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명 : 길과 시, 그 풍경의 안과 밖―오규원론
성 명 : 전병준
1. 길은 나누면서 잇고, 이으면서 나눈다

길은 이곳과 저곳을 가른다. 길이 나누어 놓은 이곳과 저곳은 그러나 단순한 나눔의 산물이 아니다. 지나다니는 이들이 많은 곳에 생겨나는 길은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곳과 저곳을 분리하고 둘의 얽힘을 방해한다. 이곳에 있는 것들은 그것들끼리의 공간을 이루며, 저곳에 있는 것들 또한 그것들끼리의 공간을 이룬다. 이곳과 저곳은 공간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지만 서로에게 다가가기 힘든 두 공간은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고 상대방의 세계를 배제하기에 이른다.

길을 걷는 이는 언제나 길 위에 있다. 그것은 길의 위이지만 길의 안이기도 하다. 길의 안쪽은 바깥쪽과 구분되어 비로소 길이 된다. 길은 바깥과 다른 안이 있기에 길이 되는 것이다. 길 밖이 길이 아니라 길 안이 길이다. 그러나 걷는 이에게 길 안의 풍경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길 밖의 많은 풍경이 길 안의 풍경과 동시에 주어진다. 무엇이 안이고 무엇이 밖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안과 밖은 서로 겹치며 언제나 함께 어울리면서 풍경으로 나타난다.

길을 걷는 이가 안의 풍경과 밖의 풍경을 함께 본다고 하더라도 바깥의 존재는 여전히 불안하다. 선행자들이 지나간 길의 안쪽이 이미 알고 있는 영역이라면 아무도 간 적 없는 바깥은 아직 모르는 영역이다. 알지 못하기에 바깥은 낯설고, 낯선 존재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이곳의 평안을 흔들기에 충분하다. 동요가 미약하다 하더라도 균열은 앎의 세계를 무화시킬 수 있는 작지만 큰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미지의 영역인 바깥으로부터 안의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해 애써 모른 체하거나 과감히 그것의 침임을 막는 전략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무시와 방어가 아무리 완강하다 하더라도 바깥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 바깥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곳에 이미 들어와 있다. 안이 그것으로만 지탱될 수 없다는 사실, 바깥이 안을 안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고 안은 바깥과의 접촉과 얽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 안의 세계에 이미 바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길은 안과 밖의 상호 침투와 상호 작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은유이다. 그러나 그것은 은유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다. 또 다른 의미로 환원되어 고정됨으로써 가치를 지니는 은유로서가 아니라 언제나 움직이고 생성되는 사건으로서 길은 존재한다. 길은 이쪽과 저쪽을 나누며 이쪽과 저쪽의 사이에 있다. 길은 차이를 분간하게 해주는 경계선이기도 하지만 이쪽과 저쪽이 마주 서 있는 접점이기도 하다. 경계선으로서, 접점으로서 길은 나눔을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마주침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세계는 길에 의해 나뉘지만 동시에 길에 의해 연결된다. 길은 안과 밖을 나누며 잇는 과정을 통해 길이 된다. 그래서 길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길은 나누면서 잇고, 이으면서 나눈다.


2. 마음은 보이지 않는 길 밖으로 흐른다


여덟 권의 시집을 내면서 30년 이상 시를 써온 시인에 관하여 어떤 이야기가 가능할까. 자신의 시 쓰기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반성해 온 오규원과 같은 시인에게 어떤 이름표를 붙인다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불가능할지 모른다. 이렇다고 말하면 저쪽의 시들이 아니라고 하고, 저렇다고 말하면 이쪽의 시들이 가만 있지 않는다. 쉽게 읽히는 시가 있는가 하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갈피 잡기 힘든 시도 있다. 의미가 저절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은 독자에게 당혹감을 주지만, 오히려 그런 곤혹스러움이 그의 시를 읽는 즐거움이다. 하나의 체계로 동일화할 수 없는 차이가 그의 시를 그만의 시답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다.

한 쪽에 단아하고 서정적인 시가 있고, 다른 한 쪽에 난해하고 전위적인 시가 있다. 그의 시는 이쪽에도 속하지만 동시에 저쪽에도 속한다. 이것이면서 동시에 다른 것일 수 없다는 논리학적 추론의 바깥에 그의 시는 그물처럼 펼쳐져 있다. 그의 시는 여기에서 저기로 움직이고 저기에서 여기를 가로지른다. 나누면서 잇고, 이으면서 나누는 길을 따라 오규원의 시는 짜이고 엮인다. 때로는 조용하게, 때로는 과격하게 씌어지는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는 그가 가는 길을, 그의 시가 가는 길을 따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


1

들은 길을 모두 구부린다

도식주의자가 못 되는 이 들[平野]이

몸을 풀어

나도 길처럼 구부러진다


2

종일

바람에 귀를 갈고 있는 풀잎

길은 늘 두려운 이마를 열고

나를 멈춘 자리에 다시

웅크린 이슬로 여물게 한다


모든 길은 막막하고 어지럽다 그러나

고개를 넘으면

전신이 우는 들이 보이고

지워진 길을 인도하는 풀이 보이고

들이 기르는 한 사내의

편애와 죽음을 지나


먼길의 귀 속으로 한 발자국씩

떨며 들어가는

영원히 집이 없을 사람들이 보인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순례 序」 부분, 2 ; 11-12)


들이 있고 길이 있다. 길은 들 위에 있고 “나”는 그 길을 걷는다. 나는 길을 따라 어딘가로 향한다. 그러나 이 시의 길은 명확하게 목적지를 표시해주지 않는다. 들과 길과 내가 있을 뿐이다. 들은 “도식주의자”처럼 명확한 대립과 분리의 논리로 길을 나누지 않는다. 들은 도식주의자가 아니고, 또 될 수 없기에 길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다. 길이 들에 작용하고 들이 길에 간섭한다. 그래서 들은 길을 도식처럼 만들지 않고 “구부린다.” 길을 걷는 나도 “길처럼 구부러”지며 길을 따른다.

구부러진 길이 어디로 이를지 모르기에 “모든 길은 막막하고 어지럽다.” 길은 어딘가에서 시작하지만 어딘가에서 끝이 나기 마련이어서 바른 길이기만 하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이다. 하지만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고, 어디로 나를 데려갈지 알 수 없을 때 길에 대한 믿음은 의심받는다. 길이 지워져 나는 방향을 잃고 멈춰 선다. 길이 나를 “멈춘 자리”에서 “웅크린 이슬”이 되게 한다. 그러나 “고개를 넘”고 “편애와 죽음을 지나”면 사람들이 있다. “풀”이 “지워진 길을 인도”하여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이어준다. 지워진 길이 풀의 도움을 받아 이어지며 나를 사람들에게로 이끈다. 생겨나서 구부러지고, 또 지워지고 이어지는 길을 따라 나는 사람들의 세계에 이르렀다. 그들은 어딘가로 “떨며 들어가”고 있다. 그곳은 “먼 길의 귀 속”이다. 그들이 가야 할 길은 멀고 아득하다. 그들에겐 “영원히 집이 없”기 때문이다. 집이 없어 그들은 떨며 먼 길을 끊임없이 걷는다.

갑자기 “바람이 분다.” 바람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흔든다. 그러나 흔들림은 동시에 살아 있음을 증명해 준다.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순례11」, 2 ; 27) 흔들림을 통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흔들림은 내가 나 아닌 것들을 만날 때 발생한다. 나는 알 수 없는 낯선 것들을 만나며 불안해하고 동요하지만 그들과의 마주침을 통해 나는 나를 확인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나로 존재할 수 있다. 이제 나는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한다.


하나 더하기 둘은 셋, 둘 더하기 셋은 다섯, 이 사랑스럽도록 확실한 수치들. 이 의심할 수 없는 명확함을 웃어버리는 빗방울들. 빗방울들이 주저 없이 몸의 수치를 무화시킨다. 부서지는 아픔, 무화되는 아픔, 그러나 사랑의 다른 이름인 빗방울.

「빗방울 또는 우리들의 언어-양평동 5」 부분, 3 ; 60


유리창과 안개에게

먼 곳을 멀게 가까운 곳을 가깝게, 낡은 것을 낡은 것으로 보여주는 유리창아, 아침이다 인사를 하자. 그러나 보이는 것만 보여주고 보이지 않는 저쪽, 보이지 않으므로 더욱 보고 싶은 것은 하나도 보여주지 않는 그대, 그리하여 유리창도 결국 유리로 된 벽이다라는 사실을 볼 때마다 다시 깨닫게 해주는 순진한 유리창아. 밤새 안녕!

「네 개의 편지-양평동 7」 부분, 3 ; 70


“하나 더하기 둘은 셋”이라는 자명한 이치를 빗방울은 “웃어버”린다. “명확”한 앎의 세계에서 가장 단순해서 보편적인 진리인 산술의 규칙에 빗방울은 관심이 없다. 빗방울은 이것과 저것 사이의 분리를 알지 못한다. 빗방울에게는 하나와 다른 하나가 같은 것이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빗방울의 물리적 외면만은 아니다. 아픔을 겪으며 하나가 되는 빗방울을 시인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 부르고자 한다. ‘나’는 절대 ‘너’가 될 수 없고 ‘너’ 또한 결코 ‘나’가 될 수 없다. 나와 너는 이렇게 근원적인 차이를 지닌 존재들이다. 나와 너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놓여 있다. 하지만 사랑은 나를 너에게로 건네주고, 너를 나에게로 되넘겨 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나와 너는 사랑을 통해서 비로소 만날 수 있다.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 “부서지”고 “무”가 되는 아픔이 사랑의 필연적인 과정이다. 하지만 사랑의 고통을 견딜 수 있을 때, 고통을 자신 곁에 두어 자기 것이라 할 수 있을 때 하나의 빗방울은 다른 하나의 빗방울과 결합되어 ‘하나’가 된다.

이것과 저것의 차이가 지워져 없어짐은 사랑의 상상 속에서 가능하다. 일상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구별이 있고, 구별은 때로 폭력이 되기도 한다. 창의 안에서 시인은 바깥을 바라본다. “먼 곳”은 멀게 “가까운 것”은 가깝게 보여주는 투명한 막인 창은 안과 밖의 교류를 막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보이는 것만 보여”주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여주지 않는” 창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모습만을 가감없이 전달한다. 시인은 볼 수 있어서 명확하고 판명한 이쪽이 아닌, 보이지 않는 저쪽이 보고 싶다. “보이지 않기에 더욱 보고 싶”다. 창이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전달한다 하더라도 창 밖 세계의 진상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창이 전달하는 세계는 창이라는 좁은 테두리에 한정된 광경이다. 창은 시인의 시각을 제한하여 보이는 것만 보라고 강요한다. 창의 표면을 통해 공간의 안과 밖이 구분되고, 시선의 안과 밖이 창틀을 통해 분리된다. 보이지 않고 닿을 수 없는 영역을 가로막고 있는 유리창은 결국 안과 밖의 접합을 금지하는 “유리로 된 벽”일 뿐이다. 창이 있어 개방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폐쇄된 이쪽의 세계를 떠나 열려 있는 저쪽, 바깥의 세계로 시인은 가고 싶다.


개봉동 입구의 길은

한 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고,

굽은 길 어디에선가 빠져나와

장미는

길을 제 혼자 가게 하고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 선다.

(…)

말해보라

무엇으로 장미와 닿을 수 있는가를.

저 불편한 의문, 저 불편한 비밀의 꽃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두드려보라 개봉동 집들의 문은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다.

「개봉동과 장미」 부분, 3 ; 77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한 잎의 여자」 전문, 3 ; 101


“한 송이 장미”가 길을 한 쪽으로 “굽”히는 “개봉동 입구”에서 시인은 “길 밖”을 꿈꾼다. 이곳에 대한 앎보다 바깥으로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길 밖에 머물면서도 길에 작용을 가하는 장미는 닿고 싶은 그 무엇이다. 그러나 욕망의 대상인 장미에 관해서 아는 바는 없다. 알 수 없기에 “불편한 의문”이고 “비밀”이다. 어떻게 “장미와 닿을 수” 있는가를 묻지만 듣는 이도 없고 대답도 없다. 장미에 가 닿을 수 없어 “집들의 문은 닫”히지만, 문이 먼저 닫혀 있어 장미에 닿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닫힌 문은 장미라는 바깥의 존재를 모른다.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 문은 바깥과 아무런 교류를 용인하지 않는다.

“한 잎의 여자”에 대한 사랑이 두 번째 인용시의 주조이다. 그 여자는 물푸레나무 나뭇잎처럼 “쬐그”맣지만 쬐그마해서 “바람이 불면” 흔들릴 수 있는 여자이다. 움직일 수 있으므로 어디에 고정되지 않고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그녀는 그래서 “보일 듯 보일 듯”하다. 하지만 보일 듯할 뿐 아직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지는 않는다. 보일 듯하지만 아직 보이지 않는, 닿고 싶지만 아직 닿지 못한 한 잎의 여자는 “순결과 자유”의 표상이다.

“정말로”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는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그래서 순수한 결정체로서의 여자이다. 동시에 그녀는 “눈물” 같기도하고, “슬픔” 같기도하고, “병신” 같기도 하고, 또 “시집” 같기도 하다. 순수한 여성성을 지닌 그녀는 슬픔이며 눈물이며 고통이기 때문에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이다. 누구와도 만날 수 없고, 만날 수 없기에 사랑할 수 없어 그녀는 “불행” 하다. 아무도 가질 수 없기에 “나 혼자 가지는” 여자이다. 나의 그녀가 지닌 슬픔이 나에게 전해진다. 한 잎의 여자는 그러나 실체가 아니다. 그녀는 “물푸레나무 그림자”처럼 눈 앞에 확실하게 존재하지 않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다. 한 잎의 여자는 오히려 시인이 만나고 싶고, 가 닿고 싶은 목표 혹은 진리인지 모른다.

3. 빌어먹을 보수주의여, 안녕


바깥으로 가고 싶은 열망이 크다고 하더라도, 열망이 커서 상상 속에서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언제나 이쪽에 있다. 이쪽의 세계에서 언제나 이쪽의 이데올로기의 위협을 받는다. 바깥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희망으로 그냥 뛰어들면 되는 것이 아니다. 바깥은 안이 만들어놓은 또 다른 허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깥에 대한 희망만 가지고서는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 경계를 뛰어넘기 위해서 이곳의 거짓과 거리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곳의 거주자인 내가 이곳의 허위에 얼마나 물들어 있는가, 그리고 이곳이 나에게 강요하는 편견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그에 따르는 질문이다.


당신의 믿음 또는 당신의 고정 관념이 그렇게 믿으므로 선은 그렇게 언제나 당신이 아는 선으로 있으려니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病입니다

믿음 또는 고정 관념이란.

보십시오, 선은 움직입니다

존재하는 그때의 양식 그만큼

누가 움직이고 있는 그만큼.

「우리집 아이의 장난-다섯개의 우화 3」 부분, 4 ; 58-59


이 거리가 나를 내가

가두게 한다

이 거리의 속도가

이 충무로가 나를

내가 가두게 한다

치사하게 내가

비겁하게

나를 가두게 한다

「충무로에서」 부분, 5 ; 45


시인은 “당신”에게 말한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고정관념이다.’ 당신이 알고 있다고 믿으므로 언제나 그대로 세상이 있으려니 하지만, 그런 믿음 자체가 “병”이다. 알고 있는 것만 알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믿음 또는 고정관념”이란 “존재하는 그때의 양식”과는 관계가 없다. 선이 그대로 있으리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그것은 “움직”인다. 이런 움직임을 모르면 고정관념에 갇힐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오가는 공간인 거리에서 “나”는 갇혀 있음을 느낀다. 거리의 믿음이 거짓인줄 아는 나는 거리에게는 위험한 존재이다. 체계가 인정하는 법칙을 벗어난 이들은 체계의 입장에서 보면 없애야 할 병균이다. 그것의 제거를 통해 체계는 건강해지고 현재의 모습대로 유지될 수 있다. 거리는 나에게 자신을 “가두”라고 한다. 거리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거기서 통용되는 믿음을 제외한 모든 것이 금지되기 때문이다. 거리는 드러나게 나를 가두지는 않는다. “나를 내가 가두게 한다.” 스스로 그 믿음을 내면화하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엄마엄마이리와요것좀보세요

개나리꽃밭에오늘은봄비가병아리로종종거리고

노랗게종종거리는봄비를개나리가데리고

언덕너머대학에서온페퍼포그의

아랫도리사이로떠돌아요

「시인구보씨의 일일 - 개나리꽃밭에서 불러본 동요」 부분, 5 ; 71


젊은 여자를 강간하고 국부를 담뱃불로

지지며 배 밑에 대검을 꽂아놓고

발가벗긴 여자에게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 깃든다며 팔굽혀펴기를 시키며즐거워한 그때처럼 손자에게 같은 말로

운동을 가르치고 있다 라즐로氏

「그는 아직도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다 - 영화 뮤직 박스 이후」 부분, 6 ; 20


평화로운 듯 보이는 이곳의 풍경은 겉모습일 뿐 실제는 황폐하고 잔인하다. 봄의 평화로운 한 때를 노래하는 어린 아이의 말 속으로 “대학에서 온 페퍼포그”가 날아든다. 개나리가 피고 비가 병아리처럼 조용히 내리는 이 꽃밭은 잔인한 현실 앞에서 찢기고 상처받는다. 개나리는 평화스런 이곳뿐 아니라 끔찍한 저곳에도 피어 있다. 평화로움과 순수함이 폭력과 뚜렷한 경계에 의해 구분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구분은 무의미하다. 폭력과 광기에는 경계가 없고 한계가 없다.

여자를 “강간하고” 고문하면서도 행복하고,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 깃든다”고 손자에게 가르치는 노인의 모습이 나타내는 현실의 이면은 끔찍하다. 겉으로는 평화롭지만 그 밑에는 무서운 폭력이 깃들어 있음을 시는 보여준다. 시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세계를 이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시에는 누추하고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生밖에”(「용산에서」, 3 ; 11) 없다.

시인의 눈에는 “안녕한 것이 생소”하고, “우스꽝”스럽다. 불편과 미지를 감추며 평화로움을 애써 보존하고 현상을 유지하려는 경향에 대해 시인은 야유를 보낸다. “빌어먹을 보수주의여, 안녕.”(「우리 시대의 순수시」, 4 ; 41, 47) 여기서 보수주의는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라 왜곡된 현실을 그대로 지속시키려는 모든 움직임을 의미한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과 이면의 추악함이 이렇게 양분되어 있으면서도 현실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이런 현실의 잔인한 이면을 고발하면서도 사물의 본성에 다가가기 위해 오규원은 다양한 방법적 전략을 보여준다. 광고의 문구를 그대로 시에 삽입하기도 하고 교환가치로 전락한 상품으로서의 시의 현상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그는 현실의 허위를 꼬집고 풍자한다. 이런 방법이 시로 구체화된 것이 오규원의 새로운 시작법이다.


내 앞에 안락의자가 있다 나는 이 안락의자의 시를 쓰고 있다 (…) 아니다 나는 인간적인 편견에서 벗어나 다시 쓴다 (…) 나는 아니다 아니다라며 낭만적인 관점을 버린다 안락의자가 형광등 불빛을 가득 안고 있다 시각을 바꾸자 (…) 안 되겠다 좀더 현상에 충실하자 (…) 오 이것은 수천 년이나 계속되는 관념적인 세계 읽기이다 관점을 다시 바꾸자 (…) 이건 어느새 낡은 의고주의적 편견이다 나는 결코 의고주의자는 아니다 (…) 아니 나는 지금 시를 쓰고 있지 않다 안락의자의 시를 보고 있다

‘안락의자와 시‘, 7 ; 16-18


시인은 안락의자를 보며, 그것이 촉발하는 생각을 시로 쓰고 싶어한다. 그래서 펜을 들고 안락의자의 시를 쓰기 시작한다. 시인도 인간이기 마련이어서 “한 사람의 몸이 안락할 공간”이라는, 인간이면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안락의자를 본다. 현상을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현상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이것은 시인이 시를 통해서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적인 모든 선입견에서 벗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인간적인 관점과 개인적 편견을 버리려 시인은 애쓴다. 그것에서 “벗어나 다시” 쓰려 한다. 시인은 이제 인간보다 넓은 차원의 “아늑한 우주”를 상정한다. 그것은 “낭만적 관점”이다. 우주는 개인적 차원을 벗어나 있지만 ‘아늑하다’라는 감정이 투사된 시어는 인간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개인적 시각에서 벗어나 조금 더 넓은 시각을 취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 역시 여전히 인간이라는 개인에서 출발한 사고일 뿐이다. 시인은 “시각을 바꾸자”고 다짐하며 “좀 더 현상에 충실하자”는 자신의 시작법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관념적인 세계 읽기”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자신이 추구해온 현상에의 충실이라는 방법도 결국 관념적인 인식으로부터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다는 반성은 인간으로서의 의식 행위와 시 쓰기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6번 버스가 도착한다 진행 방향으로 열린 시월이 잠시 밀린다 떨어진 플라타너스 잎 두 개가 몸을 뒤집는다 한 사내 6번 버스에서 내린다 오른발이 허공의 햇볕에 구두와 함께 떠오르다가 햇볕을 두고 곧장 내려온다 상체가 보도 쪽으로 기울다가 두 발이 지상에서 나란히 평화롭자 바로 선다 사내의 코앞으로 (주)대현의 마르조를 입은 여자가 (2PS)Wine, Grey, (JK/SK) Wool 100% 가을로 또각거린다

�����「1991. 10. 10, 10:10-10:11」 전문, 7 ; 70


인간적인 관점을 극도로 배제한 이 시는 1991년 10월 10일의 10시 10분부터 11분까지의 순간을 그려내고 있다. 아니 그려내고 있다는 표현은 오규원의 입장에서 보자면 맞지 않다. 오히려 사진을 찍고 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사진을 찍는다는 표현도 틀리다. 사진은 시간의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고정된 시간에 멈춰버리는 사진으로, 화가의 시각에 의해 변형되는 그림으로 위의 시를 읽을 수 없다. 이것은 감정이나 의식을 극소화한 오규원의 ‘현상학’이다.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이곳의 세계에 거리를 유지하며 새롭게 세계를 구성해내는 것이 그의 현상학의 의도인 것이다.

4. 허공에는 길이 없고, 길이 없어 길 아닌 것이 없다


바깥에 대한 열망과 안쪽에 대한 거리 두기 사이에서 오규원의 시는 진동한다. 바깥에 대한 열망으로 이곳의 왜곡과 거짓을 보고, 이곳에 처해 있다는 사실의 인식 위에서 저곳을 희망한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본 사람은 아직 없거나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이 아예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바깥이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이곳의 세계가 허위로 가득 차 있고, 바깥의 세계가 그렇지 않다면 그곳은 완벽한 공간일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전체란 다만 이념으로 존재할 뿐이다. 오규원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끊임없이 경계를 넘나들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사막은 經이다

보기조차 힘겹다

인간이면 마땅히

여기까지 와야 한다

한다는 듯

사진 속에서조차

왔느냐

반기지도 않는다

이천 년을 밟고

발밑의 이천 년

樓蘭을 밟고

낙타가 간다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生佛이다

「누란」 부분, 6 ; 100


누란으로 가는 길은 둘이다

陽關을 통해 가는 길과

玉門關을 통해 가는 길


모두 모래들이 모여들어 밤까지 반짝이는 길이다

「길」 전문, 7 ; 12

시인은 누란의 풍경을 사진으로 보고 있다. 그곳은 사막이어서 길이 없다. 그러나 사막은 어디로 가도 길이다. 사막은 그 자체가 “經”이다. 그래서 “보기조차 힘겹다.” 그 사막을 “낙타”가 걷고 있다. 낙타가 걷는 이 길은 이전에 다른 수많은 낙타들이 걸어 간 길이다. 최초에 그 길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그 길을 지금 한 낙타가 걷고 있다는 것이고, 그 길이 “이천 년”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낙타는 그 흔적을 따라 간신히 사막을 횡단하고 있다. 인간이면 마땅히 가야할 극한의 한 비유인 누란은 시인을 “반기지도 않”고 그냥 있을 뿐이다. 언제 생겨났는지 모르지만 언제 사라질지도 모를 길을 낙타는 걷고 있고, 시인의 눈은 그 발걸음을 뒤따르고 있다. 낙타는 지치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발걸음을 계속한다. 사막을 건너는 낙타는 인간의 위태롭고 불안한 운명을 암시한다. 하지만 낙타의 움직임과 시인의 시선이 함께 얽혀 새로운 길을 만든다. 사막에는 길이 없지만 길 아닌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사막의 가운데 동과 서를 이어주는 “누란으로 가는 길은 둘”이다. 그러나 그곳으로 가는 길이 둘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오가는 이들이 많아 생겼을 그 길은 누란으로 가는 유일한 길도 아니고, 절대적인 길도 아니다. “양관”과 “옥문관”은 수많은 가능한 길 가운데 최소한의 길일 따름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과 인간에 대한 자연의 응전으로 생겨난 두 길인 양관과 옥문관은 목적지로 가는 방법에 대한 상징이다. 그리고 누란은 시인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대한 하나의 암호일 뿐이다. 그러나 누란으로 가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주역』은 “한 번은 음이 되고 한 번은 양이 되는 것을 도”(一陰一陽之謂道)라고 말한다. 여기서 음이 무엇이고 양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음과 양의 두 항이 대립과 분리의 논리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충하고 대리하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음과 양을 꼬아 하나의 직물로 짜는 것이 도이고, 있음과 없음이 엮이어 있음이 없음이 되기도 하고 없음이 있음이 되기도 하는 절합(絶合)이 도이다. 시인이 애독하는 『조주록』을 따라 말하자면 도란 “알고 모르고에 속하지 않”고, “생기고 없어지는 데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이런 도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묻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인가.

양관과 옥문관, 그리고 누란의 주위에 “모래”가 펼쳐져 있다. 길 안에도 있고, 길 밖에도 있는 모래야말로 이 곳의 주인인지 모른다. 무한한 모래는 낮이면 뜨거워졌다가 밤이면 싸늘히 식으며 변화하는 존재이다. 모래는 운동과 변전(變轉)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상징을 넘어선다.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 저리 움직이며 길을 만들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는 사막의 모래는 “끝없이 다른 그 무엇”(「나와 모래」, 7 ; 91)이며 그 자체가 차이를 생성하는 힘이다. 안과 밖을 짜고 엮어 길을 만들기도 하고 때로 없애기도 하면서 변화를 만드는 힘이야말로 모래의 본성이라 할 만하다. 여기서 인간의 존재는 미약하다. 인간은 만들어지고 또 지워지는 사막의 길을 걸어가는 낙타처럼 다만 걸어갈 운명을 타고난 존재일 뿐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사막의 길을 걷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낙타가 그의 동반자가 될지 모른다. 그 길에 모래는 다만 “모여들어 밤까지 반짝”이고, “모래의 우주 行間에 인간이 산다.” (「사막 1」, 6 ; 21)


강의 물을 따라가며 안개가 일었다

안개를 따라가며 강이 사라졌다 강의

물 밖으로 오래 전에 나온

돌들까지 안개를 따라 사라졌다

돌밭을 지나 초지를 지나 둑에까지

올라온 안개가 망초를 지우더니

곧 나의 하체를 지웠다

하체 없는 나의 상체가

허공에 떠 있었다

나는 이미 지워진 두 손으로

지워진 하체를 툭 툭 쳤다

지상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강변에서 툭 툭 소리를 냈다

「안개」 전문, 8 ; 15


안개가 끼기 시작하는 강가에서 “나”는 강어귀를 바라보고 있다. 공기 중의 따뜻한 수증기가 차가운 수면과 충돌하여 발생하는 안개는 하얀 김 혹은 연기를 수면에 드리우며 공기와 강의 경계면을 지운다. 안개는 공기와 강의 경계를 없애더니 이제 강을 지운다. 강가에 있는 “돌”을 지우고, “초지”와 “둑”을 지나 “망초”를 지우더니 마침내 “나의 하체”를 지운다. 공기와 물, 따뜻함과 차가움, 고정된 것과 고정되지 않고 흐르는 것 등 세상이 만들어내는 구별과 대립이 안개에 의해 지워진다.

차이와 구분을 지우는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지금의 상태는 백색의 상태이다. 그러나 백색의 상태는 무의 상태가 아니라 가능성으로 가득 찬 상태이다. 안개의 흰 색은 모든 색이 탈색된 무색이면서 그 다음의 어떤 사건의 도래를 기다리는 색으로 극도의 가능성의 표현이다. 시인은 자신의 “지워진 두 손”으로 “지워진 하체”를 쳐 본다. 사물의 분간, 나와 너의 구분, 심지어 내가 나까지도 알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툭 툭” 나는 소리를 통해 나는 나의 존재를 깨닫게 되고, 사물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대립과 분리를 넘어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모든 사물들의 차이가 사라지고 침묵할 때 거기서 울림이 퍼져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사물의 본래 모습을 알고자 하는 노력이기도 하지만 대상에 대한 시각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행동이기도 하다. 우리는 시각이 제공하는 사물의 모습을 하나의 표상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기초해 사물을 파악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사물을 하나의 대상으로 고정시켜 그것의 객관적인 성격을 의심의 여지없이 냉철하게 파악하는 행위이다. 이런 시각에 의한 분별과 폭력이 사라진 정적의 순간에, 은폐되어 있던 존재의 소리가 들려 온다.

모든 차이가 사라진 다음, 시인은 자신의 하체를 치면서 다시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여기서의 차이짓기는 차이가 지워지기 이전의 분리와 대립의 상태로 단순히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차이를 없앤 후의 차이짓기는 차이를 인정하는 차이이다. 다만 그 차이를 구분해내고 지우며 다시 만드는 행위를 하는 자가 시인인 인간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이다. 인간의 분별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 노력이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는가를 이 시는 묻고 있다.


허공에서 생긴

새들의 길은

허공의 몸 안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몸 안으로 들어간

길 밖에서

다른 새가 날기도 하고

뜰에서

천천히 지워질 길을

종종종

만들기도 합니다

「새와 길」 전문, 8 ; 20


새들의 길은 지상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 하늘은 무엇으로 구획할 수 없는 공간이다. 아니 하늘은 공간도 아니다. 다만 허공일 뿐이다. 허공은 비어있지만 비어있어서 새들이 오고갈 여지를 마련해준다. 허공은 무엇이 없거나 부족한 결핍의 상태가 아니다. 허공은 오히려 없음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이다. 허공은 비어 있으면서 가득 차 있다. 충만이기에 덧붙일 수 없지만 비어 있기에 거기에 다른 것이 무한히 보충될 수 있다. 허공에는 어떤 고유한 특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비어 있어 거기 있는 것들이 나타난 모습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허공의 몸 안”으로 새들이 움직이면 그 움직임의 흔적이 길이 되고 안과 밖이 나뉘지만, 그 경계를 나누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한 무리의 새들이 이리로 움직여 길을 내면 다른 새들이 있는 곳은 “길 밖”이 되지만, 길 밖에 있는 새들이 움직이면 그 움직임의 흔적이 길이 되고 다시 안이 된다. 안과 밖의 경계는 거기에 있을 수 없다. 허공에는 어떤 고유한 특성이 없어 중심도 없고 주변도 없다. 중심과 주변, 우와 열, 선과 후 등 생각할 수 있는 대립과 구분이 거기서는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선택과 배제와 같은 배타성도 거기엔 있을 수 없다. 허공은 모든 흔적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거대한 무이다. 허공은 어느 한 쪽도 일방적으로 인정하지 않아 양쪽을 다 긍정하지만, 그 중 어느 한 쪽도 편들지 않기에 양쪽을 다 부정한다. 비어 있음은 이중 긍정이며 이중 부정이다.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보며 대립과 선택을 지우는 이러한 비어 있음을 중용의 도라고 이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5. 길의 시, 시의 길


길은 한 편의 시이다. 길에서 마주치는 안의 존재와 바깥의 존재가 상감(象嵌)되어 새로운 체험을 형성하고, 체험은 물결 무늬를 이루듯 주위로 파동쳐 나간다. 어디에선가 시작되어 사방으로 퍼져가는 물결은 여기 저기서 선후 없이 일어나기에 기원은 중요하지 않다. 파문이 그려내는 흔적, 갑자기 생겨나서 금세 사라지는 파문의 동심원이 시로 기록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시는 길에서 씌어진다. 길은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에서 끝나는 완결된 구조를 지니고 있지 않다. 길은 끊임없는 이어짐이고 운동이며 동시에 생성의 과정이다. 그래서 시는 다시 하나의 길이 된다.

오규원의 시는 길에 관한 체험의 기록이다. 안과 밖의 대립과 긴장이 그의 시에 녹아 있으며, 구별과 분리의 경계선을 만들면서 동시에 지우고 없애는 과정이 그의 시에 퇴적되어 있다. 그의 시는 고정된 것과 정형화된 것에 대한 부정이지만, 동시에 변화와 생성에 대한 긍정이기도 하다. 길과 마찬가지로 시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차이를 생성하면서 무한히 반복되는 과정이지만 그의 시에 대한 이 글은 시작이 있었듯 이쯤에서 끝맺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끝>


주) 오규원의 시를 인용할 때 작품 뒤에 순서대로 시집의 권수와 쪽수를 밝혔다. 그의 시집은 다음과 같다 : 1. 『분명한 사건』 2. 『순례』, 3.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4.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5.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6. 『사랑의 감옥』, 7.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8.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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