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명 : 우유
성 명 : 전윤희
조간신문과 함께 우유를 들고 들어오던 아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해. 우유가 터질 것처럼 부풀었어.”

신문을 건네주고 아내는 식탁 위에 우유를 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워낙에 극성인 아내인지라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히 신문을 펼쳐 들었다. 아악! 갑자기 아내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신문을 내려놓고 식탁 앞으로 다가갔다. 유리컵에 담긴 우유에 허연 덩어리와 노리끼리한 액체가 엉켜 있었다. 코를 찌르는 역겨운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 사람들이 미쳤나? 누구 죽일 일 있어? 애가 먹었으면 어쩔 뻔했어.”

아내는 씩씩거리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건우가 마실 뻔했다는 생각을 하니 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내의 성난 팔꿈치에 차이기 전에 얼른 수상한 물체를 개수대에 쏟아 붓고 찬물을 세게 틀었다. 물컹거리는 덩어리는 몽글몽글한 작은 입자로 해체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분해되지도, 뽕뽕 뚫린 구멍 속으로 빠져 나가지도 않았다. 다시 물살을 세게 틀었으나 놈들을 완전히 쓸어버리지는 못했다.

역한 냄새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비가 오려는 듯 대기 중에 습기가 가득했다. 날씨는 도대체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다가는 한순간 개어 버렸고, 햇살이 따갑다가도 소나기가 미친 듯이 쏟아졌다. 어느 날은 비가 오다 개다를 다섯 차례 반복했다. 같은 도시 안에서도 한쪽에선 거세게 비가 내렸고 다른 쪽에선 습기 찬 바람만 불고 말았다. 날씨의 변덕에 지쳐버린 사람들은 날씨가 미쳐 버렸다고 말했다.

아내는 당장 대리점에 전화를 걸겠다며 고지서를 찾았다. 삼십 분 넘게 헤매다가 겨우 찾아낸 것은 지난달치 미납 고지서였다. 액수가 꽤 된다 싶어서 자세히 보니 그 전달의 액수와 합한 금액이었다. 도합 세 달이 밀렸던 것이다.

“아니, 왜 우유 값을 이렇게 밀렸어! 제때 내지 않고…….”

우유 값을 내지 않은 상태에서 불평을 한다는 것이 좀 마뜩찮아서 나는 한마디 했다. 그러자 아내가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때맞춰 은행 가기가 그렇게 쉽니? 잊어버릴 수도 있고 바빠서 시간을 못 낼 수도 있는 거지. 게다가 이런 거지 같은 날씨에 오로지 우유 값 내자고 나가고 싶겠어?”

아내는 씩씩거리며 고지서에 나와 있는 번호를 따라 전화버튼을 눌렀다. 꽤 오랫동안 신호가 갔으나 상대방은 전화를 받지 않는 눈치였다. 메시지를 남겨 놓으라는 자동응답기의 음성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아내는 메시지를 남기지 않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돈 좀 늦게 냈다고 상한 우유를 넣는단 말이지? 당장 끊어버릴 줄 알아.”

그렇다고 일부러 상한 우유를 넣었겠냐고, 날씨가 이렇듯 더우니 우유가 상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말하려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아내는 양심에 찔려서 지레 흥분하고 있었다.

바캉스 짐을 꾸리면서도 아내는 생각날 때마다 대리점에 전화를 걸었다. 한참 신호가 간 후에는 이내 녹음된 테이프가 돌아갔다. 아내는 메시지를 남기지 않고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출발 직전까지 아내의 전화는 계속되었고 수화기 건너편에선 침묵이 계속되었다. 현관문을 잠그기 전에 아내는 가스 밸브는 잠갔는지 창문은 모두 닫았는지 확인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고지서에 적힌 우유 대리점 번호를 휴대폰에 입력했다.

“집을 비운 사이에 우유를 넣지 말라고 메시지를 남기는 게 좋지 않을까?”

“싫어. 직접 말할 거야.”

고집을 피우던 아내는 궁여지책으로 4절지 도화지에 ‘당분간 우유를 넣지 마시오’라고 써서 문 앞에 붙여놓았다. 글씨부터 쓰고 붙였으면 좋았을 것을. 문에 붙여진 종이에 쓰인 글씨는 발에 밟힌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아내는 마지막에 느낌표를 세 개나 찍음으로써 그 단호함을 표현했다.

차를 타고 동해로 가는 길에서도 날씨의 광기는 계속되었다. 와이퍼가 미처 쓸어내기도 전에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져서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앞차가 켜놓은 비상등의 흐릿한 불빛에 의지하여 겨우 움직일 만큼 거세게 비가 쏟아지다가도, 터널 하나만 지나면 햇살이 반짝거렸다. 조수석에서 꾸벅꾸벅 졸던 아내는 중간중간 잠꼬대처럼 말했다.

“미쳤어. 미쳤어. 다들 정말 돌았나봐.”

흐린 여름날의 바닷물은 섬뜩할 만큼 차가웠다. 해수욕장은 한적했고 그나마도 모래성이나 쌓고 있을 뿐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이는 신이 나서 튜브를 몸에 걸고 바다를 향해 달려갔으나 발을 담가 보더니 곧 돌아섰다. 몇 번의 물웅덩이를 지나며 일곱 시간 가까이 곡예 운전을 한 결과치고는 빈약한 감이 없지 않았다.

바닷가에서도 아내는 연신 휴대폰의 버튼을 눌렀다. 상대방에게서는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여기 화영아파트 304혼데요, 앞으로 우유 넣지 말아 주세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앞으로 우유 넣지 마세요. 우유 값 계산해서 고지서 보내세요. 참, 어제 우유는 상해서 버렸으니 제하는 거 잊지 마시고요.”

아내는 결국 메시지를 남기라는 녹음에 승복했다. 그러나 결코 패배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내는 우유를 끊겠다는 의사를 단호한 음성으로 남겼다. 사실 그보다 확실한 처벌이 어디 있겠는가. 아내는 더 이상 휴대폰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제 돌아가면 길거리에서 우유를 서너 개씩 나눠 주며 호객행위를 하는 새로운 대리점과 계약을 맺으면 될 일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냄비세트나 요구르트 제조기 같은 꽤 괜찮은 사은품도 줄 것이다. 아내는 벌써 머릿속으로 뭐가 필요한지 주방의 수납장을 훑어 보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우리는 해수욕을 포기하고 콘도 앞에 마련된 물썰매를 탔다. 썰매를 들고 언덕을 올라가기가 만만치 않아서 나는 곧 지쳤지만 아이와 아내는 매우 즐거워했다. 아내는 우유 같은 건 벌써 잊은 얼굴이었다.

바캉스에서 돌아온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부푼 우유팩 네 개가 문 앞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집을 비운 지 정확히 4일째였다. 건우가 걔 중 가장 덜 부푼 것을 들어 보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엄마 이건 날씬하다.”

“너 당장 내려놓지 못해!”

아내의 날카로운 소리에 나는 아이의 손에서 우유를 빼앗았다.

“가져다 버릴까?”

“버리긴 어디다 버려? 거기다 그대로 놔둬. 지들이 가져가게. 증거가 있어야 할 거 아냐.”

나는 들고 있던 우유를 다른 세 개의 터질 것 같은 우유 옆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바야흐로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전화도 받지 않는 우유대리점과 아내 사이의. 나는 그들 사이의 팽팽한 신경전에서 불꽃이 파다닥 튀는 것을 목도했다. 아내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수화기부터 들었다. 신호가 열 번쯤 가고 난 후에야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아저씨 뭐예요? 지금 뭐하자는 거예요?”

아내는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 나는 건우를 데리고 그 자리를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폭염이 계속되는 동안 우리는 좀처럼 잠도 자지 못했고 식욕이 없어서 밥도 먹는 둥 마는 둥했다. 창문을 모두 열어놓았지만 창밖의 날씨도, 방안의 공기도 후텁지근하긴 마찬가지였다. 선풍기를 틀어도 더운 바람만 불어왔고 에어컨도 가동되는 동안에만 시원할 뿐, 전원을 끄는 순간 바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나마도 전기 값을 염려하는 아내의 눈치가 보여 맘대로 틀 수도 없었다. 도대체 더위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더위에 지친 나는 집에 있는 동안은 언제나 TV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TV에서는 연일 사건 사고가 쏟아졌다.

“자식들, 덥지도 않나? 사고를 치려면 좀 선선해진 다음에나 치지.”

7년간 동거했던 여자를 변심했다는 이유로 토막살해를 한 남자와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부모를 살해한 패륜아의 기사를 들으며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내뱉었다. 아내가 이물스럽게 느껴졌다. 언제부터 저랬지? 그녀를 힐끔거리다가 나는 아내가 변하는 것도, 우유대리점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도 모두 죽 끓듯이 변하는 날씨 탓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우유 배달부가 찾아왔다. 하필이면 아침 뉴스에서 패륜아가 복면을 쓰고 두 눈만 내놓은 채 사건 현장을 재연하는 광경을 보고 있을 때였다. 벨이 울리자 건우가 쪼르륵 달려갔다. 건우는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고 문부터 열었다.

“엄마 계시니?”

현관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기적거리며 일어났다.

“누구시죠?”

“우유 바꿔 드리러 왔습니다.”

이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마른 체구에 키만 비죽하니 컸다. 양미간이 좁고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그런지 인상도 내성적이고 소심해 보였다. 그의 손에는 1000㎖짜리 우유가 다섯 개 들려 있었다. 내가 손을 내밀려는 찰나에 아내가 나타났다. 아내가 내 손을 가로막았다. 아내의 품에는 네 개의 터질 것 같은 우유가 들려 있었다. 아내는 그 애물단지들을 그의 발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필요 없어요. 우린 다른 회사 우유를 먹기로 했어요. 고지서는 가져왔나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내와 나를 그리고 건우를 한 번씩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우리 가족을 스쳐갈 때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일었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인상이 특별히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특별한 이유 없이 공포를 느꼈다.

“주인 아저씨가 안 계셔서 메시지 확인을 못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주인이 아니면 댁은 누구죠?”

“우유 배달하는 알바생이에요.”

“주인이 직접 온 것도 아니고, 아르바이트생을 보내? 다 필요 없으니까 고지서나 보내라고 해요.”

아내가 쌀쌀맞게 말했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아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유 배달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는 왠지 그가 건우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으면 했다.

그날 오후 아내는 새로운 대리점과 1년 계약을 맺었다. 아내의 손에는 플라스틱 어린이 책상과 의자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아내가 책상과 의자를 물걸레로 닦아주자마자 건우는 자리를 잡고는 거기서 떠나지 않았다. 아내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좀 참지, 뭐가 그렇게 급했을까. 나는 왠지 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TV를 켰다. 9시 뉴스에서는 변심한 동거녀를 죽인 남자와 보험금을 노리고 부모를 죽인 폐륜아의 기사가 또 나왔다. 이번에는 폐륜아의 누나가 나와서 그 애가 얼마나 소심하고 얌전한 아이였는지 모른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오열했다. 온몸에 다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나는 그제야 왜 우유배달 아르바이트생을 보았을 때 소름이 돋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우유 배달부가 입고 있는 노란색 바탕에 해골무늬가 그려진 티셔츠와 똑같은 티셔츠를 그 폐륜아도 입고 있었다. 그들의 짧은 머리스타일과 체구도 비슷했다.

“이봐, 저 사람 그 아르바이트생하고 느낌이 비슷하지 않아?”

“글쎄, 잘 모르겠는데?”

“왜 옷도 같은 거잖아, 해골무늬가 있는 노란색 티셔츠.”

“그랬나? 생각 않나. 그러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야.”

아내는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드라마 볼 시간이라며 채널을 돌려버렸다. 나는 기분이 영 좋지 않은 게 드라마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다음날 문밖의 주머니에는 새로운 상표의 우유가 들어 있었다. 만족스런 얼굴로 우유를 꺼내던 아내는 이전의 대리점에서 보낸 고지서를 발견했다. 그것 또한 아내가 기다리던 것이었다. 그런데 금액이 만만치 않았다. 아내는 달력을 넘겨가며 날짜를 셌다. 혹시 잘못 셌을까봐 빨간 색연필로 빗금을 그어가며 다시 셌다. 그러고는 전자계산기를 두드렸다. 아내의 얼굴이 벌겋게 변해갔다.

“이 사람들이 상한 우유까지 모두 계산에 넣었어. 나를 아주 우습게 봤나본데 누가 돈을 낼 줄 알고?”

아내는 대리점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저쪽에선 또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메시지를 남기라는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음성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아내도 바로 메시지를 남겼다. 이런 거 저런 거 따질 정신이 아니었던 게다.

“이봐요, 계산이 틀리잖아요. 상한 우유 값까지 내란 말인가요? 제대로 된 고지서를 가져올 때까지 우유 값을 내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해요.”

아내는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자동응답기를 틀어놓고는 상대방의 흥분된 목소리에 신이 나서 킥킥거리고 있을 그들을 생각하면 더 화가 났을 것이다.

“전화를 안 받겠다 이거지? 이대로 물러설 줄 알아?”

그러나 아내의 목소리는 조금 풀이 죽어 있었다. 상대는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지고는 못 배기는 아내의 성격에 속이 얼마나 끓을까. 그렇다면 오늘 하루 건우는 무사할까. 나는 애틋한 마음으로 건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을 했다.

그러나 퇴근 후 문을 열어주는 아내의 표정은 꽤 밝았다.

“잘 해결됐나 보지?”

“방법을 찾아냈지. 내가 누구야.”

“새로 고지서가 온 게 아니고?”

“곧 올 수밖에 없겠지. 내일까지 새 고지서를 보내지 않으면 돈을 단 한푼도 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단지 내 인터넷 사이트에 고발해버릴 거라고 협박했지. 불매운동을 하겠다고. 우리 단지 가구수가 몇인데 지들이 버틸 수 있겠어?”

아내는 매우 기분이 좋아보였으나 나는 또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당연하지, 그런 놈들은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해.”

다음날, 우유 주머니에는 1000㎖짜리 우유가 두 통 들어 있었다. 새로운 대리점으로부터 하나, 먼저 번 대리점으로부터 하나. 아내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새로운 대리점의 우유만 가지고 들어왔다. 출근길에 문 밖에 놓여 있던 우유는 퇴근길에도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단지 터질 것처럼 팽팽하게 부풀었다는 것이 달랐다.

“고지서에 있는 금액을 다 내지 않으면 우유를 끊을 수 없다는 거야. 말이 돼?”

그러나 그들은 아내의 협박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우유가 배달되었다. 아내는 집 안으로 우유를 들여놓지 않았다. 우유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부풀어져서는 당당하게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 해골무늬 노란티셔츠의 청년을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몇 번 마주쳤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잦았다. 그를 처음 마주친 것은 24시간 편의점에서였다.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료수를 꺼내다가, 컵라면이 쌓여 있는 진열대를 그가 기웃거리는 것을 보았다. 꽤 늦은 시간이었고 나는 술에 좀 취해 있었다. 그를 보자 팔뚝에 소름이 돋으면서 술이 확 깼다. 그다음 그를 본 것은 지하철에서였다. 출근 길 지하철 안은 꽤 복잡했으나 나는 그가 입은 해골무늬 노란 티셔츠를 금세 식별했다. 그는 야구 모자를 쓴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모자 밑으로 그의 소심한 눈이 번뜩이며 내 동향을 좇고 있는 것 같아 괜히 불안했다. 건우를 데리고 놀이터에 갔다 오는 길에도 멀찍이서 노란색 티셔츠가 지나가는 것을 언뜻 보았다. 나도 모르게 건우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불안에 떠는 사이, 아내는 분주히 움직였다. 아내는 아파트 주민용 인터넷 사이트에 ‘당신의 아이가 먹는 우유 이래도 됩니까?’라는 제목으로 사연을 올렸다. 처음 상한 우유가 들어온 것부터 바캉스 기간 내내 상한 우유가 쌓여간 것이며, 이제 아예 상한 우유 값까지 내라고 협박을 하는 얘기를 구구절절이 남겼다. 그리고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우유의 사진을 찍어서 첨부했다. 단지 우유 값을 연체한 얘기만 건너뛰었다.

안타깝게도 아파트 주민용 사이트의 방문자는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개인 홈페이지에 열중하느라 그런 사이트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 아침부터 밤까지 끊임없이 인터넷을 들락거리던 아내는 전화통을 붙들기 시작했다.

“민주 엄마, 사람이 왜 그렇게 살아? 우리 아파트 사이트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지? 자기, 신문은 보고 사냐?”

“승준 엄마? 아파트 사이트에 내가 글 올려놨으니까 지금 당장 들어가 봐.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좀 알려. 이건 정말 생명이 달린 중요한 얘기야.”

“반장님, 사실 이런 일은 반장님이 앞장서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어디 세상 무서워서 애들을 키울 수 있겠습니까. 그렇죠. 그런 사람들은 우리 단지에 발을 못 들여놓게 해야죠.”

통화의 효과는 생각보다 빨리, 강하게 나타났다. 아내가 아는 사람들과 또 그들이 아는 사람들과 또 그들이 아는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다. 인터넷에 익숙한 젊은 여자들은 모두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그런 악덕 업체는 뜨거운 맛을 봐야 한다. 우리 아파트 주민들을 뭘로 본 것이냐. 평수가 큰 건너편 동아 아파트였다면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먹는 것으로 저지른 벌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나도 그 우유 먹였는데 당장 끊겠다……. 소문은 들었으나 컴맹이라 인터넷에 댓글을 달 수 없는 사람들은 아내를 찾아와 함께 울분을 터뜨렸다.

언제까지나 탄탄할 것 같던 동맹은 삼일이 못 가서 깨어졌다. 새로운 댓글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고, 이전에 있던 댓글마저 하나 둘 사라져 가는 것을 보는 아내의 얼굴에는 혼돈의 빛이 역력했다. 단지에서 만난 이웃들은 아내를 슬슬 피하기까지 했다. 아내의 궁금증을 해결해 준 것은 집집마다 배달된 산세베리아 화분이었다. 집 안 공기를 청정하게 해준다잖아, 라고 윗집 사는 민주 엄마는 얼버무렸지만, 눈치 빠른 아내가 산세베리아의 출처를 모를 리 없었다. 아내의 뒤통수에 대고, 그러게, 왜 우유 값을 제때 안 내, 라며 아내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대리점은 잃을 뻔했던 고객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없던 고객도 따냈던 것이다. 인간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하던 아내는 마침내 마음을 추스르고 말했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소비자고발센터는 괜히 있는 줄 아나보지!”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의 냉면집에서 나는 또 해골무늬 노란 티셔츠의 남자를 보았다. 박 대리와 함께 냉면을 먹는 동안 계속해서 그에게 신경이 쓰였다.

“그러니까요, 과장님, 브루스 리, 이소룡도 말입니다. 한참 정상가도를 달리던 그가 왜 서른두 살에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져 죽느냔 말입니다. 의사가 밝힌 사망 원인은 그가 두통약으로 먹은 에콰제식의 성분에 민감한 반응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다른 의사들은 동의하지 않았다잖아요. 홍콩을 비롯해 전 세계 무예계에 그의 죽음에 대한 여러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지요. 게다가 이소룡이 죽기 몇 달 전부터 그가 죽었다는 헛소문도 돌았다니, 음모론이 나돌 만하지요.”

“음모? 그가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 죽었다는 건가?”

나는 박 대리가 말한 ‘음모’란 단어에 솔깃했다. 그러고 보니 박 대리는 오늘 따라 음모에 대해 유독 관심을 보였다. 주문을 하기 전부터 냉면을 먹으면서도 쉬지 않고 메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 위로 떠도는 갖가지 음모들을 침을 튀기며 늘어놓고 있었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1970년대에 트라이어드 같은 중국 범죄조직의 범행이라는 것이죠. 그치들은 홍콩의 영화배우들에게서 보호 명목으로 돈을 뜯어냈는데 이소룡은 이런 요구를 과감히 거절한 것이죠. 그 때문에 괘씸죄로 찍혀 독살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죠.”

박 대리의 말을 들으며 나는 해골무늬 노란 티셔츠를 슬쩍 보았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대각선으로 좀 떨어진 곳에서 해골무늬 노란 티셔츠는 핏물처럼 빨갛게 범벅이 된 비빔냉면을 먹고 있었다. 유령처럼 예기치 않은 장소에 불쑥불쑥 나타나는 그가 나는 점점 두려워졌다. 그가 무언가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 같은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그날 따라 냉면집의 에어컨은 너무 세게 가동되었다. 얼음이 둥둥 떠 있는 물냉면의 국물을 한 모금 마시자 이가 딱딱 부딪혔다.

아르바이트생인 그 청년은 아내로 인해 아르바이트 자리를 잃었을지도 몰랐다. 손해액을 변상하라거나,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급여를 줄 수 없다고 협박을 당했을지도……. 그 뻔뻔한 대리점 주인은 그딴 짓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상한 우유의 값까지 계산해서 보낸 사람이 아닌가. 그 순간 왜 갑자기 폐륜아의 누나가 한 말이 떠올랐을까. 그녀는 그 애가 얼마나 소심하고 얌전한 아이였는지 모른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오열했다. 홧김에 그 소심하고 평범해 보이던 아르바이트생이 범죄를 저지르면 어쩌나…….

이쯤 되자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일을 하다가도 고개를 들면 해골무늬 노란색 티셔츠와 마주칠 것만 같았고 화장실을 갈 때도 왠지 불안했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 그가 잠복해 있다가 내 눈 앞에 칼을 들이대는 장면이 상상되기까지 했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야에 그가 들어오지 않으면 안심하다가도, 어디선가 몰래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해코지라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불안해졌다.

그가 건우나 아내의 근처를 얼씬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가 건우의 얼굴을 본 것이 꺼림칙했던 기억이 났다. 부모의 직감이었을까? 나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여자가 도대체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 건우가 올 시간이 다 됐는데. 나도 모르게 거친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옆자리의 박 대리가 나를 힐긋 보았다. 아내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부재중이니 다음에 다시 걸어 달라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처가에 전화를 걸었다. 처가에도 처형의 집에도 아내는 없었다. 아내의 행방이 묘연해지면서 심장이 점점 빨리 뛰었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우유팩처럼 혈관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외출을 신청했다. 회사를 나오면서도 누군가 나를 미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맘 같아서는 건우가 다니는 유치원으로 바로 가고 싶었지만 혹 미행이라도 당한다면 더 위험해질 것 같아 집으로 갔다.

문 앞에는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분노에 가득 찬 우유가 일곱 개나 모여 있었다. 언젠가 저것들이 폭발해 버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내 몰래 가져다 변기에 쏟아 넣고 물을 내려버릴까. 회오리처럼 빠져나가는 물줄기 속으로 뭉텅이진 카제인 덩어리도 감쪽같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얼굴도 모르는 대리점 주인만큼이나 해골무늬 노란 티셔츠의 청년만큼이나 아내도 낯설고 두려웠다.

문을 열고 들어와 보니 집 안이 엉망이었다.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음식들이 뚜껑도 덮지 않은 채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 위로 초파리들이 새까맣게 앉았다가 부스스 날아갔다. 내가 아침에 보았던 신문도 거실 바닥에 그대로 흩어져 있고 건우가 가지고 놀았을 블록도 발에 밟혔다. 아내는 들쭉날쭉한 날씨와 문밖에 쌓여가는 우유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려서 도무지 살림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정리는 좀 하고 살지. 나는 블록을 집어서 바구니에 넣다가 문뜩 이곳이 사건의 현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 나는 집어들던 블록을 다시 내려놓고 살금살금 걸어서 안방 문을 열었다. 누가 왔다 간 흔적처럼 침대 위에는 아내의 옷이 여러 벌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건우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다행히 건우의 방은 평소와 많이 다르지 않았다.

다시 아내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여러 번 가도록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음이 점점 불안해졌다. 나는 건우의 유치원에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전화번호를 몰랐다. 아내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을 번호를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유치원에서 받아 온 유인물도 어디다 두었는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직접 찾아가볼 수밖에 없었다. 막상 찾아가려니 마음이 급해져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집 밖을 나오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 계단 어디에서 그가 나를 지켜볼까봐 염려가 되었다.

다행히 건우는 유치원에 있었다. 동화책을 읽고 있는 선생님을 둘러싼 아이들 사이에 건우도 고개를 쭉 내밀고 있었다. 그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 그러나 지하철 역사에서 노란 티셔츠를 발견하는 순간 다시 가슴이 졸아들었다. 다시 보니 노란색 티셔츠의 주인은 긴 머리 여학생이었다. 가슴팍에 해골무늬도 없었다. 한적한 오후의 지하철에서도 우유 배달부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빈 의자를 찾아 앉아 숨을 돌렸다. 시원한 냉방이 땀을 말끔하게 식혀 주자 한숨이 새어나왔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그들의 싸움에 말려들고 있었다. 그것은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지하도를 빠져나와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휴대폰이 울렸다. 아내였다.

“전화했었어?”

“도대체 어디 갔었어?”

나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기운이 없었다.

“말도 마. 아침부터 얼마나 바빴다구. 소라 엄마가 구청에서 소비자의 권리에 대한 강연이 있다고 해서 갔다 왔지. 전문가한테 두 시간 동안이나 강연을 들었다구. 필기까지 해가면서 얼마나 열심히 들었는지 알아? 이제 걔들은 다 죽었어.”

아내의 빠르고 높은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쏟아졌다. 나는 아내의 넘치는 에너지가 부러웠다. 그녀와 나는 동갑인데 나만 부쩍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거리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더운 날이었다. 따가운 햇살 속에서 누군가 내 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나는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해골무늬 노란티셔츠였다. 또 다른 누군가가 뒤에서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니, 과장님, 왜 이렇게 놀라세요?”

박 대리였다. 나는 손가락으로 해골무늬 노란티셔츠를 가리켰다.

“저, 저 해골무늬…….”

“과장님, 모르셨어요? 저 옷 요즘 젊은 애들 사이에서 뜨는 디자인이잖아요.

박 대리의 말을 듣고 보니 해골무늬 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저쪽에도, 저기 저쪽에도 해골무늬 노란색 티셔츠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다른 얼굴, 다른 표정을 하고 무심하게 나를 지나쳐 갔다. 간신히 버티고 섰던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박 대리의 팔을 붙잡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내는 인터넷의 소비자보호센터에 사연을 올렸다. 억울한 심정이 신파적 언어로 잘 드러난 길고 긴 사연 아래에는 비교적 짤막한 답변이 달렸다. 〈소비자 분께서 주장하는 부분은 충분히 이해하나 증거불충분으로 중재가 어렵습니다.〉 충분히 이해한 사람이 한 답변치고는 너무 짧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내는 직접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상담원은 처음엔 양자 간에 말로 잘 해결해 보라고 타이르다가, 아내가 꺾일 기세가 아니자 미친개에게 물린 셈치고 그냥 빨리 잊어버리라고 조언을 했다. 그러고는 상담원이 주민등록번호를 불러 달라고 하자, 아내는 구청에서 주워 들은 것은 있어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고선 중간에서 합의가 된 것으로 처리하려고 하느냐,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느냐며 핏대를 올렸다. 아내가 전화를 하는 내내 나는 분쟁이 소비자와 소비자고발센터로 옮겨가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결국 아내는 대리점에 시정경고를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대리점에서 사과 전화가 오길 기다리던 중, 나는 예기치 못한 전화를 받았다. 아내와 건우는 자축파티를 위해 케이크를 사러가고 없었다.

“경호회사 하이에나 시큐리티의 경호팀장 강준구입니다. 근래에 속 썩은 일이 있으시죠? 저희에게 맡겨 주시면 잡음 없이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음산할 정도로 낮았다. 스포츠머리에 검은 양복을 입고 새까만 선글라스까지 쓴 남자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떻게 우리 집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을까? 소비자고발센터에 고발한 내용이 빠져나간 것일까? 의문이 가는 점이 많았으나 나는 그에게 묻지 못했다. 단지, 좀 생각해 본 후에 연락을 하겠다는 말만 했다.

“연락 주시면 고객님의 마음과 뜻과 목숨까지 지켜드리겠습니다.”

여운을 남기며 그의 낮은 목소리가 사라지자, 착잡한 감정이 몰려왔다.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사람이 내게 접촉을 해온 것하며 목숨을 지켜 주겠다는 과격한 말까지 남긴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일이 너무 커져 가는 것에 대해 나는 두렵고 화가 났다. 아내가 돌아오면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든 것에 대해 따질 생각이었다.

아내를 기다리며 거실을 서성이는 동안 생각은 점점 바뀌어 갔다. 여차하면 나는 그를 이용할 수도 있었다. 아내는 요즘 들어 종종 내게 불만을 표시했다. 강 건너 불 구경한다며 나의 태만함에 대해 화를 내기도 했고, 뭐가 그렇게 겁나냐며 경멸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나는 해골무늬 노란 티셔츠 때문에 두려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다시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그 같은 공포를 이용해 대리점 주인을 혼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섣불리 경호팀장이라는 남자를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지만 최신무기라도 하나 감추고 있는 것처럼 든든하게 느껴졌다. 전세(戰勢)는 역전되고 있었다.

삼일이 지나도록 대리점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우유는 계속해서 들어왔다. 소비자고발센터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상담원은 서류를 확인해 보더니 시정경고를 보낸 것이 확실하다고 했다.

“원하신다면 다시 한 번 시정경고를 할 수는 있지만, 증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그 이상 어떤 조치도 불가능합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나는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검색버튼을 누르고 하이에나 시큐리티를 입력하자 경호회사의 전화번호가 액정화면 위로 떠올랐다. 출근길에, 나는 대리점을 찾아갔다. 대리점 앞에 있는 커다란 초록색 플라스틱 통들 안에는 크고 작은 우유팩들이 빽빽하게 들어 있었다. 동굴 속을 탐사하듯 쌓아 올려진 우유팩들 사이사이를 지나가자, 대리점 안쪽 깊숙한 곳에 주인이 앉아 있었다. 그의 적당히 살이 오른 얼굴은 얼핏 보면 인자한 인상으로까지 보였다. 그의 반들거리는 대머리가 어둑어둑한 공간에서도 반짝였다.

“어떻게 오셨지요?”

그가 나를 힐긋 보며 말했다.

“소비자고발센터에서 경고조치를 받으셨을 텐데요.”

나는 되도록 목소리를 낮게 깔고 힘을 주어 말했다. 그것은 흡사 경호팀장의 말투와 비슷했다.

“글쎄요, 제가 메시지 확인을 잘 안 해서요…….”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는 듯, 그는 말끝을 흐렸다.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라고 말하며 책상을 한번 쾅 내리칠 참이었다. 그때 그의 책상 위에 놓인 명함이 눈에 들어왔다. 금박으로 테두리까지 입힌 명함에는 분명 하이에나 시큐리티라고 적혀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조용히 지갑을 열었다.

“진작 그러실 것이지. 우유는 기어코 바꾸실 건가요?”

상한 우유뿐 아니라 오늘 아침에 들어온 우유의 값까지 모두 합한 돈을 세면서 대리점 주인이 말했다. 그의 느물거리는 웃음을 보며 나는 그가 새로운 우유에 독극물이라도 집어넣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나는 서둘러 대답했다. “이번에는 1년 계약이라 어쩔 수가 없고요, 대신 그 계약이 끝나는 대로 바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좋지요. 근데 믿어도 되겠죠?”

“가계약이라도 할까요?”

“뭐, 그러실 필요는 없고 일단 믿어보지요. 아저씨는 경우가 바른 사람인 것 같구먼.”

그는 옆에 있는 초록색 플라스틱 통에서 200㎖ 우유를 하나 꺼내 내게 건넸다. 차가운 우유팩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저, 상한 우유 값은 제한 금액으로 영수증을 좀 부탁해도 될까요? 아무래도 아내가 알면…….”

“하하, 역시 현명한 남편이십니다.”

그는 흔쾌히, 영수증에 힘을 주어 금액을 적고, 사인을 했다.

대리점을 나오자 햇살이 따가웠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과 목을 닦았다. 하얀 손수건에 누르스름한 얼룩이 생겼다. 몇 걸음 걷고 나니 갈증이 일었다. 들고 있던 우유를 열었다. 파란색 우유팩 속에서 찰랑거리는 순백의 우유를 보는 순간, 훅! 구역질이 넘어왔다. 여름은 끝없이 이어질 듯했다.

〈끝〉

◇그림 = 화가 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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