ‘아랑설화’이다. 이 소설은 실전(實傳)하는 이 설화를 기본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허구적으로 창조해낸 비본(秘本) ‘정옥낭자전’이 두 번째 이야기 겹을 이루며, 김억균이라는 인물에게 근대적 탐정 역할을 부여하고 있는 ‘추리소설’이 세 번째 이야기 겹을 이룬다. 네 번째 이야기 겹은 현재를 사는 ‘박’과 ‘영주’의 이야기인데, 이들을 통해 ‘아랑’의 이야기는 무시간적, 혹은 초시간적 이야기가 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마지막 층위는 작가가 소설 속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부분으로, 일종의 피란델로적 기법이 적용된 부분이다. 또한, 그 겹겹의 이야기들이 모여 있는 어딘가에는 본래의 중편소설 ‘아랑은 왜 나비가 되었나’도 존재할 것이다.


이렇듯 ‘아랑은 왜’는 다층적인 이야기 겹을 통하여, 이야기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전달되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메타소설’이라 할 수 있다. ‘정옥낭자전’이라는 허구적 비본을 언급하는 형식은 사실, 우리 역사 소설에서 그리 흔한 방식은 아니지만,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나 보르헤스의 여러 소설들을 떠올려 본다면, 그렇게 낯설고 새로운 방식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아랑은 왜’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지점은 그 여러 겹의 이야기 층위들을 너무나도 가볍게 넘나들고 있는 소설 속 작가, 혹은 서술자의 모습이다. 그 모습은 ‘소설을 쓰는 방식’에 대한 진지한 탐구의 자세라기보다는 그저 이야기를 마구 풀어놓고 즐기는, 장난스러운 놀이의 모습이다.


소설 속 역할을 맡을 배우들이 오디션을 보러 오는 상황을 설정하고 있는 부분이라든지, ‘박’과 ‘영주’라는 인물을 형상화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부분이 대표적인 예이다.


소설에 등장해보겠노라고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몇 명의 배우가 오디션을 통과했다. 먼저 소개할 인물은 어사 조윤 역을 맡을 배우다.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한 중년 남자다. 어깨는 구부정하여 비굴하게 보이나 막상 눈을 보면 범상치 않은 광채가 난다.(50쪽)


혹시 ‘서두’라는 장에서 잠시 등장했던 영주라는 인물을 기억하시는지. 우리가 ‘박’이라 부르는 인물과 관계가 있는, 이미 죽어버린 여자. 어쩐지 아랑과 관계가 있을 것 같은 암시를 던져주는 여자다. 그러나 그때는 그 여자가 몇 살인지, 직업이 무엇인지 따위의 구체적인 신상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었다.(97∼98쪽)


소설 속의 인물은 그 인물이 전형적 인물이든, 개성적 인물이든 간에 소설 속의 사건을 통해 드러나야만 인물의 행동이나 성격에 필연성이 생기고, 핍진한 이야기 전개가 가능하다. 소설에서 인물을 형상화하는 방식을 유의해서 살펴본다면, 소설이라는 장르가 변화하고 발전해온 모습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대개의 고전소설에서는 어떠한 인물이 등장하는 순간에 외양부터 성격까지 한꺼번에 설명하고 한정해주는 서술이 이루어지는 반면, 근대소설에서는 인물의 행동과 갈등을 통해 제시된 사항들로써 독자가 인물의 성격을 규정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아랑은 왜’의 인물은 모든 인물이 허구적으로 꾸며진 ‘허상’임을 강조하듯이 형상화된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원설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든, 아니면 새롭게 창조된 인물이든, 그 인물의 ‘인위적’ 형상화 과정 자체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관습을 따르는 독자들은 이렇게 창조된 인물들이더라도 언젠가는, 잘 짜여진 이야기 흐름, 즉 플롯 위에서 움직이게 될 모습을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아랑은 왜’에서의 인물들은 짜여진 플롯 위에서 활동하고, 갈등할 기회를 별로 갖지 못한다. 완성된 플롯이 끝내 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독살에 사용된 반묘를 찾아내고 그 용법을 김령에게 물어 알고 아랑의 실제 신분을 밝히기 위해 기생안(妓生案)을 압수할 것이다. 우리는 필요하다면 그런 장면을 얼마든지 넣어 작품의 설득력을 높일 수 있다. 이 사건을 좀더 복잡하고 정교한 추리극으로 만드는 데 있어 이런 자료들은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217쪽)


위의 경우처럼, 원설화인 ‘아랑설화’, 그리고 허구적 판본인 ‘정옥낭자전’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어떠한 사건이나 장면을 개입시킴으로써 설득력과 핍진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과정이 노출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지고 변형된 이야기들의 조합은 제시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아랑은 왜’는 확정된 플롯에 따른 이야기 전개를 제시하지 않는다. 모든 이야기는 파편화되어 있고, 그 이야기들은 서로 다른 겹에서,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존재하며, 서로를 스쳐지나갈 뿐이다. ‘아랑은 왜’는 다양한 이야기 겹을 가지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이야기(story)’다운 ‘이야기 겹’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겹들은 부실한 줄기에 매달린 꽃잎들처럼 불안하게 흔들린 채로 고정되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의 결말 처리를 놓고서는 심지어 작가와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의견을 교환하는 상황이 제시되기도 하며, 등장인물이 내용 전개에 대해 극렬한 항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이봐요. 박. 당신 생각은 어때요? 글쎄요. 제 생각을 말해도 된다면 저는 박이 아랑을 만나게 하는 게 어떨까 싶어요. …(중략)…


영주씨. 당신은 어때요? 저는 반대예요. 말하자면 소설 속의 영주는 어린 여자 밝히는 박이라는 남자에게 살해된 건데, 이건 그저 치정에 얽힌 살인 사건일 뿐, 여기다 무슨 다른 상징을 덧씌우는 건 반대합니다. 이런 식으로 피해자인 여성을 신비화하는 것은 남성 작가들의 전형적인 폭력입니다.(278쪽)


사실, 어떠한 소설이든, 심지어 기존의 이야기나 설화를 재구성하는 소설일지라도, 작가는 소설이 쓰여지는 과정에 있어서 강력한 권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롤랑 바르트나 미셀 푸코가 작가의 죽음을 언급한 것은 독자의 자유로운 독서를 위해서는 ‘작가의 죽음’이 반드시 필요할 만큼 작가의 권위는 강력한 것임을 역설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출된 권력은 더 이상 권력일 수 없다. 권력을 확립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이 노출된 이상, 그 권력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작가의 의도와 권위가 문제가 된다고 할 때, 그것을 의도적으로 회피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작가가 글쓰기에 관여하고 개입하는 모든 방면, 그러니까 인물을 형상화한다든지, 사건을 만들어 나간다든지, 기존의 이야기를 변형시킨다든지, 시대적 배경을 설정한다든지 하는 모든 권력의 양상을 그대로 노출하는 것이 글쓰기의 권력을 폭로하는 첩경이 된다는 것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심지어 ‘아랑은 왜’라는 소설은 스스로 밑바탕으로 삼고 있는 원설화인 ‘아랑설화’조차 온통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아랑설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나 장소, 그리고 살인 장소를 비롯한 사건들의 핍진성 여부를 따지며, 그 다양한 판본들을 번갈아 의심한다. ‘역사’가 또 다른 판본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것 자체로 스스로 ‘역사’이길 부정하는 것이 되겠지만, ‘설화’는 생성의 과정부터 확정된 고정 판본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랑은 왜’가 확정된 판본의 플롯을 제시하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 겹들을 떠돌아다니기만 하는 것은 이야기의 근원을 ‘설화’에 두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의 텍스트적 욕망이 ‘근원의 부재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데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후자의 욕망을 따라가다 보면 사실 쓰여지거나 이야기된 것 가운데 ‘날것’ 그대로 자연스럽게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며, ‘진실’과 ‘허구’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지기 마련이다.


허구의 폭로, 혹은 허구에 대한 비아냥거림은 사실, 작가 김영하의 소설에서 자주 발견되던 부분들이다. “어차피 허구로 가득찬 세상”(‘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이라는 빈정거림이나, “인생을 흉내내는 영화는 인생보다 더 지겹다”(‘흡혈귀’)는 경멸에 가까운 언급이 그러한 예이다. ‘아랑은 왜’는 이러한 허구성에 대한 폭로를 그야말로 소설 전면에 부각시킨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폭로의 결과는 무엇일까? ‘소설가’는 자신의 허구화 과정을 그대로 노출시킴으로써, 어떠한 ‘사실’에 대한, 어떤 ‘근원’에 대한 환상도 독자가 가질 수 없도록 만든다. 특히 완성된 플롯을 끝내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소설가’는 자신의 권위와 권능을 발휘할 기회를 스스로 방기(放棄)한다. 물론, ‘소설가’의 이러한 의도가 존재한다고 할 때, 그것이 텍스트 그 자체의 욕망이라기보다는 실제 작가 ‘김영하’의 의도와 동일시된다는 점은 관습적 독서가 견지하는 ‘미메시스 환상’의 마지막 보루이다.


작가가 비워둔 그 자리에서 독자는 이야기의 빈틈들을 메워가면서 텅빈 ‘플롯’을 만들어 가야 한다. 독자는 이 소설에서 이쪽저쪽의 이야기 겹들을 떠돌며, 어떠한 이야기들을 선택하고 연결할지를 고민하여 ‘놀’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분명해질 필요는 없다. 허구적 소설이든, 현실이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실 매우 제한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부족한 정보들을 가지고 상상하고, 추측하고, 때로는 즐긴다.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세상 모든 이야기에는 어떤 틈이 있다. 이 틈이야말로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다. 어떤 이야기가 덧붙여지거나 이미 있던 이야기의 요소가 사라질 때, 거기에는 언제나 작은 흔적이 남게 마련이다.(16쪽)


우리는 소설 속의 인물들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른다. 사실은 현실의 인물들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사실은 현실의 인물들에 대해서 잘 모른다. 오늘 우리집에 중국 음식을 배달하고 간 젊은이의 과거를 우리가 어찌 알겠는가? 그는 그저 중국집 배달원으로만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중략)…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결코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기껏해야 단편적으로 알 뿐이라는 인식을 소설쓰기에 적용할 수도 있다. 이걸 극단으로 밀어붙이면 읽는 사람들은 피곤해진다.(199∼200쪽).


‘아랑은 왜’의 복잡한 이야기 겹들 가운데 하나의 이야기 겹 속의 인물은 그 안쪽 이야기 겹에 대한 독자이기도 하고 작가이기도 하다. 텍스트는 여러 이야기 겹들과 인물들, 작가들(혹은 서술자들)과 독자들을 넘나든다. ‘아랑은 왜’에서 텍스트란 작가에 의해서도, 원설화나 원이야기에 의해서도 확정되거나 고정될 수 없는 것이다. 텍스트는 원래의 이야기에 담긴 플롯과 인물 주위를 부유(浮遊)한다.


아랑의 전설에서 ‘아랑’이 왜 하필 나비가 되어 자신이 죽은 내막과 범인을 알렸는지 이유에 대해, 이 소설은 이미 존재하는, 혹은 추정된 ‘범죄의 서사’에 범죄 용의자를 포함시키기 위한 극적 장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인물과 사건, 그리고 ‘이미 있었던 이야기’들 사이에는 언제나 빈틈이 있기 마련이고, 나비가 내려앉는 빈틈의 위치에 따라서 언제든지 새로운 서사는 만들어질 수 있다.


라캉에게 결여의 장소는 곧 ‘향유(jouissance)’의 장소였듯, 이야기의 빈틈들은 독자가 즐기고 놀 수 있는 ‘향유(享有)’의 장소이다. ‘아랑은 왜’는 ‘과거의 이야기’를 가지고 설화 속 이야기들과 그 안과 바깥에 존재하는 인물들이 ‘노출된 권력’만을 지녔을 뿐인 ‘작가’로서의 한 인물과 한바탕 텍스트 위에서 즐기는 텍스트 공간이 된다. 그것은 텍스트를 향유하는 일종의 방식이며, 어떠한 근원도 없이 텍스트가 떠돌아다니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사건을 만들어 나가게끔 하는, 텍스트 욕망의 놀이이다.


4. 소설의 ‘전유’와 ‘향유’


포스트 모던 시대란 언어의 허구성이 폭로된 세상이다. 그래도 허구적 이야기는 우리들 곁에 계속 머물고 있다. 현실과 환상 사이에 조그만 빈틈이 있는 한, 그리고 사람들이 현실에 완전하게 만족하지 않는 한, 아마도 소설은 계속 쓰여질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 내재된 욕망과 전략을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된 소설은 허구적 글쓰기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새로운 시도를 해야만 할 것이다. 이제 소설은 한 작가의 완전한 창조물도 아니며, 현실에 대한 완전한 반영물도 아니다. 그래도 여전히 소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다양한 욕망을 해결해줄 ‘언어’로 된 꿈이며 ‘텍스트’로 된 환상이다.


오늘날 글쓰기 자체에 대한, 소설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반성과 고민으로부터 ‘소설’이란 서사 예술은 새롭게 변화되고 있으며, 그 사례들 가운데 하나가 ‘이미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쓰는 소설’들이다. 흔히 ‘역사소설’이란 장르는 근대 소설의 탄생부터 유지되어온 장르이지만, 과거의 시간과 역사를 근원에서부터 전복시켜 ‘다시 쓰기’를 시도하는 방식은 예전의 역사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시도일 것이다. 이제 그러한 시도, 그 다시 쓰기의 방식은 요컨대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그것은 각각 ‘전유’로서의 글쓰기, ‘향유’로서의 글쓰기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방식은 기존의 이야기를 새롭게 꾸며내면서도, 이야기의 근원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혹은 이야기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데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쓰여진다. 이 경우, 새로 쓰여진 이야기는 기존의 이야기의 근원을 탐색하거나, 그 근원을 새롭게 대체하는 ‘진실’을 밝혀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기존의 이야기와 역사는 새로운 이야기에 의해 ‘전유’되는 셈이다.


후자의 방식은 기존의 이야기를 여러 겹의 층위로 해체해 놓고서, 그 파편들 위에서 사건들과 배경, 그리고 인물들, 심지어 작가까지 뛰어들어 놀 수 있는 공간을 차려 놓는 글쓰기이다. 이 경우, 원래의 이야기는 온데간데가 없으며, 굳이 찾아낼 필요도 없다. 오직 이야기들끼리의 즐거운 ‘향유’가 펼쳐질 가능성만 제시될 뿐이다.


우리가 문학의 위기, 혹은 소설의 위기라는 풍문(風聞)을 뛰어넘어 새로운 글쓰기를 모색하는 과정 가운데 있는 두 소설, 혹은 두 소설의 방식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그 과정의 끄트머리에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전망과 희망이 존재하리라 믿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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