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살았다, 탕진할 그 무엇도 없었다 그대에게 말할까 말까, 사랑하는… 어머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석달 열흘 한 줌의 마늘과 쑥을 드시고도, 강림하지 않는 아버지를 우리가 기다릴 때 그대를 만나고 미아리나 수유리 저녁을 만날 때 간혹 희망은, 뽑지 않은 사랑니처럼 아팠다, 생애의 묽은 죽을 반추하거나 희망과 혁명을 바꿔 부르기도 했지만, 집 근처 국립묘지의 무덤과 무덤들 푸르고 단단한 입술들이 일러주던 또 다른 피안은 시대의 낙엽들 되돌아 갈 길을 묻고 있었다 그렇게도 읽을 수 없는 날들이 지나갔다 세상은 징검다리였다 삶은 금간 항아리 같았다 성급한 이해가 한 생애를 그르쳤으므로 점자를 읽듯 세상을 더듬거렸으나 잇몸인 물과 행간에서 깊어지는 한숨 같은 우물들 읽을 수도 재울 수도 없는 세상을 탕진할 것 하나 없는 시절을 한 켤레 벙어리 장갑처럼, 함부로 나는 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