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은 비판이지만, 섣부른 ‘포함-배제의 원리’를 배제한다. 서열을 매기기에 앞서서 따뜻한 분석을 선행시킨다.
올해 당선작은 이러한 모습을 가장 잘 갖춘 “연인들의 공동체-황정은, ‘百의 그림자’”로 결정되었다.
정확한 지식과 단정한 문장과 논리 전개는 무엇보다 신뢰감을 준다. 사실 최근의 문학평론은 부정확한 지식 위에 현학적인 문체로 어지러운 분위기를 짐짓 조성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글에 대한 신뢰감을 떨어뜨리기 일쑤다.
이번 응모작들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적지 않게 발견되었는데, 젊은 패기와 도전은 우선 정직·정확·단정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 당선작가가 된 김태선씨의 글은 이 점에 있어서 모범적이며 아직 신인 소설가인 황정은의 세계가 예시적(豫示的)으로 차분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조명된다. 특히 ‘단독성의 공동체’라는 개념의 발견은 흥미롭고, 비평적으로 창의적이다. 게다가 ‘사랑이라는 혁명’의 화두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얼핏 보기에 매우 높은 수준을 보이는 듯한 응모작들에게는 설익은 지식과 정보를 현학적인 문체와 분위기로 호도하는(결과적으로―) 함정이 대체로 숨겨져 있다. 잘 이해되지 않는, 혹은 세밀한 독서는 마침내 그 허구를 찾아내고 탄식한다.
이상한 외국어와 신화상의 용어 차용은 이제 절약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불어 중요한 지적을 한 가지 덧붙인다면, 대상 작품·작가들의 선택에서 이미 첫 평론의 성패는 절반쯤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관의 제시라는 면에서 매우 신중하게 고려될 필요가 있다. 이미 상당한 평가가 끝난 작가를 다루는 일은 평론보다 연구라는 이름에 어울릴 것이다.
시대의 중심 장르에서 비껴지기 시작한 감이 있는 시·시인론을 다룰 때에는 연구의 분위기를 풍기는 분석만으로는 미흡하다. 시대 전체와 맞서 발언하는 지식과 용기까지 요구된다는 것이다.
감수성과 분석력에만 머무르는 시인론으로는 이미 불리한 게임이 되었다. 허민의 박민규론, 김필남의 김경욱론, 노현주의 배수아론, 강영애의 전성태론 등은 이 가운데에서도 앞날이 예감되는 좋은 글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