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시, 또 대뇌(大腦)와 성기(性器) 사이 그리고 ‘기차’에 대한 질문들을 제기하다.
우리는 무의미, 절망, 소외, 우울 등이 넘쳐나는 허무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니힐리즘의 범람 속에서 모든 것들이 각기 저마다의 의미를 잃고 허공에 부유한다. 탈주를 유도할 구속이나 속박도 없는 ‘범람의 피로’ 속에서는 오히려 소박함의 미덕이 빛을 발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탈주와 안주의 간극을 저울질하면서, 우리는 탈주와 동시에 나를 잡아줄 희미한 온기를 꿈꾼다. 그것이 니힐리즘을 견디며 삶을 지탱시킬 수 있는 생존전략이다. 그 생존전략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짧지만 완전한 관계를 만들 수 있고 그 관계를 권태로 퇴색시키지 않을 수 있다. 문학이 살아남기 위한 전략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생존전략을 소설이라는 장르에 현명하게 잘 활용한 이가 바로 조해진이다. 그녀의 소설에 나타난 타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자기희생은 일종의 성스러움을 창출하고 그 성스러움은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는 토포스를 형성한다. 그러나 그녀는 타인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카메라 셔터가 눌러지는 순간만큼, 섬광의 찰나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순간의 토포스를 포착하기 위해 소설가 조해진은 혼돈과 경악의 대상 속으로 빠져든다. 성스러움의 선물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성스러운 혼돈 속에 내맡겨야 한다는 명제를 누구보다 명확히 알고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작가다.
『로기완을 만났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다.” ‘L’이라는 모호함이 ‘로기완’이라는 정체성을 획득하기까지의 여정은 독자가 ‘로기완’이라는 이름을 불러줄 수 있을 때까지의 사연들을 채워가는 것으로 진행된다. 탈북자 로기완은 사랑의 연대를 위해 벨기에에서의 난민인정 지위라는 안정적 신분을 포기함으로써, 자기희생을 통해 다시 표류하는 경계인으로 남는다. 공동체의 문화를 창작하는 자들은 폴리스의 경계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타자들과 그녀는 ‘아폴리스’라는 점에서 동질적이다. 작가는 자발적으로 로기완의 방랑에 동참하여, 이니셜뿐인 그의 고달픈 혼돈에 대한 피로를 ‘로기완’이라는 이름으로나마 완화시켜 주고자 한다. 이 때문에 그녀 특유의 조용하지만 섬세하고 치밀한 추적을 멈추지 않는다.
이른바 1980년대, 90년대 소설들이 그 이전 소설들의 ‘우리’에 대한 편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에 대한 편향을 방편으로 존재해왔는데, 현재 조해진의 소설은 ‘우리’와 ‘나’ 사이의 공간에 새로운 ‘공동의 자리’를 잡는 2000년대 소설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타자와의 소통을 강조했던 또 다른 소설가인 ‘김연수’식으로 하자면 대뇌(大腦)와 성기(性器) 사이 어디쯤일 것이지만, 굳이 이 기준에서 거칠게 나타내자면 김연수보다는 좀 더 성기(性器) 쪽으로 치우친 자리일 것이다. ‘조해진’ 소설에는 이방인들의 불안을 이해하는 비교적 선량한 다양한 주체들이 등장하는데, 이 주체들은 ‘이해한다.’라는 말의 무력함까지도 경험한 이들로서 김연수의 주체들보다 경험적으로 ‘이후’의 주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연수 소설에서 느껴지는 주체들의 윤리성보다는 희석된 윤리성이 엿보인다. 이는 덜 윤리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아마 좀 더 감각적인 윤리성이라는 말이 타당할 것이다. ‘타자를 온전히 이해한다.’라는 말 자체가 일종의 자기 동일성을 확인받기 위한 것뿐이라는, 그 말을 쉽게 내뱉는 것은 일종의 제스처에 불과한 가짜 연민이 될 뿐이라는 사실을 조해진 소설 속의 주체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발화하기 전에 머뭇거린다. 그리고 그 머뭇거림은 발화가 아니라 가만히 있는 소극적인 행위로 드러난다. 그리하여 소설 속 다음과 같은 문장들은 적극적 행위와 발화와는 다른 윤리적 진정성을 획득한다. “거인들이 울 땐, 그저 가만히 서서 그들의 슬픔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려주어야 한다. 이것이 이보나가 내게 가르쳐 준 세상에 대한 예의라고”(「이보나와 춤을 추었다」)
이렇듯 ‘사이’에서 서성거리며 머뭇거리는 조해진의 소설 속 주체들은 그들이 아직도 ‘기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발화한다. 1937년 연해주로 떠나간 화물열차에 몸을 실었던 할머니를 둔 나타샤(「인터뷰」), 어린 시절을 게토에 살면서 기차가 와서 사람들을 실어가곤 했던 장면을 기억하는 반은 유대인인 미하우(「이보나와 춤을 추었다」), 꿈속에서 화물열차를 보곤 하는 당신(「영원의 달리기」), 여상을 졸업하고 직장을 옮길 때마다 오른 월급을 보며 탑승한 기차에서 한 칸씩 옮겨가는 느낌이 들었다는 연주(『여름을 지나가다』). 소설 속 주체들의 기억을 통해서 기차는 무의식적으로 소설 속 현실을 뚫고 나온다. 이 기차 환상은 조해진 소설의 기저에 있는 결핍이자 고통, 세계에 대한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소설을 추동하는 소설적 장치이자 무의식인 기차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왜 기차인가? 목적지도 알 수 없이 기차에 실린 채 어디론가 가고 있다면 그 ‘방향 없음’을 견딜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 과연 기차에서 내릴 수는 있는가?
소설 속 타자들이 기차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자신들이 처한 폐허적 상황을 인식하기 시작했을 때, 즉, 낭시(Nancy)**가 말한 ‘균열에 의한 갈라진 세계를 사유’하기 시작했을 때 그 균열로부터 세계의 어렴풋이 떠오르는 의미가 구축되면서 ‘함께-있음’ 자체가 긍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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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러니까, 나는, 우리는, 아직도 화물열차 안에 있다.
먼저 기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대놓고 말하는 이, 나타샤(「인터뷰」)가 있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타샤라는 29살의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여자를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녀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투르게네프로 학위논문을 받은 후 타슈켄트의 유명 사립 고등학교에서 문학 교사를 한 인텔리다. 그럼에도 현재는 경제적 파산에 처한 한국인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불쌍한 여자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주민 1세대의 삶을 산 할머니가 탄 기차 칸보다는 한 칸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해 한국말을 쓰지 않았다. 우즈베키스탄 말을 하고 그들의 음식을 먹고 그들의 사고와 행동양식을 따라하면 그들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현재의 나타샤는 아버지가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가 한국 남자와 결혼했다 해서 한국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듯, 애초부터 그 어떤 사회적 정체성을 획득할 수 없는 경계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할머니가 올라탔던 1937년의 연해주로 향하는 화물열차는 아직도 달리고 있는 중이다. 아버지도 그녀도 아직 내리지 못했다. 가방 하나를 품은 채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한 채 열차 안에서 보이는 ‘서울’이라는 풍경만 바라보고 있다. 그 풍경은 아름답고 화려하며 파노라마적으로 그녀 앞에 펼쳐지지만 그녀는 그 풍경에 닿거나 잡을 수 없다. 그녀는 차창 밖의 풍경과 어떤 긴밀하고 충족되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는 애초에 기차가 가진 속도감과 파노라마적 풍경이라는 근대적 산물의 상징이기도 하다.
「인터뷰」의 기차가 나타샤의 발화를 통해 상징으로만 언급되는 존재라면 「이보나와 춤을 추다」에서는 그 형상이 구체화된다. 나는 ‘지원’이기도 하지만 ‘이보나’이기도 하다. 폴란드 외국인 친구, 미하우, 요안나에게는 ‘지원’이라는 글자가 ‘이보나’로 발음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외국인 친구들의 호명이 아니더라도 ‘이보나’는 나의 또 다른 타자다. 나의 대학 시절, 고독한 자취방 느릅나무 책상에서 태어났다. 나이 육십이 넘도록 자신의 입 하나 책임지지 못한 시인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그놈들’이라는 타자를 지니고 있었다. 나의 ‘이보나’와 아버지의 ‘그놈들’은 존재 양상은 동일하지만 동질적이지는 않다. 아버지의 ‘그놈들’은 아버지를 병들게 했지만 ‘이보나’는 나를 위로해주는 타자이기 때문이다. 이보나와 나는 함께 아우슈비츠 열차라 짐작되는 기차를 탄다.
마침 기차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물도, 식량도 없는 비참한 기차라고 누군가 악을 쓰며 알려주었지만 나는 주저 없이 그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 안은 비좁았고 탑승객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둡고 슬퍼 보였다. 그곳에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도망치듯 기차에서 내렸을 때,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이보나는 현실과 상상의 접점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때 이보나는 웃고는 있었지만 눈가에 흘러내리는 검은색 눈물을 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이보나와 춤을 추었다」 101쪽)
이 아우슈비츠 열차를 상기시키는 기차에서 나와 이보나는 잠깐 동안 함께 할 뿐이다. 나는 곧 내린다. 현실적 주체인 ‘나’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나의 타자이자 예술적 주체인 ‘이보나’는 같은 세계에서는 살 수 없다. ‘이보나’는 작가 조해진에게 있어서 소설의 기원적 주체가 되며 ‘기차’는 벤야민의 요청을 재정의한 아감벤의 ‘요청’적 개념(정홍수, 「느릅나무 책상에서 태어나다」, 『목요일에 만나요』 해설, 문학동네, 262-263쪽 재인용)이 된다. 단 한 사람도 회상하지 않더라도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그 어떤 것. 망각된 것을 불러온다기보다는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남게 되는 것. 그럼에도 조해진의 ‘기차’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요청’인 아우슈비츠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실재적인 부분이 존재한다.
공무원이 되고 나서 5년 뒤, 회식 후 돌아오는 밤길에 나는 다시 기차를 탄 ‘이보나’와 5년 만에 마주한다. 지난 5년 동안 한 번도 기차에서 내린 적이 없는 ‘이보나’는 여전히 괴로움과 고통으로 수척해진 얼굴로 나를 만난다. 유리창을 통해 손을 잡고 잠깐 춤을 추지만 나는 기차에 타지 않는다. 나는 목적지 없이 기차에 탄 ‘이보나’와 ‘나타샤’와는 다른 현실적 공간을 선택한다. ‘기차’에서 내리면 나는 어디로 갈지 알 수 있을까. 기차에서 내렸지만 여전히 가야 할 방향성 따위는 없었다. 다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또 다른 게임이 시작되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깨닫고 있을 뿐. 또 다른 게임이 시작된 곳, 고려인도 아니며 나의 타자인 예술적 주체 ‘이보나’가 아닌 현실적 주체의 공간은 어떠할까. ‘기차’에서 온전히 내려 중심 있는 현실을 영위하고 있을까?
여기 쇼핑센터 옥상 놀이공원에서 일하는 ‘이연주’(『여름을 지나가다』)라는 여자가 있다. 그녀는 서울에 온 지 3년째다. 그녀는 신장병과 당뇨라는 지병을 지닌 엄마를 떠나고 싶었다. 언제부터인가 퇴근 후 멍하니 기차 대합실에 앉아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고 정처 없이 먼 도시로 떠나고 싶다는 삶의 충동을 감당할 수 없었다. 고향을 떠나온 그녀가 현재 사는 곳은 기차가 지나가는 곳이다. 사과가 특산물이고 한 시절을 풍미한 중견 가수가 태어난 곳이었던 고향에서 살았던 곳 역시 기차역 근처였다. 그녀는 고향을 떠나왔음에도 기차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소도시의 여상 졸업이 학벌의 전부인 그녀가 머물 수 있는 일터는 잡화점의 카운터와 지역 박물관의 티켓박스, 영어 학원의 접수처였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서울에 왔지만 고향에서 그랬듯, 여기서도 그녀는 기차 소리에 눈을 뜨고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드는 하루하루로 일상을 영위한다. 직장을 옮길 때마다 월급이 조금씩 오르는 재미를, 탑승한 기차 안에서 한칸 한칸 앞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죽도록 일을 해도 배정된 좌석도 없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기차 안을 헤매고 다녀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 일은 현실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기차에 실린 사람은 그 속도감 때문에 바깥과 공간적으로 분리된다. 그리하여 주체가 기차를 능동적으로 탔다 하더라도, 타는 순간 주체는 배송되는 존재가 된다. 주체는 그 ‘기차’라는 시스템의 인력에 의해, 방향성 없이 실려 가게 된다. 고향상실, 모체와의 분리, 방향성 없는 긴 여정, 어딘가로 실려 가는 느낌, 충동적인 욕망, 달리는 내내 덜컹거리는 바퀴소리. ‘기차’는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는 문학소(文學素)이자 근대성에 대한 탁월한 상징이 된다. 출현하자마자 근대의 아이콘이 된 기차는 그 출현시점과 상관없이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과 ‘갈 곳 없음’을 여실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인간 존재의 결핍은 인류의 탄생 이후 계속되어 온 화제였을 것이니 말이다. 기차는 근대성의 상징을 차치하고서라도, 인간 존재의 근본적 결핍과 불안 의식의 기표가 됨으로써, 조해진의 소설을 추동한다.
3. ‘기차’에서 본 파노라마적 풍경을 기억하다.
조해진의 소설에는 ‘디아스포라적 주체’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일차적으로 ‘기차’는 여전히 흩어져서 경계인으로 살고 있는 타자적 주체들의 불안과 슬픔을 육체화하며 형상화된 매개체다. 조해진 소설에서 경계인은 단순히 흩어져 살고 있는 민족의 개념을 넘어서 주체 자체가 방향성 없이 흩어진 삶을 수용하는, 그렇기에 ‘결핍의 함께함’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결핍의 함께함’을 소설적으로 형상화하기는 난감한 일이지만 조해진은 모호하고 순간적인 감각을 활용해 그 추상성에 구체성을 부여한다.
「빛의 호위」에서 주인공 ‘나’가 이십여 년 전 만났던 ‘권은’을 기억해내는 순간이 그러하다. 이십여 년 전에 분명 아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암순응이 되지 않는 두 눈”으로 원래의 시각으로 회복되는 과정처럼 “먼 곳에서 한 조각씩 내 감각 속으로 흘러들어” 온다.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작고 추운 방에서 홀로 ‘결핍과 함께하는 자’로서 존재했던 열세 살의 ‘권은’에 대한 기억을 매우 섬세하고 정밀한 방식으로 감각화한다. 마치 잊었던 음악이 흘러들어오듯, 그렇게 조금씩 결핍된 부분들이 모이며 무의지적으로 재구성된다. ‘권은’의 어두운 방 안에서 제일 먼저 보였던 ‘스노 볼’은 이십 년 후 흩어진 눈발을 보고 난 한참 후에야 재구성되고 ‘권은’의 집을 나오면서 보았던 주황빛의 허름한 골목길은 눈 쌓인 운동장에 띄엄띄엄 흩어진 발자국처럼 천천히 ‘나’의 기억에 들어온다. ‘결핍의 흩어짐’은 이렇듯 조금씩 흘러들어오는 것이기에 그것은 예전 그대로의 완벽한 복원이란 있을 수 없다. 이는 마치 ‘기차’에서 본 풍경을 기억해내는 장면과도 유사하다. 「PASSWARD」에서 스스로 자기 머리를 때리는 옆집의 다운증후군 소년을 봤을 때 나에게 무의지적으로 들어온 기억은 내가 막아낼 수 없이 막무가내로 그렇게 흘러들어 온다.
내 앞의 광포한 시간은 이미 뒤를 향해 정신없이 전력 질주를 하고 있었고, 머릿속의 서랍 하나가 열리면서 튕겨 나온 수많은 이미지 파일들은 마술사의 카드들처럼 어지럽게 섞이고 있었다. 기억의 회로가 닿는 곳이 그날들임을 감지한 내 마음속의 내가 또다시 두 손으로 머리통을 감싼 채 목 놓아 울부짖었지만 막무가내로 비집고 들어오려는 그 기억들을 내 힘으로는 막아낼 수 없었다.(「PASSWARD」 18쪽)
이처럼 조해진의 소설은 ‘소재적’, 혹은 ‘의미적’으로 ‘기차’를 활용할 뿐 아니라 기억이 구성되는 그 ‘찰나’의 추상성을 기차에 탄 사람들이 밖으로 본 풍경을 재생하는 과정처럼 구체화한다. 실제로 인간의 신경세포들은 미묘하게 ‘철로망’을 닮았으며 신경체계에 흘러든 기억은 마치 선로 위의 기차처럼 뉴런 사이를 움직인다. 소설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감각들은 기차에서 바라보는 풍경처럼 어느 순간 희미한 파노라마식으로 몰려온다.
프로이트는 자유연상이 기차 차창을 통해 우리에게 보이는 파노라마 같은 풍경을 따라가는 것과 같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이는 바꾸어 말하면 정신분석 과정은 기차를 타는 것과 같은 경험임을 뜻(김종엽, 「프로이트와 기차」, 『창작과 비평』 28(4), 2000.12, p.329)한다. 그것은 소설 속 주체들이 경험했지만 자의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생소하게 만들어버린 수면에 잠긴 기억을 집결하는 과정이며, 그리고 무심히 바라보는 풍경 속에서 잃어버렸던 본래적 자아를 다시 재구조화하는 기회를 만나는 일이다.
과거의 어느 날 들었던 음악이 우연히 어디선가 흘러들어올 때처럼, 기차에 탄 풍경을 다시 떠올릴 때처럼 그저 ‘결핍의 흩어짐’을 모으는 일은 그렇게 불완전하게 드문드문 흘러오는 감각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사 감각의 연대로 모은 기억이 온전한 형태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은 어떤 완전체를 제대로 복원하지 못하는 감각의 한계라기보다는 애초에 인간 자체가 흩어진 채 존재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각각 결핍의 입자로서 불완전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공감은 “셔터를 누를 때 카메라 안에서 휙 지나가는 빛”이나 “장이 작곡한 그 악보들이 유대인 학살을 피해 식료품점 지하 창고에서 날마다 죽음을 생각하던 누군가에게 내일을 향할 수 있었던 빛”이 되는 지점에서만 겹쳐질 수 있다. 이러한 감각을 통한 공감은 의식을 통해 진실을 발화하는 것보다 더 많은 공감과 위로를 파생시키고 나아가 감각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기차’라는 시스템에 실린 채 표류하는 소설적 주체들이 현실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된다.
4. 무위의 공동체를 형성하다. 이제 그 공동체에 대해 본격적으로 얘기해 보자. 원래 빛이라는 존재가 수많은 입자들로 어떤 끈끈함 없이 모여 있는 것으로만 그 자신을 드러내듯, 조해진 소설 속 ‘흩어진 주체’들도 결핍이라는 입자로 구성되어 연약한 연대만이 가능하다. 그럼으로써 낭시가 말한 공동의 영혼(영혼의 공산주의), 소통의 단일한 중심점으로부터 소통의 복수적 분산점들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조명(박준상, 『무위의 공동체』, 인간사랑, 2010, p.260)한다.
「그 후로 일주일」은 에이즈 판정을 받은 이후, 34세 회사원 여자의 일주일을 소재로 한다. 그녀는 4년 전 독일로 해외여행을 간 경험이 있다. 난방이 되지 않던 호텔에서 추위에 떨던 그녀는 “편하지 않은 세상만을 디디며 걸어온 사람만이 풍길 수 있는 비릿한 바람 냄새가 나는” 외국인 남자와 즉흥적으로 성관계를 하고 에이즈에 감염된다. 물론 그녀의 불행은 아버지와 할아버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차곡차곡 논리정연하게 언술된다. 그녀가 독일에서 공중 화장실에서 쪼그려 앉아있을 법한 남자와 관계를 나누는 것은 “어딘가 치명적으로 아픈 사람들이 어디서든 그렇게 서로를 쉽게 알아보고 위로를 해준다는 사실”(「PASSWARD」)과 상통한다. 그녀는 그 한 번의 돌발행동으로 인하여 현재 그녀가 가진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이 모두 사라질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그때의 돌발 행위를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당당히 그 당시의 그녀 인생으로 들어와 한 달, 아니 일주일이라도 살아 본 사람이 있다면 그녀의 선택을 이해해 줄 거라 확신한다.
낯선 이와의 결합은 그녀의 가족사적인 불행이라는 본질적 원인이 작용했을 거라 흔히들 추측하겠지만, 어쩌면 난방이 되지 않던 호텔방에서 느꼈던 ‘추위’라는, 아주 사소하고 단순한 감각적 원인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더군다나 외국여행에서 남자와 하룻밤 정사 때문에 에이즈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그녀의 회사에 방문한 S 카드사 영업 사원에게 털어놓는다. 독일에서 하룻밤 정사를 나눴던 외국인 남자와 에이즈 감염 사실을 고백한 S사원의 공통점은 그들이 순간이나마 그녀의 고통을 지켜보고 공유해 줄 수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그들은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오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인간들 곁에 머물며 그들의 좌절과 희열과 눈물과 웃음을 지켜보고 공유했던 과묵한 천사들이 되는 것이다.
낭시는 관념들의 영역인 의식의 공간에서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어떤 사건이나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사건과 상황 자체에 실존적으로 집중하기보다는 그 사건·상황에 선재하고 그것을 남김없이 포섭하고 장악할 수 있는 이론이나 관념이 있다는 편견은 맹목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관념과 사건·상황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 그녀가 걸인과 같은 외국인과 섹스를 하고 우연히 들렀던 회사에서 쫓겨난 카드 영업 사원에게 그녀의 인생 스토리를 털어놓은 사건·상황은 이성적인 이론이나 관념으로는 온전히 충족되게 설명할 수 없다. 이 돌발적인 사건·상황에서는 모든 사고를 멈추어야만 한다. 이는 어떤 관념(그녀가 그런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정신분석학적 혹은 불행한 가족사 등을 근거로 설명하려 하는 행위)을 부정하자는 말이 아니다. 관념과 이 돌발적 사건·상황 사이의 거리를 건너기 위해서는 그것들과는 다른 차원인 실존의 차원에서 그녀의 돌발행위 그냥 그 자체에, 있는 그대로 우리 자신을 엄밀하게 위치시켜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 엄밀한 위치에 우리를 둘 때 진정한 공감이 발생하며 그 순간에 그녀가 위로를 받았던 외국인 남자와 카드 영업 사원과 함께 우리는 낭시가 제시한 무위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조해진 소설 속 주체들과 함께 무위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게 해주는 타자들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PASSWARD」의 M과 신장 수술을 하던 날 우연히 만난 휠체어를 탄 소년, 그리고 옆집의 다운증후군 소년, 「목요일에 만나요」의 나무, 「이보나와 춤을 추었다」의 이보나, 「영원의 달리기」의 나, 「등 뒤에」의 죽은 두 동생들, 「기념사진」의 여자와 남자, 「여자에게 길을 묻다」의 거인증에 걸린 여자는 모두 과묵한 천사의 역할을 해주는 타자들이다.
「영원의 달리기」와 「등 뒤에」서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타자들로서 ‘죽은 자’들이 등장한다. 특히 「영원의 달리기」에서 소설을 진행하는 타자는 아마도 J라는 남자의 옛 애인으로 추측되는데, 그녀는 주인공 남자를 비롯해, 끊임없이 다른 타자의 꿈속에 들어가려 애쓴다. 그녀는 “다리를 제외하곤 정형화된 육체조차 없다.”그럼에도 “발가락이 시려, 속삭이면 발가락이 생기고 온몸이 타들어가는 것 같아, 생각하면 그제야 화상 입은 살갗이 만져지는 식이다. 어쩌면 없을지도 모르는 육체를 뒤집어쓰고 나는 달리고 또 달린다.” 소설 속 그녀의 발언은 나의 존재는 사유(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라 먼저 언어의 표명(‘나는 존재한다.’라는 발언)에 의존(마르틴 하이데거, 『시간의 개념』, 서동은 옮김, 서울: 누멘, 2005, p.16)한다는 점에서 이미 ‘우리’를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라는 존재는 대자적인 자기 사유만으로는 불가능하고 타인과 마주해서 타인에게로 나아가면서만 가능한데, 이는 존재하는 자가 말하면서 또는 쓰면서, 다시 말해 언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 존재를 알리기 때문이다. 낭시는 이미 데카르트의 에고 숨을 사유의 차원이 아니라 언어의 차원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인간이 언어를 사용해서 말하고 쓰는 자인 이상 대자 또는 순수한 자기 관계는 있을 수 없고 대자에 이미 대타가 겹쳐져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형체가 없는 존재에게 언어를 통해 형체를 부여해주는 작업이 곧 조해진의 소설적 역할이자 문학이라는 점에서, 이미 그녀의 소설 쓰기 자체가 ‘무위의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 가구점, 타인의 방을 경유하다 -기차에서 내릴 수 있는가. 다시 ‘기차’ 이야기를 해야겠다. ≪설국열차≫의 기차는 기차 칸칸마다 철저하게 구별되어 있는 계급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생존방식을 보여준다. 영화는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 고안된 ‘기차’라는 시스템이 나중에는 주객이 전도되어 그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폐쇄적 사회체제를 고수하게 되는 악순환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편, 일본이라는 타자에 의해 근대화를 이룩한 한국사회는 ‘기차’를 근대적 운송체제라는 중립적 교통체제로만 인식할 수 없는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다. 경부선과 경의선은 애초부터 조선을 병참기지로 활용하고 식민지로 수탈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고 자국민은 전쟁터의 위안부로, 노동자로, 군인으로 기차를 통해 타국으로 실려 갔다. 비단 한국사회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던 많은 유대인들의 수송수단 역시 기차였다. ‘기차’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슬픈 타자들의 이야기와 그 이면에 잠긴 비극적 무의식들이 끊임없이 끌려나온다.
조해진 소설은 ‘기차’가 지닌 사회적, 역사적, 문학적 다양한 의미 층위를 소설 전반에 걸쳐 적절하게 활용했다. 특히 소설적 주체들이 기차에 탔을 때 유리창을 통해 본 파노라마적 풍경을 기억으로 끌어오는 과정을 감각적으로 구체화한다. 그리고 그 기억의 감각적 연대를 통해 타자와 함께 하는 무위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기차는 주체들의 실존을 방향성 없이 실려 가게 만드는 거대 기계이자 부정적이고 폐쇄적인 시스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자체가 인간 존재 자체의 불안함과 방향성 없음을 상징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물을 수 있다. 소설 속 주체들은, 우리는 기차에서 내릴 수 있는가. 기차가 지닌 이중적 의미에서 전자라면 내리는 게 맞을 수도 있다. 영화 ≪설국열차≫의 결론처럼 ‘기차’라는 시스템 자체를 파괴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면 해결된다. 만약 후자라면? 인간 존재 자체가 원래 가야 할 방향 따위는 없는, 현실에 존재하는 폐쇄적 거대 시스템이나 테크놀로지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지향해야 할 곳 따위는 없는 것이라면 어찌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조해진의 해결책은 우선 전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내릴 수 없으니 기차에 실린 채 방향 없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그대로 인정하라는 무책임한 충고를 권하지도 않는다. 존재 불안의 두려움은 이미 타자와의 무위의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희석될 수 있는 전조가 보인다. 그리고 그 공동체가 소설 속 현실에서 이상적 공간으로 형상화된 곳이 ‘가구점’과 ‘타인의 방’이다.
경제적 파산으로 집을 나간 나타샤(「인터뷰」)의 남편은 가구점을 운영했다. 남편이 없는 가구점에서 나타샤는 홀로 가구점을 지킨다. 나타샤에 대한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에서 나타샤는 소설 말미에 인터뷰어에게 가구점에서의 파티를 제안한다. 가구점 바깥에서 보이는 커다란 쇼윈도 창은 모두 가리고 사절지 크기만큼의 창문만 남겨둔다. 딱 사절지 크기만큼만. 그 크기만으로도 햇살은 들어오고 세상은 인사하며 추억은 재생될 수 있기에. 가구점은 나타샤가 현실의 폐허에서 창조한 예술적 공간이 되고 그렇기에 성스러운 장소가 된다. 파티를 여는 시간만큼은 그녀는, 그녀의 아픈 역사적 언어를 어금니 사이로 삼키고 추억을 얘기할 수 있다.
『여름을 지나가다』에도 가구점이 등장한다. 부동산 중개 사무소에서 사무 보조 일을 하는 전직 회계사 출신인 ‘민’은 목수 출신인 주인이 직접 만든 가구로 채워진 망한 가구점에 들러 목수의 강도 높은 노동과 경건한 염원의 시간을 느끼고 온다. 분명 정성과 열정이 들어간 노동의 흔적인 가구는 돈으로 교환되지 못해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이 가구점은 소진만이 가능한 곳이다. 이곳에서 행위는 무의미하고 소리는 침묵에 가까우며 감각이나 욕망은 목적을 갖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해로울 것도 없는 곳. 그렇기에 성스러운 공간이 된다. 이 공간은 『아무도 보지 못한 숲』에서의 ‘숲’과도 동질성을 지닌다. 그런 속성의 공간에서 민과 가구점 아들인 수는 서로 엇갈리며 휴식을 취하고 위로를 받는다. 한편 민은 부동산 사무실의 보조 일을 하면서 가지게 된 타인의 방 열쇠를 이용해 타인의 방 공간에 들어가 삼십 분만 타인의 인생을 산다. 어떤 날은 승무원이 되고, 또 다른 날은 만화가의 삶을 산다. 그들이 남긴 옷가지와 물품들을 통해 그 사람의 일상과 습관을 상상하면서 타인을 느끼며 그들과 함께 한다.
이제 조해진식 답은 분명해 보인다. 기차에 실린 채 어디를 갈 수 없는지 알 수 없는 두려움은, 다시 말해 존재 불안에 대한 두려움은 추상적인 고통이다. 그 두려움 속에서도 나타샤의 사절지 크기의 창문 크기만큼이면 충분한, 구체적인 감각으로 채워지는 삶. 즉, 잠깐의 예술적인 삶의 공간을 찾아낼 수 있다면 폐허 속에서도 ‘함께-있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공간이 비록 며칠, 하루, 아니 삼십 분 만에 사라지는 신기루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영원을 갈구하지 않으면 천국은 곳곳에 있다.
<끝>
*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소설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장편은 『로기완을 만났다』(창비, 2011), 『아무도 보지 못한 숲』(민음사, 2013), 『여름을 지나가다』(문예중앙, 2015)를 대상으로 한다. 단편 「PASSWARD」, 「이보나와 춤을 추었다」, 「영원의 달리기」, 「목요일에 만나요」는 『목요일에 만나요』(문학동네, 2014)에 수록된 작품들이며, 「빛의 호위」는 『올해의 문제소설』(푸른사상사, 2014)에 「인터뷰」 「그 후로 일주일」 「등 뒤에」 「기념사진」 「여자에게 길을 묻다」는 『천사들의 도시』(민음사, 2008)에 수록된 작품들이다.
** 이 글에서 자주 활용되는 낭시(Nancy)의 공동체 이론들은 주로 모리스 블랑쇼·장-뤽 낭시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문학과지성사, 2005)와 장-뤽 낭시의 『무위(無爲)의 공동체』(인간사랑, 2010) 등에서 참고하였다. 일반적으로 공동체라고 하면, 민족, 인종, 이념, 종교 등을 토대로 동질성과 내재성을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는 집단을 말한다. 그러나 낭시가 제안하는 공동체는 어떤 원리, 기준, 이념, 즉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고도 함께 존재할 수 있는, ‘함께-있음’ 자체를 긍정하는 공동체다. 이 공동체 이론의 핵심 개념어는 세계-내-존재, 결핍, 유한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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