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떠맡음
나는 나를 모면할 수 없다. 나는 나를 떠맡아야만 한다. 그 운명이란, 아니, 운명이라 부를 수도 없을 그 절대(絶對)란 무엇일까. 떠맡을 수밖에 없는 나와, 떠맡아지는 나는 무엇일까. 아주 오랫동안, 이 문제는 여러 양태로 번역되어 왔다(혹은 내가 던진 질문이 이 문제들에 대한 번역이요 변용일 수도 있다). 이것은 존재와 무의 문제이기도 했고 삶과 죽음의 문제이기도 했으며, 시간의 문제이기도 했다. 차이(화)의 문제이기도 했고, 자아와 무의식의 문제이기도 했다. 자기와 타인의 문제이기도 했고, 정신과 육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이 문제가 가장 빈번하게 상연(performance)되어 온 곳은 법정으로, 거기서는 행위를 ‘떠맡을 수밖에 없는 나’를 규정하는 온갖 전투가 벌어진다. 미성년자, 금치산자, 광인, 정신병(력)자, 노숙자 등과 같은 자는 ‘나’를 떠맡을 수 없다고 선언된다. 체계가 규정한 ‘법인격’이라 불리는 자 - 이른바 시민, 납세자, 성인 등 - 만이, ‘나’를 떠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들에 대항하여 ‘나’는 언제나 후회하거나 속죄하거나 어느 곳에든 갇히거나 수용되거나 괴로워하거나 혼란스러워하면서 ‘모면할 수 없는 자기’의 몸짓을 보여 왔다. 이 전투는 비평에 깃든 언어적인 수행(performance)에서도 발견된다. 비평이라는 하나의 글쓰기 양식이 과연 독서 경험을 떠맡을 수 있는가? 인간이란 언제나 읽는 자인 동시에 쓰는 자인데, 비평가란 그 둘 사이의 간극을 폭로하고 고백함으로써만 비평의 글을 응고시키는 자에 다름아니다. 여기서 바로 오독과 오해와 오인의 모든 굴레뿐만 아니라 표현의 망설임과 머뭇거림과 서투름을 둘러싼 고백이 등장한다. 평론 형식의 장르규정성이 부상할수록 이편에서는 ‘나는 그렇게 읽지 않았다’고 반항하며 저편에선 ‘나는 그렇게 읽었다’고 대항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비평가는 자신이 읽은 바의 환상을 책임지면서 더듬더듬 나아가는 것에 불과하며, 결국 독해에 대한 영문 모를 죄의식 속에서 ‘자기를 모면할 수 없음’을 드러내고야 만다. 배수아 소설에서 그것은 실종(失踪)의 모티프로 나타난다. 그것을 이른바 주제 ‘의지’화하기 위하여 필자는 그녀의 소설 몇 편을 구태여 하나의 성좌로 본다. 어떻게 과거의 삶을 살았던 너인 나를, 내가 떠맡을 수 있는가. 내가 지금 누워, 잠의 현재 동안 꾸는 꿈을 통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나아가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자라는 전체(全體) 가운데 생을 발산하고 기다림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을까(「올빼미」(2007)). 어떻게 나를 형성한 너의 더 이상 없음 가운데 내가 해낼 수 있겠는가? 배수아는 가장 정제(精製)된 언어로 묻는다. “없음이란 도대체 왜 있어야만 하는가”(145). 도대체 왜 떠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가? ‘올빼미의 없음과 외르그의 없음과 그 한 사람들의 없음으로 인하여’, 결국엔 나 한가운데 있는 나의 상실로 인하여, 나는 내게 ‘떠맡아야 할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올빼미의 없음」(2009)). 없음 자체가 불확실해지는 수니와 경희의 ‘실종’ 가운데, 그것을 찾는 몸짓들(『북쪽 거실』(2009), 『서울의 낮은 언덕들』(2011))을 넘어, 배수아는 걷잡을 수 없는 연상(聯想)으로 인한 도저한 형상들의 떠맡음 자체인 주체에까지, “그토록 섬뜩한 대입”(57) 한가운데의 윤리적 의미에 대한 요청에까지, 나아간다(『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2013)). 지금 이 시대는 우리 자신을 떠맡는다는 것의 의미를 소거시키고 있다. 나를-내가-떠맡음의 의미 자체에 깃든 이원성은, 이분법에 대한 일괄된 비난에 따라 물어지지조차 않고 있으며, ‘나’라는 어휘 자체가 이기주의적인 뉘앙스나 모나드의 페쇄성으로 비난받는 자아문제로만 전부 환원되는 탓에 그것을 다시 불러 말할 용기도 의욕도 사라져버렸다. 세계화시대라는 일원론적 통합주의의 이데올로기와 이타주의라는 재편된 톨레랑스의 지배 가운데, 우리는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에 따라 우리의 환경을 감수하거나 향유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대통합이나 이타주의라는 명령을 실현하는 자유의 가능성을 계측하는 것이 윤리적 문제가 될 때 우리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내’가 개인이라는 단위로만 측정되며, 세계가 우리의 근처들(surroudings)이 아니라 ‘자연화’된 환경(environment)이 되어버릴 때, ‘돈을 벌라’는 신자유주의적 명령 외에 무엇이 남겠는가. 각인(各人)은 ‘나’를 떠맡는 가운데 깃드는 능동적 수동을 상실한 채, 주어진 것으로 남아 있는 수동적 능동의 영토에서만 윤리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배수아는 이 문제를 가장 치열하게 다루고 있는 사람이다. 배수아 소설에서 인물들의 경계는 이분법적으로가 아니라 이원적으로 전개된다. 배수아는 끊임없이 떠맡아지는 자를 떠맡기 위하여 묻고 찾으며 달리고 걸으며 결국 “비로소 . . . 그것이 나의 얼굴임을” 깨닫게 될 때까지 더듬거리고 서성이고 잘못 도착하며 다시 시작한다. 배수아는 우리 시대 소설가 중 거의 유일하게 능동적 수동의 글쓰기를 하는 자이며 바로 그러한 그녀의 형식이 내용이 되어버릴 때까지 밀어붙이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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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박종성 화가 |
2. 기척과 연상의 쇄도
『북쪽 거실』에서, 수니는 8년간 수용소에 있었기에, 희태에게 ‘어딘가에 있지만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위상으로 존재했었다. 그래서 희태에게 수니는 ‘올빼미’일 수 있었다. 정지의 형상으로 거기에 있는 “육신의 진지함” 그 자체였던 수니는, 어느 날 실종됨으로써 ‘올빼미의 없음’이 된다. 마치 「올빼미의 없음」이, 이제 더 이상 올빼미가 앉을 수 있는 나무가 없기에, 그 나무가 베어져 버렸기에, 더 이상 올빼미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시작되듯이 수니도 이제 더 이상 희태의 세계에 없기에, 수용소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조차 없기에,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영영 만날 수 있을지도 알지 못할’ 없음의 위상으로 주어지게 된다. 사실 「올빼미」에서는, 「올빼미의 없음」이라는 실존적 내몰림이 없었다. 왜냐하면 올빼미는 언제나 창 밖 나무에 있었으며, 있을 것이므로, 그 사실을 단지 알아차리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실을, 올빼미가 언제나 일정한 시간대에 그 나무에 와서 너의 방을 한참 동안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알아차리기가 쉽지는 않은 모습”(71)이다. 하지만 일단 알아차린다면, 올빼미는 내게 발송되었고 내가 수신한 엽서가 우체통 안에 있는 것처럼 거기에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기다리는 것’이면 충분하다. “신발과 겉옷도 벗지 않고 곧장 벽을 향하고 눕는다. 무릎을 가슴 쪽으로 바싹 끌어당기며 몸을 깊이 구부리고 눈을 감는다. . . 친근한 이 기다림의 자세로. . .”(73) 잠든다면, 잠의 세계 속에서 올빼미-같은-것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고백도 해석도 필요치 않다. 그저 꿈꾸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올빼미의 없음」에서 제기되는 것은, 올빼미를 알아차리거나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하는 인지능력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무, 즉 올빼미가 육체의 정적으로 머물고 있는 나무가 더 이상 없다면 이제 올빼미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때야 비로소 올빼미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이미 있는 것’을 다시 돌이켜 이해하는 상태가 아니다. 이제 이해해야 할 것은 “결코 돌이킬 수 없음”, 그 자체란 무엇인지(131)다. 결코 돌이킬 수 없을 때, 기다리는 것은 불충분하다. 이제 ‘나’는 그 상태를 감수하거나 향유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없음이란 도대체 왜 있어야만 하는가”(145). 잠드는 시간을 통해 너를 만나러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의 없음을 향해, “부풀어 오르는 늪처럼 그곳을 향해 느리게 번져가는”, 꿈과 현실이 전혀 구분될 수 없는 그 “나의 시간”이 문제다(127). 희태가 처하는 수니의 실종이라는 사건은, 이 두 작품, 「올빼미」와 「올빼미의 없음」의 2년간의 시간의 간극을 느리게 번지게 하여 한 데 합친 것이나 다름없다. 어딘가에 수니가 있었고, 수니가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희태는 기다렸지만, 수니는 이제 더 이상 없고 수니를 찾을 길도 없다. 이제는 정말로 “결코 돌이킬 수 없음”밖에 없다. 이 ‘잃어버린 수니’, 이 ‘돌이킬 수 없음’은 무슨 뜻인가? 흥미로운 것은 「올빼미의 없음」에서 ‘내’가 떠맡아야 하는 것은 단순히 ‘외르그의 죽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건 너의 죽음이다. 그건 “한 사람의 죽음”이다. 그리고 “한 사람의 죽음이 우리 탓이므로” 나는 “이런 곳을 입는다”(132), 입고 거리를 걷는다, 세계를 쏘다닌다. 한때 한 사람이 죽는다는 것과 네가 죽는다는 것의 의미가 다르던 시절이 있었다. 나‘의’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 그 주변인들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언제나 무거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 죽음이 ‘나’의 존재를 바꾸어 다른 모든 것에서 그를 ‘연상’하기 때문이다. 단지 외르그로 인해 눈물 흘리기 시작했으나 그로 인해 눈물로 적셔진 존재는 세계 전체를 온통 물들이는 것이다, ‘나’는 쉽게 비를 만난다. “한 여자가 나에게 밖에 비가 오느냐고 물었다”(119). 본래 슬픔은 항상 배타적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나를 중심으로 집결되는 경계의 고리를 형성하는 것을 그치고 근처의 모든 것들을 향해 연상되며 퍼져나갈 때 슬픔은 민주적인 것이 된다. 어쩌면 이것이 잃어버림의, 실종의 진짜 의미인지 모른다. 「올빼미의 없음」에서 배수아가 깨닫는 것처럼(배수아는 언제나 소설보다 빠르게 걷거나 소설보다 느리게 걷는 작가가 아니다. 소설이 곧 그녀의 걸음이다), 『북쪽 거실』의 희태도 그가 잃어버린 것은 수니‘가’ 아님을 깨닫는다. 나는 수니가 일반적으로 인간 전체를 의미한다거나 타인 전체를 의미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외르그가 없는 것이 아니며 단지 수니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는 외르그나 수니가 일반적으로나 종적으로 혹은 유사한 속성을 통해 여러 가지를 종합한 형상을 띠게 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상징의 보편성질 때문이 아니다. 「올빼미의 없음」의 나는 “물속에서 물속을 들여다보기 때문”에, “한 사람이 가고 있는데, 나는 그 사람을 볼 수가 없다. 단지 그 사람이 이곳을 지나가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153). 가고 있음이 분명하므로 분명 ‘한 사람’, 혹은 ‘한 사람의 죽음’이 있다. 그러나 그가 외르그, 바로 그 사람인지는, 나와 어떤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처한 인지능력의 토대 때문이다. 내가 나로서 온전하게 된 후에, 내가 그렇게 나일 때 만나는 대상을 판단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나 자신이 나로서 거기에 있는 것인지를 도저히 확신할 수 없다는 문제다. 모든 타자에 대한 태도의 문제는 이미 그것을 타자로서 인식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확고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주체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바로 그 전제가 의문에 부쳐진다. 어쩌면 이미 주체의 차원에서 타자를 하나의 대상으로 정리할 수 없기에 그는 타자가 아니겠는가? 이미 나는 그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다. 단지 그가 지나가고, 그렇게 지나가는 것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 그의 이름도, 그에 대한 판단도, 가능하지 않다. 어느 물고기-존재가 수면에 전달된 흔들림의 기척(棄擲)을 느낀 것이며, 이렇게 시작하는 탓에 그것은 외르그, ‘바로 그’ 사람이 아니라 단지 ‘한 사람’이 된다. 『북쪽 거실』에서 희태는 수니를 찾을 수 없다. 「올빼미」에서처럼 구부린 자세로 기다릴 수도 없고, 「올빼미의 없음」에서처럼 강변에서 맞은편에 일렁이는 너를 따라 꿈-현실을 살 수도 없다. 나무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도 없고 물고기-존재가 될 수도 없다. 수니는 이해할 수 없음으로, 그 돌이킬 수 없음으로 그저 실종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서 놀라운 의미변혁이 일어난다. 「올빼미의 없음」에서 배수아가 보여줬던 것이 단지 한 사람이었다면, 여기서 희태가 수니인 듯 조우하게 되는 세 가지 형상은, 중립적인 의미에서의 한 사람이 아니라 장애인 소인 여인이요, 가난한 여자 순이요, 숨죽여 울고 있는 a여인이다. 그러나 그 장소를 좌표화할 수 있는 수용소나 나무도 없고, 외르그처럼 그가 죽고야 말았다는 확실한 사실도 없다면, 단지 실종되어 버려, 편지를 매개로 없음을 부인할 수도 없고, 애도를 매개로 없음을 완결 지을 수도 없다면 그 사람, 희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모든 곳으로 수니의 실종이 퍼져나가는 것을 깨달으며 모든 곳에서 수니를 연상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타자의 보편성으로 수렴될 수도 없는 그 수니들 가운데 희태는 자문한다. 그 소인여자, 장애인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부끄러워했으나, “만일 그것이 수니였다면! 그러면 나는 무엇을 했어야 하나,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55). 린은 그래서 “이름을 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린은 “이름이 외부에서 온다면 괜찮다”(61)고 여긴다. 린이 나타내는 것은, 일반성-개별성의 쌍을 보편성-고유성의 쌍으로 변혁하는 것인데 배수아는 순이를 통해 그런 것을 넘어 선 ‘없음’과 연상의 ‘쇄도(殺到)’를 말하고 있다. 어느 날 수니를 만나러 온 여자 순이는, “이름을 묻자,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내가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74-75). 아니, 부를 수 없다. 마치 기척만이 있을 뿐 대상은 없는 것과 같이. 그래서 부를 수 없다는 불가능성 가운데 귀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여기에 항상 없지만, 나는 어디에나 있”기(199) 때문이다. 수니라 이름붙일 수 있는 명확한 타자란 없다, 무수한 a여인들로서 수니인, 어디에나 있는, 잘못 도착해 어디론가 가는 중인 그 타자들만이 있을 뿐이다. 순이는 말한다. “오, 나는 쓰레기통이란 글자를 모르고 ‘분리수거’나 ‘지하철’ 혹은 ‘들어가지 마시오’를 읽을 줄 모르죠. 금지, 폐쇄, 차단, 위험, 중단, 고장, 전염병, 전쟁, 발포, 지진, 테러, 폭탄, 히스테리와 우울, 도시에 도사린 그런 위협의 징표들을 나는 읽을 줄 몰라요. 난 그냥 왔고, 그게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유일하고도 고유한 증명 행위에요. 그래서 난 그렇게 해야만 해요. 그것밖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는 것처럼요”(111). 그리하여 “희태는 동요하지 않고 의연하게 그것을 견뎌내는 중이었다. 왜 그러는지, 왜 그래야만 하는지는 누구도 모른다”(113). 이제 우리는 ‘올빼미의 없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외르그가 없거나 수니가 없는 것은 결국 그들의 존재를 다시 꺼내올 수 있는 토대가 될 나무를 다시 세운다거나 벽을 재건한다거나 하는 문제로 수렴될 수 없다. 그 토대조차 없는 곳에서 「올빼미의 없음」은 시작했었다. 그것은 어떤 ‘돌이킬 수 없음’이며, 그 돌이킬 수 없음은 그들 한 사람으로 인하여 쇄도한 낯선 곳에 내린 존재, 가난한 존재인 그 여인들 전부다. 그들을 기척할 수밖에 없음이고, 그들을 연상할 수밖에 없음이다. 기척하게 된 사실을 돌이킬 수 없는 것이고, 연상하게 된 그 끔찍하게 정직한 전염을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이미 타자를 의식/인식하기도 전에 타자는 기척/연상된다. 그래서 배수아에게는 타자‘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 타자‘라는 운명’, 타자‘라는 절대’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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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종성 화가 |
3. 몸이 가르치는 윤리 배수아의 문장은, 외르그를 잃은 ‘나’나 수니를 잃은 희태처럼 언제나 실종자를 찾으며 없음을 떠맡는 가운데 ‘얻은’ 혹은 ‘솟은’ 것들이다. 하지만 그 얻어진 글자들의 나열이나 솟아오른 장면의 섬광들이 나를 확신케 할 수는 없다. 단지 얻었거나 솟았기에 내가 떠맡아야 할 뿐이다.『서울의 낮은 언덕들』에서의 우리 자신도, 훗날 우리들이 찾으러 떠나게 되는 ‘경희’ 자신도 어떠한 없음 가운데 가야만 하는 운명에 처한 여행자다. 어느 날 “이미 수년 간 만나지 못했고 갑작스럽게 헤어진 이후에 어떤 연락조차 없던 자신의 과거 독일어 선생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11) 경희는 깨닫는다. “나는 알았어요, 오, 나는 나로부터 너무 과도하게 가버렸어. 내 육신은 횃불처럼 타오르는 삶의 신호등이지. 그것이 불이 켜진거야. 가시오. 이제 나는 계속해서 갈 수밖에 없어.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답니다.”(21) 배수아는 여기서 없음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나가야만 하는 경희의 “육신의 맹목적인 진지함”(22)을 통해 ‘올빼미’의 의미를 정련한다. 배수아는 ‘나’의 문제를 ‘탈아태(脫我態)’와 ‘기억’ 간의 변증법을 통해 해결하려는 작가들과 달리, 꼼짝없이 그 자리에 있는 ‘몸’을 통해 되돌아보려 한다. 몸이 있다면 나를 모면할 수 없다. 자신의 연대기적 역사를 잃는다고 해도 기억이라는 ‘기능’이 사라졌다고 해도 나는 남아 있다. 몸이 있기 때문이다. 몸이 있는데 어떻게 감히 탈아적인 것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배수아의 문제는 탈아태를 통해 ‘내가-없는-자리’를 실험하는 것 - 어떻게 자아로부터 탈출할 것인가 - 이 아니라 오히려 ‘없음’을 향해 가는 가운데 ‘결코 돌이킬 수 없이 떠맡을 수밖에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것이다. 낭송배우 자체가 그러한 기투를 보여준다. 목소리는 몸 없이 가능한/몸을 대신할 수 있는 물질적 실체인가? 그리하여 몸 없이 목소리만 남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이 ‘목소리라 할지라도’ 몸 없이 할 수 없다. 몸 없이 목소리는 불가능하며 목소리는 반드시 소음을 포함한다. 그래서 목소리는 자기 확인의 매개가 아니라 오염과 전염의 다리다. 배수아의 소설 속 사람들은 낭송배우의 몸을 알면서도 이름을 기억하지는 않는다. 이름을 통해 타자와의 관계에서 대상적으로 촉발한 내가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서명하고 내보이는 등록지로서 몸이 있어야만 하고 바로 그 몸이, 우리를 없음과 관계하게 한다. “몸은 일생동안 피투성이이며 몸은 신기하다. 몸은 몸이 내버린 것들로 뒤범벅된다. 몸은 나에게 속해 있다. 혹은 내가 몸에 속해 있는 것이다. 몸은 열려 있다. . . 몸은 안긴다. . 몸은 아픔을 안다. . . 몸은 배가 부르며, 몸은 운다. 몸에서 뜨끈한 액체가 흘러나오는 것을 피 혹은 오줌이라고 부른다. . . 몸은 기꺼이 잠든다. . . 몸은 꿈을 꾼다.”(93) 꿈과 고통과 열림의 원천인 몸 없이, 목소리만을 내보내는 대상은, 벽과 벽이 맞닿을 듯 좁은 길에서 경희가 만난 두 번째 행인인 악마적 존재일 것이다. “마치 라디오처럼 목소리의 주체와 음원이 멀리 분리되어 있다는 인상”, “육체성이 느껴지지 않는 소리”로 말을 하는 그 자는 “입과 혀를 드러내며 진동”(209)시킨다. 이에 반해 수니, 경희는 몸 없이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몸은 지팡이이자 뱃길 안내인”이다(181). 경희가 방문하는 “자신이 두고 떠나온 집들”(7)은 모두 그녀가 거쳐 갔던 몸의 형상들이다. 천장에 작은 구멍이 있는 굴뚝방, 그것을 통해서만 하늘을 볼 수밖에 없다는 운명이야말로 몸과 나의 관계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몸이 느끼고 슬퍼하며 존재함을 감각하고 기척을 느끼곤 할 때 나는 그것들 중 몇 가지만을 가시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 가운데 눈물이 흐르는 것이다. 치유사의 집 방은 “편지를 받기 위한 베를린의 주소”였다(59). 그곳은 바로 ‘미스터 노바디’를 만난 장소였고, 미스터 노바디란, “세계의 나무”로 나타난다. 올빼미가 다시 와 앉아있을 수 있을지 모르는 나무이며, 치유사의 집 방은 올빼미의 더 이상 없음의 토대를 사유할 수 있는 장소로서, 경희를 꿈꾸게 한다, 노래 부르게 한다. 마리아의 집은 카라코룸이다. 가구 없이 모든 것이 늘어서 있는 곳인 카라코룸, 그 허공의 도시는 없음을 꿈꾸는 있음에 관한 것이다. 몸, 굴뚝방으로서 내가 알지 못하는 것까지도 기척하는 존재였으며, 몸, 아무도 아닌 자(미스터 노바디)와 만나게 하는 것으로서 주소였던 그것이, 단순히 영혼이 들어가 앉아 있는 집(내부표상)이나 외부표상으로서 거울에 비친 나의 완결된 형태(경계윤곽선)가 아니라면, “정말로 이 차원에 존재한다면” “정말로 거기 있는 거라면” 어떨지 물어진다(130-31). 어느 날 경희 또한 실종된다. 『북쪽 거실』의 희태처럼 ‘우리’도 경희로 착각하게 될 사람들을 마주친다. “위태로운 폴 위에 피난처를 구하고 매달린 경희는 조그맣고 멀어서 사실상 어둠에 잠긴 허공에서 거의 형체가 없었다”(267). “우리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낭송극 무대를 여러 번 방문하기도 하며”(268), 서울의 낮은 언덕들을 헤메인다. 흥미롭게도 그녀를 찾으러 하면 할수록 “경희의 멀어짐과 근접함을 동시에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귀를 기울여 자세히 그것을 들으려 하면 할수록 반복되는 그 속삭임의 내용은 우리에게 경희의 없음을 설득하고 있었다. 경희가 중단되었다.” 하지만 그 설득의 의미는 없음을 봉인하는 것이 아니라, “경희가 누군지 모르는 여자와 함께 있고, 그 둘은 절대 구분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곳에서 경희가 발견된다, 연상된다. “경희는 낮은 언덕의 형태로 흘러내렸다”(269). 그리하여 경희를 찾고 있는 우리, 우리는 비로소 몸이라고 하는 부모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실종한 경희를 찾으러 다니는 가운데 비로소 돌이킬 수 없이 몸의 거기에 있음을 알게 된다. 경희 자신이 찾았던, 자신이 방문했던 집들처럼. 마침내 경희인지 아닌지 모를 여자가 ‘정말로 있고’ 그녀가 경희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어, 어둠 속의 여자에게 편지를 그저 건네주고 우리는 불가피하게도 낭송극을 보게 된다. 그 낭송극에서 샤먼의 아내는 떠나간 샤먼을 따라가기 위해 흰 새를 따라간다. 지금까지 실종자를 찾아 걸어오다 몸의 의미를 배우게 되었듯 이번에는 몸을 붙잡기 위해 실종된 ‘그’의 길을 다시 걷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장소인 몸은, 같은 길을 통해 갈 수 없으며 오직 시련일 고통, 고통일 노동, 노동일 대가를 지불해야만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샤먼의 아내는 사지 없이 몸통만이 남은 아바갈의 아내가 되어 아이를 낳고 시련을 겪고 고통을 받으며 노동을 한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흰 새는 “샤먼” 즉 몸을 “부활시킨다.” 그러나 몸이 부활되었을지라도 샤먼의 아내는, 실종자를 찾던 ‘나’는 “다시 그에게 돌아갈 수 없다.” 그 운명, 아니 절대가 있는 것이다. 언덕에 심겨진 루핀의 씨앗은 심은 자를 아랑곳하지 않고 자란다. 몸은 나를 상관치 않고 떠나며 나는 영원히 몸을 재획득할 수 없다. 우리와 함께 낭송극을 보러 온 한 남자는 낭송극 배우가 자신의 어머니임을 주장하지만,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는 대답을 얻는다(305). 우린, “그렇게 무의지적 부모에 의해서 꺾이고 읽히며 마침내는 홀연히 남겨지는 존재”(308)인 것. 몸이라는 무의지적 부모는 그렇게 묵묵히 흰 새를 따라 자기 길을 걷고 우리는 그가 우리의 부모라는 것조차 주장할 수 없다. 몸은, 그처럼 떠맡을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 떠맡을 수 없다는 사실조차 떠맡는다. 그것이 바로 몸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의 낭송극이 우리에게 전하는 바다. 몸이, 타자를 기척하는 일의 책임을 가르친다. 몸이 바로 돌이킬 수 없음이다. 몸이 바로 영원히 실종되는 자이다. 몸이 바로 우리가 계속해서 찾고 있는 자이다. ‘우리는 그것을 너를 찾는 도중에 알았다.’ 기척이란 몸의 섬모(纖毛)였으며 연상이란 몸의 예감이었다. 너를 돌이킬 수 없이 지각한다는 일은 몸이 탄생시킨 ‘나’의 사건이었으나 그 무의지적 부모는 육신의 가운데 켜켜이, 우리가 결코 의식할 수 없는 것을 없음의 형태로 매장하고, 우리는 그 없음을 만나기 위해 기꺼이 수고하지만, ‘나’는 그것을 일체화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떠맡으러 나선다. 4. 떠맡을 수 없는 것을 떠맡는 애씀 우리가 떠맡을 수밖에 없는 것을 향해 가는 길에, 우리는 그것은 떠맡을 수 없는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타자의 기척을 떠맡을 수밖에 없으나 사실은 영원히 그를 떠맡을 수 없을 것이다. 배수아의 소설은, 실종된 타자를 찾으러 갈 수밖에 없지만 영원히 그를 찾지 못한다. 하지만 몸을 떠맡을 수 없기에 몸을 떠맡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떠맡으려 한다. 우리는 몸을 통해 윤리를 배우는 것이다. 이미 몸이 없음으로서 있으므로 계속해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타자에 대한 태도를 고려하기 훨씬 이전에 몸은 타자 가운데 자리해 있었다.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의 아야미는 몸의 형상을 통해 타인들과 중첩된다. 아야미는 시각 장애인 소녀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식당’의 안내자 소녀이기도 하며 노부부의 한 명이기도 하며, 시인여자이기도 하다. 아야미는 눈 먼 소녀의 배역을 연기하고, 무명한복을 입고, 꿈속에서는 ‘북쪽 사막에서 술 파는 마리아’이며, 여니이기도 한데, 그렇게 어디엔가 있는 김철썩 시인의 사진 속 여자다. 몸의 형상을 묘사하는 문장이 반복된다. “바람 한 점 없는 대기 속에서 여자의 치마가 낡은 행주처럼 펄럭거렸다. 힘줄이 불거진 앙상한 맨다리와 초라하게 작은 발, 새것으로 번쩍거리지만 이상하게 싸구려처럼 보이는 구두가 드러났다.”(22) “그녀는 아무 장식 없이 거칠게 풀 먹인 흰 무명 한복 차림이었다. 숱 많고 검은 머리칼은 등 뒤에서 하나로 묶었고, 치맛자락 아래 드러난 맨발은 삼베천을 거칠게 꼬아 만든 샌들을 신고 있었다.”(27) 아야미와 ‘함께 해고당하는’ 극장장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노부부의 한 명이며, 유리벽 뒤 혹은 유리벽 앞의 남자이며, 늙은 시인들의 한 명이며, 부하이며, 동네 약사이며, 자신을 “거부하는 듯한 이 세계에서 존재의 자리를 찾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밤이나 낮이나 일을”(192) 했으며 어느 날엔 “터무니없이 큰 모자를 쓰고” 흰 버스를 운전해야 했던 기사였던(193), 그렇게 어디엔가 있는 김철썩 시인의 사진 속 남자다. 소설 가운데 그들이 말하는 것들 즉 목소리와, 그들의 몸의 형상들을 통한 연상-의-연상의 거듭을 통해 아야미와 극장장은 타인들로 ‘된다.’ 이것은 단지 의식과 무의식의 중첩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상담의 현장이나 하다못해 대화의 현장을 기원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의식의 차원보다 낮은 곳에서, 이미 그러한 현장이 발생하기보다 더 기원적인 때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따라서 배수아의 소설은 꿈의 문법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에게서 발견하는 가까운 자의 표식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것에서 낯설지 않은 것을 발견한다 - 우리는 영원히 연루되어 있는 것이다. 몸에서 출발한 것이 여기까지 왔다. 그 형상 속에서, 떠맡을 수 없는 것을 떠맡아야 하는 불가능 속에서 아야미는 기우뚱거리며 울먹인다.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줘요”(185). 어쩌면 우리가 ‘내’가 되기 위해 이미 떠맡았으며 나중에서야 그것을 도저히 떠맡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죄의식 가운데 극장장은 구토하며 운다.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줘요.”(198) 이 다른 세계란 무엇인가? 배수아는 그것을 해명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으며, 그녀가 이 소설에서 그것을 해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이 주제를 오랫동안 고민해왔다는 것을 방증한다. 독일어 선생, 여니가 말한다. 다른 세계는, “세 개의 동굴”이며(108) 그 “세 개의 동굴은 나에게 속한 육신의 세 개의 구멍”이며 “세 개의 거울”이다. 여니는 계속해서 말한다. “육체가 교통하는 요소들이 없다면 우리는 그 어떤 다른 통로를 통해서도 지금 내가 당신을 아는 것처럼, 그리고 당신이 나를 아는 것처럼 존재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동일자아적인 것을 반사하는 거울이 아니라 육체의 연상하는 쇄도를 통해 “열락의 거울상”이 등장한다. 이 거울상은 두 가지 의미를 교호(交互)시킨다. 육체가 가르친 타자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떠맡음과, 타자의 없음을 있음으로서 떠맡는 여정이 가르친 육체가, 거울상을 통해 어울린다. 그리하여 사랑이 된다. “사랑은 알려지지 않은 동굴을 찾아 헤매는 행위”다(111). 그렇게 다른 세계로의 희망은,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시작이 시작된다. 배수아의 소설 세계 가운데 나타난 몸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몸을 맡아둔 채, 태어났다. 어쩌면 우리는 몸을 가지고 태어났다고도 말할 수 있으며 그렇게 말해오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몸은 단순히 우리에게 영토적 공간이나 외재적 표상으로서 귀속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것을 타자의 없음과 그 슬픔의 개인적 경험이 민주적으로 온통 전염되어 가는 가운데 알게 된다. 나도 모르게 타자의 흔적들을 느끼고 있으며, 타자의 형상들을 연상하기를 그칠 수 없다는 사실 가운데 몸이 결코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다.’ 이제 몸을 가지지 않겠다고, 탈아가 되겠다고 선언할 수 없다. 몸이 미리 타자의 존재를 애써 짐작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가운데 몸은 ‘타자라는 윤리’를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의 의미다. 몸이 이미 맡겨져 있었지만 우리가 그것을 맡을 수 없는 것으로 깨달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맡는 것과 같이, 우리가 이미 타자 가운데 처(處)해 있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무한한 깊이 가운데 고개 숙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에게 응답하려 하며 타자적인 것을 떠맡으려 한다. 없음의 이름으로, 돌이킬 수 없음의 이름으로, 그 없음의 절대적 있음으로 그렇게 한다. 그것이 “그토록 섬뜩한 대입”(57)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렇게 한다. 그것이 떠맡음의 절대적 운명이다. 그리고 이렇게, 떠맡을 수 없는 것을 떠맡는 ‘애씀’, 그 무한한 노력의 수고 자체를 통해서만 우리는 서로를 “다른 세계로 데려가 줄” 수 있다. 사실 그와 같은 희망이, 그처럼 떠맡을 수 없는 것을 떠맡고자 하는 시도가, 그 동안 우리에게 공동체의 가능성을 조형하게 하는 시작으로서의 속죄(at-one-ment)이며 서로에게 다시 인사하는 것으로서의 후회(re-gre(e)t)가 아니었을까. 그것은 다시 시작하겠다는 시작의 징표다. 그것은 법인격의 영토, 혹은 우리에게 대통합과 톨레랑스의 명령이라는 환경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그 모든 거짓 자유의 공간을 훨씬 넘어선, 진정으로 함께 살아감 가운데 사려(思慮)하는 윤리의 의미일 것이다. 배수아의 소설 세계 가운데 현상한 몸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몸이야말로 타자라는 윤리의 ‘없는 토대’임을 배웠다. 몸을 모면할 수 없는 것이 나라는 생명의 참 의미이듯 타자를 모면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참 의미가 아닐까. 그러므로 ‘나’라는 단위에서 시작하거나 ‘개인’에서 시작하거나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탈아에서 끝내려 하는 대신 ‘내’가 ‘나’조차 떠맡아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고 깨닫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만 ‘타인’이라는 단위로서의 타자나 ‘인간’이라는 대상형상으로서의 타자에 ‘대해’ 윤리를 대입한다는 식의 논리를 끝낼 수 있다. 이미 우리가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몸-윤리-타인은 있었다. 그 세 개의 “육신-거울-동굴”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안내자요 지팡이였다. 필자, 아니, 나도 그것을 배수아의 소설들로부터 배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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