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별 심사에 들어가기 전에, 갈수록 가독성이 결여되고 있는 기존 소설 풍토에 대한 깊은 우려와 반성의 시간이 있었다. 실험으로 포장한 어설픈 판타지, 매끄럽다 못해 너무 잘 읽히는 광고 카피 같은 소설들, 구시대의 가치나 이데올로기를 적대적 인간관계에 담은 교조적 소설들….
때문에, 해마다 신춘은 삶의 야전에서 스스로 태어난 풋풋한 신인을 맞이하는 설렘이 있다. 먼저 가린 작품은 ‘담장이 되는 과정’ ‘눈이 밟히는 방’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페이퍼 맨’등 네 편이다. 의견을 나누다보니 당선작이 절로 결정되고, 그 결정이 흐뭇해서 웃음이 나온다.
‘담장이 되는 과정’은 작품 속에 무대와 관객이 있는 특이한 설정으로, 스토리가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그 대신 인물의 본연적 행동을 낳게 하는 ‘스스로 갇히는 투명한 의식 내지 외로움이 만드는 보이지 않는 담장 또는 벽’을 주목하게 하려는 것이 작품 의도이다. 매우 진지한 실험으로 읽힌다.
‘눈이 밟히는 방’엔 ‘티베트에 대한 에세이’를 쓰려고 티베트를 방문한 여행가와 통역 일을 도와주는 안내인이 등장한다. 아무리 살아보려 해도 살아낼 수 없어 죽음으로 내몰리는 정치적 상황, 또는 개인적 상황이 있음에도, 섣부른 도움의 손길을 뻗칠 수 없는 ‘고독한 비켜남’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날카롭지만 구성이 에세이적이라는 아쉬움이 크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이야기의 여운이 큰 작품이다. 문제적 제자와 스승 사이에 오고 간 마음의 결이 드라마틱한 상황에서 펼쳐지고 있어 뭉클한 장면들이 많다. 그럼에도 뭉클함을 자아내는 작가의 시선이 다소 상투적이어서 작품의 내적 긴장감이 덜하다.
‘페이퍼 맨’은 문체에 기묘한 매력이 있다. 종이를 씹어 먹는 우스꽝스러운 정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묘사하는 문장 밖의 보이지 않는 익살스러움이 기묘한 매력의 정체다. 때문에 별다른 이야기가 없음에도 흥미롭게 읽힌다. 종이를 먹는 행위와 잡다한 지식의 섭렵을 등가로 인식한 것, 배 속에서 소화된 지식이 오히려 탈사회화로 이끌고, 종이의 원소로 인간을 환원하는 이야기 안의 진짜 이야기가 사뭇 당차게 다가온다. 기대해온 신인의 출현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