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명 : 여자의 계단
성 명 : 이준희
남자가 계단을 오른다. 한발씩 딛는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계단을 오르는 것이 혼자뿐인 듯 통로가 조용하다. 하나 둘 셋…… 남자는 계단을 오르며 숫자를 센다. 건물 계단이 몇 개인지는 밖에서 본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계단 숫자를 세기 위해 남자는 직접 계단을 올라야 했다. 평소 남자는 건물의 계단에 대해, 더욱이 계단 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엘리베이터를 주로 이용했고, 간혹 계단을 이용할 때도 몇 칸씩 성큼성큼 건너뛰곤 했다. 계단 수를 세는 것은 남자의 인생에서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여자가 아니었다면 남자가 숫자를 세며 계단을 오르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계단을 오르는 남자의 숨소리가 점차 흐트러진다. 남자는 난간을 잡고 계단참에 쪼그려 앉는다. 쪼그려 앉자 종아리가 팽팽하게 당겨진다.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낸다. 종이에 숫자와 그림이 적혀 있다. 247. 남자는 종이 위에 손가락으로 숫자를 써 본다. 문득 여자의 말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247개의 계단이 있는 건물이야. 잘 알아둬, 247. 남자는 소리 내 숫자를 말해 본다. 남자의 목소리가 텅 빈 계단실에 울렸다 사라진다.

남자는 일 층부터 옥상까지 계단이 247개인 건물을 찾고 있다. 남자의 사무실을 둘러싼 건물은 네 개였다. 남자는 이미 그 중 세 개의 건물을 오르며 계단 수를 알아봤다. 그것들은 남자가 찾는 건물이 아니었다. 너무 높거나 낮았다. 지금 남자가 오르는 건물만이, 남자가 찾는 건물일 가능성이 제일 높았다. 그러나 계단은 240개였다. 몇 번을 올라봐도 계단 수는 변함이 없었다. 계단은 십육 층에서 끝이 났다. 남자의 머릿속으로 의심이 파고들었다. 여자가 잘못 센 것은 아닐까. 그때마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여자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남자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벽을 올려다본다. ‘8F’라는 표지가 붙어 있다. 남자는 고개를 길게 빼 난간 틈새로 아래쪽을 내려다본다. 딛고 올라온 계단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여자는 언제 이 많은 계단을 올라 다녔을까. 불현듯 남자의 눈앞에 여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남자의 두 배쯤 되는 몸을 이끌고 느릿느릿 계단을 올랐을 여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여자는 손으로 난간 손잡이를 잡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무릎을 짚었을 수도 있다. 도중에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소리 내어 숫자를 셌을지도 모른다. 여자의 모습이 떠오르자 훕, 하고 남자의 입에서 웃음이 새나온다. 웃음은 힘이 없다.

남자는 여자를 처음 만났던 때를 기억한다. 남자의 첫 직장에서다. 처음 출근하던 날, 직장 상사이기도 한 남자의 대학 선배가 자리를 알려 주겠다며 앞장섰다. 남자는 조금 들떠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처음 발 딛는 사회였다. 수십 장의 이력서를 써봤다. 디자인학과를 나와 할 수 있는 일이 적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전공을 살리고 싶었다. 어느 날 동문회에서 만난 선배가 남자에게 말했다. 우리 회사에서 일해라. 캐릭터를 만들고 삽화를 그리는 회사다.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남자는 엘리베이터를 탄 듯한 기분이었다. 정식 절차를 거쳐 뽑은 걸로 할 테니 서류나 잘 만들어 와. 선배는 남자에게 당부했다. 여기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선배가 한 공간을 손으로 가리켰다. 남자는 선배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사무실 귀퉁이, 파티션으로 가린 세 평의 공간이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 세 개가 한 걸음 정도씩 떨어져 있었다. 물감, 파스텔, 에나멜 물감들이 책상에 가지런히 놓여 있고, 반대편에 그림들을 편집하는 컴퓨터가 몇 대 있었다.

남자가 여자를 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책상 앞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몸을 잔뜩 구부린 채였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고 조금 경악했는지도 몰랐다. 구부린 상체가 책상 절반 이상을 가리고 있었고, 의자에 앉은 건지 끼인 건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마치 어린이 책상에 어른이 앉아 있는 듯했다. 여기 신입. 선배의 말에 여자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의자를 뒤로 밀더니 회전의자 위에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여자가 움직일 때마다 의자가 삐걱거렸다. 남자는 자칫 실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완전히 몸을 돌리기 전, 남자는 얼른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여자의 반응이 없었다. 남자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여자를 제대로 쳐다봤다. 여자는 몸집에 비해 작다 싶은 안경을 쓰고, 샐러드 그릇을 들고 있었다. 코끝에 걸린 안경 너머로 여자가 남자를 넘겨다봤다. 말없이 코를 계속 실룩이고 있었다.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가 손가락으로 남자 뒤쪽 책상을 가리켰다. 거기가 남자 자리였다.

회사의 주력 분야는 캐릭터와 삽화 제작이었다. ‘이미지는 내용에 앞서 전달된다.’ 의뢰자들은 일러스트나 삽화가 사람들 의식에 끼치는 영향력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의뢰가 들어오면 기획팀에서 회의를 했고, 그것이 디자인팀으로 넘어왔다. 클라이언트가 직접 디자인 초안을 넘기기도 했다. 남자는 디자인팀에 속해, 기획팀과 디자인팀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기획팀 사람들이 제시한 초안을 보며 의견을 조율하고, 여자가 그린 그림을 시안 형태로 만들었다. 전임자도 했던 일이었다. 여자가 기획팀과 접촉하는 일은 없었다. 사실 여자는 사무실 내 누구와도 사적인 교류가 없는 것 같았다. 여자는 늘 혼자였고, 세 평 남짓한 원화 디자인실에 주로 머물렀다. 어쩌다 자리를 비우곤 했는데, 돌아올 때면 뭔가를 품속에 숨겨 왔다. 그게 뭐예요? 의례적인 말 반, 궁금함 반으로 물어봐도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는 컴퓨터를 만지는 대신 붓이나 파스텔을 손에 쥐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림 대부분을 직접 그려 컴퓨터에 입력해야 했지만, 요즘에는 작업 대부분이 컴퓨터 드로잉 프로그램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종이에 직접 그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수채화의 붓자국처럼 재료의 질감을 살리고 싶을 때다. 컴퓨터로도 재료의 특성을 살린 그림을 만들 수 있지만, 실제로 그린 것과는 차이가 났다. 그것들 대부분을 여자가 맡았다.

여자가 남자에게 준 것은 캐릭터 디자인 초안이었다. 여자가 그림을 넘기면 남자는 그 자리에서 클라이언트가 제시한 기획의도와 맞아떨어지는지 검토한다. 그동안 여자는 가만히 앉은 채로 남자를 쳐다봤다. 패널에 걸어둔 컵에 야채주스를 따라 마시거나, 샐러드를 먹으면서. 가끔은 빈 종이에 스케치를 하는 듯했지만, 눈치를 보듯 남자의 얼굴을 살피곤 했다. 남자가 의견을 말할 때 여자는 수긍할 때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견이 있을 때는 손에 쥔 컵 밑바닥을 문질렀다. 남자는 의견을 말할 때마다 여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까 근심이었다. 하하. 이번 그림은 너무 약한 거 아닌가요? 그쪽에선 파스텔이 식상하다고 그러던데. 여자는 남자가 들고 있던 종이를 받아 그림을 살폈다. 캐릭터는 강해야 하지 않나요? 보는 사람을 한번에 잡아먹는 거죠. 남자는 여자에게 말하며 그녀의 표정을 관찰했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돌아서는데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중지가 푹 파였던데, 펜을 많이 잡는 편인가 봐. 남자가 돌아봤다. 여자가 남자에게 사적인 말을 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선배가 여자에 대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성격이 보통이 아닐 거야. 딱 보면 알잖아.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다구. 남자는 문득, 여자가 선배의 말처럼 꼬인 사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다시 계단을 오른다. 계단 수는 생각했던 것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그대로다. 이대로라면 이번에도 240개의 계단을 오를 것이다. 남자는 오른발이 닿을 때마다 다리에 힘을 준다. 오른발, 왼발, 다시 오른발. 남자의 몸이 리듬을 탄다. 몇 번씩 계단을 오르내리며 건물 전체를 상상하곤 했다. 남자는 지금 오르는 건물의 모습을 떠올린다. 일층 현관으로 들어가 로비 뒤쪽으로 돌아가면 계단실이 나온다. 계단실은 금연이고 공기정화조가 설치되어 있는 대신 창문이 없다. 계단은 층마다 16개씩 있다. 여덟 개의 계단을 올라 계단참에서 시계 방향으로 모서리를 돌면 또 여덟 개의 계단이 나온다. 굴절형 구조다. 남자는 여러 건물들을 오르면서 같은 굴절형 구조라 해도 건물마다 굴절 방향이 제각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출입문의 위치나 건물의 평면 형태에 따라 시계 방향으로 굴절되기도 하고 반시계 방향으로 굴절되기도 했다. 그것은 관심을 갖고 보거나 직접 세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남자는 지금 오르는 건물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일지 궁금해진다.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이 건물은 특이한 구조를 가졌거나 누군가 살고 있거나 혹은 어떤 상점이 있는 곳이지 않을까. 남자는 문득 계단을 오르는 일이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일과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건물을 오르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건물과 자신이 비밀을 하나씩 공유하는 것 같았다. 사귀게 된 이후에 서로를 한 걸음씩 알아가는 것. 남자는 남자가 사는 곳이나 자주 가는 건물의 계단 수가 몇 개인지 알지 못했다. 당연히 다른 사람이 사는 건물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다. 어쩌면 여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이 많은 계단을 세며 올랐던 걸까. 남자는 그것까지는 확신할 수가 없다. 여전히 여자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날, 창밖에선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남자가 일하는 세 평 공간에도 따스한 열기가 가득 찼다. 남자가 점심을 먹고 돌아왔을 때도, 여자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뭐 해요? 남자가 묻자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여자 뒤쪽으로 햇빛이 하얗게 빛나고 있어 그녀의 실루엣밖에는 볼 수 없었다. 책상에 잔뜩 구부린 여자의 상체 너머 긴 붓꼬리가 흔들렸다. 남자는 의자를 끌어 여자 옆에 앉았다. 남자는 페인터나 포토샵 같은 드로잉 프로그램은 능숙하게 다루었지만 직접 그리는 데는 약했다. 남자는 일러스트를 하고 싶어 대학에 들어갔지만, 디자인학과에서는 말 그대로 디자인만 가르쳤다. 남자가 뭔가를 직접 그린 경험은 입시 미술을 공부했던 게 다였다. 그 이후에는 잡지나 만화를 모사하며 기본적인 감각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때문에 여러 재료를 이용해 직접 그림을 그리는 데 일종의 동경심을 갖고 있었다. 직접 그린 그림에는 편집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그리는 것은 날아간 씨앗들이었다. 여자는 동화용 삽화를 그리고 있었다. 동물들의 횡포를 피해 꽃들이 날린 씨앗들의 이야기였다. 남자는 턱을 괴고 그림을 지켜봤다. 씨앗들은 바람이 불면 어디로든 날아갔다. 날아가 사람들의 어깨에도 앉고 지붕에도 앉았으며 담벼락에도 앉았다.

그건 잠시였다. 또다시 바람이 불면 어딘가로 날아가야 했다. 그래도 씨앗들은 행복했다. 지겹게 한곳에 머무르지 않아도 되고, 동물에게 밟혀 죽을 염려도 없었다. 씨앗들은 바람을 통해 자유로웠고, 날아간 곳에는 항상 누군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여자의 손끝에서 생겨났다.여자는 스케치한 종이 위에 파스텔을 칠했다. 씨앗에 엷고 노란 바탕 선이 그려졌다. 여자는 씨앗의 배경에 하늘색 파스텔을 칠하고, 그 위에 밝은 수채화 물감을 덧칠해 파스텔을 얇게 폈다. 여자의 손이 크게 움직였다. 그러자 파란 하늘이 종이에 가득 찼다. 여자는 압지로 남아 있는 습기를 제거하더니, 이번에는 딱딱한 파스텔을 이용해 씨앗을 그렸다. 여자의 손이 세밀하게 움직이자 씨앗 표면에 오톨도톨한 돌기가 생기고 표정이 그려졌다. 여자는 또 다른 파스텔로 씨앗의 표면을 색칠하고 바람의 결을 만들었다. 일정한 리듬을 만들며 여자의 손이 빠르게, 때로는 섬세하게 움직였다. 종이 위에 바람이 불었고, 씨앗들이 바람에 실려 하늘을 날았다. 강한 선이든 얇은 선이든, 또 움직이는 것이든 멈춰 있는 것이든, 여자의 손이 움직이면 생생해졌다. 지켜보던 남자는 햇빛 때문인지 아니면 붓이 만들어낸 교묘한 리듬감 때문인지 약간의 나른함을 느꼈다. 미세한 전율이 남자의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남자는 순간 낯선 감정을 느꼈다. 남자와 여자가 앉은 세 평의 공간이 일상에서 툭 떨어져 나온 듯했다. 여자의 그림을 보는 것이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여자가 붓을 놓았을 때 남자는 턱을 괸 채 물었다. 매번 일찍 나오고 늦게 퇴근하는 것 같던데…… 이 근처 살아요? 여자가 고개를 돌려 남자를 쳐다봤다. 돌연 여자의 표정이 굳었다. 남자 몸을 감싸던 나른함이 그 표정에 확 달아났다. 세 평 공간도 평소와 다름없이 현실적으로 돌아온 듯했다. 주제넘은 짓이었나, 남자는 여자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남자는 무안해져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여자가 남자의 옷깃을 붙잡았다. 여자는 빈 종이를 꺼내더니 펜으로 그림을 그렸다. 남자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과 그 건물을 둘러싼 세 건물이었다. 뭐예요? 내가 사는 곳. 여자가 숫자를 썼다. 247번지? 남자가 묻자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종이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남자는 한참 동안 답을 알아내지 못했다. 247개의 계단이 있는 건물. 여자가 말했다. 그 건물 207번째 계단이 있는 층, 열일곱 번째 집. 여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찾아가려면 계단을 다 올라야겠네요.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남자가 말하자 여자가 대답했다. 그 정도 노력 없이 남에 대해 알려고 했어? 남자는 그때만 해도 여자의 말을 좇아 계단을 오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십일 층임을 알리는 표지가 벽면에 붙어 있다. 남자는 멈추지 않는다. 옥상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눈으로 표지를 훑고 지나고, 입은 여전히 숫자를 중얼거린다. ……백오십육, 백오십칠, 백오십…… 그때 누군가 계단 문을 벌컥 연다. 남자는 ‘팔’을 내뱉지 못하고 입속에 숨긴다. 누군가 계단으로 들어온다. 사내다. 남자가 서 있는 곳에서 두 층 정도 아래다. 남자는 소리 죽여 계단에 앉는다.

쿵,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남자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벽을 치는 소리다. 벽을 치는 사내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온다. 상사나 동료, 헤어진 연인이거나 자신에게 하는 말일 거라고 남자는 생각한다. 혼자라고 생각했는지 사내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가 점점 커진다. 남자는 미동도 않다가 눈을 감는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남자는 그런 때 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하나는 울창한 대나무숲을 찾아가 하고 싶은 말을 외치는 것이다. 동화에 나오는 박두장이처럼. 또 다른 하나는 오래된 나무에 구멍을 내어 그 안에 하고 싶은 말을 써넣은 뒤 구멍을 메우는 것이다. 이것은 남자가 오래전에 다큐멘터리에서 본 방법이다. 어느 나라 부족이 써먹는 방법이라고 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나무를 태우는 거였다.

남자는 자신의 오래된 나무를 떠올린다. 항상 뭔가를 넣어두기만 했지 그것들을 다시 꺼내본 적은 없다. 아마 지나간 시간들이거나 그때에 바랐던 소망일 거다. 그것들이 어두운 구멍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뒤섞여 있을지 남자는 문득 궁금하다. 그러나 꺼내 보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말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누구나 대나무숲이나 오래된 나무 하나씩은 갖고 있을 테지만 오래된 나무가 대나무숲이 되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부족 사람들은 나무를 태우는지도 모른다. 아마 사내는 자신의 말을 누군가 듣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거다. 사내의 오래된 나무는 남자로 인해 대나무숲이 될 수도 있다. 철컥, 하고 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더 이상 사내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계단실은 다시 텅 빈 듯 고요하다.

십오 층, 십오 층 반, …… , 십육 층. 천장이 점점 낮아지더니, 더 이상 계단이 이어지지 않는다. 남자가 마지막에 내뱉은 수는 240이다. 남자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벽에 붙은 ‘16F’ 표지가 더 올라갈 수 없다는 경고문처럼 버티고 있다. 남자는 표지와 끊어진 계단을 본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듯하다. 며칠 동안 계단을 오르던 모습이 남자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계단을 오르며 남자는 이건 비현실적이야, 라고 되뇌었다. 여자의 말만 듣고 여자를 찾아 계단을 오른 것부터 그랬다. 처음부터 함정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247개의 계단이 있는 건물을 올라 207번째 발 디딘 곳에 닿은 층, 여자가 사는 곳. 남자는 여자가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세계로 들어가 그것을 엿보는 것은 영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서였다. 여자가 남자에게 종이를 내밀었을 때, 남자는 당황하고 있었다. 여자가 건넨 종이에 남자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연습 삼아 그려본 거야. 여자는 코를 실룩거렸다. 여자가 건네주는 게 남자의 초상화인데도 그녀는 누군가 의뢰한 그림을 넘겨주는 표정이었다. 여자가 코를 움직일 때는 부끄러울 때인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문득 생각했다. 언제 그린 걸까. 남자는 자신의 눈치를 보다 고개 돌리던 여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여자가 말했다. 아무래도 영락없이 그림쟁이인가 봐. 사람들이 나를 외모로 판단하는 건 싫어하면서 나는 겉모습을 그리고 있으니.

이후로 남자는 여자가 그림 그리는 과정을 자주 지켜봤다. 여자가 든 붓이 하얀 백지에 닿으면 어떤 것이라도 생생해졌다. 붓의 터치와 색의 조화가 남자를 매료시켰다. 여자는 무표정했지만 그림을 지켜보는 게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여자가 남자에게 붓을 쥐어 주기도 했다. 처음엔 서툴렀지만 조금씩 그린 그림이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보며 남자는 희열을 느꼈다. 그런 시간이 늘어나면서 둘은 자연스럽게 많은 얘기를 나눴다. 어느 날 남자는 여자에게 직접 회화를 공부한 사람에 대한 동경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건 몰랐다는 듯 여자가 말했다. 그래도 회화 한 사람보다 디자인 감각은 뛰어날 것 아냐. 제각기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 지금 나한테 배우니까 디자인 감각에 회화 능력까지 갖추면 되겠네. 이렇게 여자가 대답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주로 말하는 것은 남자였다. 내용도 다양했다. 학교 다닐 때 일부터 입사까지. 여자는 남자가 말하면 가끔씩 답해줄 때도 있었고, 또 대답하는 대신 그림을 넘겨주기도 했다.

남자는 여자가 그림 그리는 것이 말하는 대신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날 여자는 카니발을 소개하는 정보지 삽화를 그렸다. 남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여자 옆에 섰다. 여자는 여러 가지 색으로 화려한 카니발을 표현하고 있었다. 중세의 어떤 축제 광경을 풍자적으로 그려 놓은 그림. 도시에 벌어진 축제와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 그림을 들여다보다 남자는 놀랐다. 그림 속의 사람들은 즐거운 듯 보였지만, 그들의 모습은 진짜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그림 속 마을의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고, 그들은 광대의 공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물을 뒤집어쓴 사내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돌아다녔고, 어떤 이는 집단 구타를 당해 다리뼈와 갈비뼈가 튀어나왔다. 마녀사냥의 광경도 펼쳐졌다. 광장에 높게 쌓은 단 위에서 한 여자가 화형당하는 모습이었다. 불에 타 죽는 사람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똑같은 가면을 쓴 것처럼 하나같이 웃고 있었다. 그림을 보던 남자는 몸서리쳤다. 남자는 오래전, 카니발을 재현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학교 행사의 일환이었다. 카니발의 특성은 모두가 함께 참여한다는 것이다. 남자는 그 점을 살리고 싶었다. 단순히 전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함께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미술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이 여러 재료를 사용해 그림을 그려볼 수 있는 행사들. 되도록 많은 사람이 참여하길 바랐다. 마지막 행사에는 가면을 만들어 써오도록 했다. 축제는 예상 외로 성과를 거두었다. 학교를 찾은 선배들이 후배들을 격려했다. 지금을 즐겨. 학교 졸업하면 아무것도 없어. 사람 관계라는 게 아주 더럽다는 걸 느낄걸. 밖에 나가면 어찌나 권력 횡포가 심한지. 남자를 비롯한 후배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졸업을 앞둔 마지막 행사였기에 남자에게 그 카니발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여자의 그림은 다르다. 하나도 유쾌하지 않다. 여자의 축제는 이런 것이었나, 남자는 생각했다. 그때 그림 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그리다 만 흔적이었다. 광장에서 멀리 떨어진 집 안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

여기는…… 남자의 말에 여자가 종이를 가져갔다. 응, 아크릴로 덮을 거야. 여자가 말했다. 고생해 그린 걸 왜 그냥 덮습니까. 여자는 남자를 힐긋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카니발은 분명 모두가 즐거운 날이었겠지. 그날만 고대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런데 그게 다일까? 여자는 미완인 부분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 시간에 누군가는 무엇인가가 두려워 어두운 방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지는 않았을까. 남자는 여자를 쳐다봤다. 어쩌면 마녀로 낙인찍힐까 두려워 그런지도 모르지. 그런 사람들에게 방법은 두 가지야. 그들과 같은 가면을 쓰고 광장으로 나가든가, 아니면 광장에는 얼씬도 않고 어딘가에 숨는 거. 순간 남자는 여자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물을 많이 탄 물감처럼 희미했지만, 남자가 처음 본 여자의 표정이었다.

남자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시계를 본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났다. 사무실로 돌아가야 할 시각이다. 남자는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돌아갈 심산으로 옥상 문을 찾는다. 십육 층은 계단이 끊긴 자리여서인지 문 달린 위치가 다른 층과는 다르다. 남자는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어젖힌다. 바깥 공기를 맡을 거라 예상한 남자의 눈앞에 두 개의 문이 떡 버티고 서 있다. 남자는 그 자리에 멈춰 선다. 머릿속에 예감이 스치고 지나간다. 남자는 문을 하나씩 연다. 남자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첫 번째 문을 열자 다른 층처럼 복도가 나온다. 복도 저쪽으로 기계실과 설비보관소가 차례로 이어진다. 남자는 문을 닫고 복도를 빠져나온다. 남자가 또 다른 문 앞에 선다. 문 중간쯤에 자물쇠가 걸려 있다. 남자는 자물쇠를 건드려 본다. 잠겨 있지는 않고 걸려만 있다. 남자는 자물쇠를 빼고 문을 연다. 문이 열리자, 남자 앞에 직선 계단실 하나가 나타난다. 남자가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른다. 하나 둘 셋…… 남자는 조마조마하다. 다섯 여섯…… 그리고 일곱. 계단은 일곱 개다. 일 층부터 옥상에 이르는 계단이 247개인 건물을 찾은 거다. 첫 관문을 통과했으니 207번째 계단이 있는 층을 찾는 두 번째 관문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남자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문을 힘겹게 당긴다. 이음매 부분이 녹이 슬었는지 뻑뻑하다. 문이 열리고 바깥바람이 얼굴로 달려든다. 남자는 옥상 난간 앞에 선다. 눈앞에 도시의 전경이 펼쳐진다. 회색빛 대기 속에 빌딩들이 서 있다. 그 빌딩에는 제각각 서로 다른 형태와 숫자의 계단들이 있을 테고, 또 그만큼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을 거다. 남자는 왔던 길로 몸을 돌린다. 시간이 빠듯하지만 지금이라면 여자가 수수께끼를 내듯 알려준 여자의 방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남자는 올랐던 계단을 다시 내려가기 시작한다. 다시 일 층에서부터 207개의 계단을 올라야 할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건물의 계단 수가 몇 개라는 것을 알아두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남자는 궁금해진다. 열 명 중 여덟 명? 아니면 나머지 두 명? 여자는 답을 알고 있을까.

한 달에 한 번인 회식은 언제나 남자의 선배가 일장 연설을 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건 시작을 알리는 선언 같았다. 연설을 끝내면 선배가 직원들에게 일일이 맥주를 부어주고 격려했다. 그럴 때면 모두들 긴장했다. 마지막으로 남자 이름이 불려졌다. 선배는 별 말은 하지 않았으나 뭔가 남자의 목덜미를 누르는 듯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내가 끌었으니 더 잘해야 한다는 것 같았다. 오래전 축제 때 학교에 찾아와 학교 밖 세계의 고통을 토로하던 선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회사에서 본 선배는 그때 그런 표정은 지어본 적이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술자리가 이어졌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즈음 여자 이야기가 테이블에 오갔다. 남자는 여자가 참석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옆 사람이 남자에게 말했다. 그 사람은 안 와. 채식주의자거든. 그는 낄낄거렸다. 남자의 앞사람도, 앞사람의 옆 사람도. 애인이 떠나고 많이 먹어서 살이 쪘대. 에이, 그게 아냐, 원래 뚱뚱했는데 애인이 살 좀 빼라고 그랬다. 그래서 지금 샐러드만 먹고 고기는 안 먹는 거 아냐? 하긴 회식 자리에 나와서 물만 먹고 있으면, 옆 사람이 눈치 보여서 어디. 그 체격 어떻게 유지하나 몰라. 남자는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사회성이라고는 없잖아. 혼자 처박혀서 뭐하는지. 가끔 나가기는 하잖아. 참, 내가 봤는데 나갔다 들어오면 품속에 뭘 숨기고 들어와. 우리 앞에서 내숭 떨고 간식이라도 먹나 보지? 다들 웃었다. 남자는 맥주만 마셨다. 그런데 그거 다 근거 있는 얘기예요? 돌연 남자가 물었다. 옆 사람이 남자를 쳐다봤다. 앞사람과, 그 옆 사람도. 자리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이봐, 신입! 선배가 남자를 불렀다. 사람들이 선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열 명 중 여덟 명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야. 선배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았다. 남자의 눈엔 다들 ‘8’이라는 가면을 쓰고 앉아 있는 듯했다. 남자만 ‘2’라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문득 여자가 그린 카니발 그림이 생각났다. 남자는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여자가 어딘가 어두운 집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남자는 일 층부터 다시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경쾌하다. 잠시 앉았던 112번째 계단을 지나 곧 사내가 떠들던 158번째 계단을 지날 것이다. 남자의 발걸음이 잠시 주춤댄다. 남자는 층간 계단 수를 알고 있다. 207번째 계단이 몇 층인지는 계산을 해봐도 알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계단을 하나하나 직접 밟고 오르자고 생각한다. 직접 계단을 오르지 않았더라면 건물에 247개의 계단이 있는 줄 몰랐을 거다. 여자가 남자에게 계단 수를 알려준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여자의 말이 부쩍 늘게 된 것은 사람들이 남자의 초상화를 보면서부터다. 남자의 초상화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남자는 그들에게 여자가 그려줬다고 말했다. 누구든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쳐지는지 궁금한가 보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누군가를 시작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여자에게 초상화를 부탁했다. 그들의 말투나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그들 중에는 캐리커처를 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세 평 남짓한 화실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그림을 부탁하거나 여자와 이야기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여자에게 사교적이지 않다거나 대인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필요한 말만 하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당신이 꼭 그런 것 같아요, 라고 여자에게 말했다. 여자는 그림을 그려주며 그림에 사용된 재료의 특성이나, 누군가를 그릴 때의 일화를 그들에게 전달했다. 줄곧 여자에 대해 말하기 좋아했던 사람들은 이제 여자에게 이야기를 듣는 처지로 바뀌었다.

여자는 처음 특기를 발견한 사람처럼 말하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집중력은 대단했다. 사람들이 여자를 찾고, 여자가 그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여자는 이제 그림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회사 동료들에 대한 것까지도 말할 수 있었다. 여자는 그동안 하지 못한 말을 모두 하려는 사람처럼 항상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여자가 자리를 비우는 일도 잦아졌다. 남자는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여자는 사람들과 몸을 부딪치며 알아가는 중이었다. 여자에게는 특별한 변화였을 것이다. 여자는 바람에 실려 날아가는 씨앗처럼 행복해 보였다. 남자는 그 표정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남자의 우려가 현실로 드러났다. 선배가 남자에게 전화를 한 건 늦은 밤이었다. 너 도대체 사내자식이 입이 왜 그래? 선배는 다짜고짜 거친 말을 내뱉었다. 남자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너 내가 끌어왔다는 얘기를 사람들에게 하면 내 입장이 어떻게 되느냔 말이야. 남자가 전화를 받는 순간 여자의 얼굴이 지나갔다. 사무실에서는 알게 모르게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소문 때문에 패가 나뉘거나 다시 합쳐졌다. 사무실 사람들은 그 중심에 여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왜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느냐고 나서서 여자에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자는 여전히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았고, 사람들은 여자가 없을 때면 여자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은 예전처럼 점점 여자에게서 멀어졌다. 여자도 그것을 알았을 거라고 남자는 훗날 생각했다.

이백오, 이백육, 이백칠…… 남자는 난감해진다. 208번째 계단을 밟아야 십사 층이다. 207번째 계단은 아직 중간일 뿐이다. 혹시 잘못 센 것은 아닌지 남자는 초조해진다. 여자라면 어떻게 했을까. 남자는 눈을 감는다. 남자는 남자가 경험하고 미리 알고 있던 사실들을 머릿속에서 지워 본다. 남자의 경험을 지우는 대신 남자는 여자가 된다. 잠시지만 여자처럼 생각해 보려 한다. 남자는 눈을 뜨고 208번째 계단을 밟는다. 그리고 복도로 이어진 철체 문을 당긴다. 문을 열자 복도 바닥을 밟기 전, 아래로 디딤판이 하나 있다. 남자는 디딤판을 밟고 복도에 내려선다. 남자는 207번째 계단이 있는 층에 선 셈이다. 아니, 여자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남자의 사고방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여느 때처럼 둘째 주 금요일에 회식이 있었다. 불판에 붉은 생고기가 올라갔고 지글거리며 기름이 들끓었다. 단합을 도모하는 분위기였다. 모두가 술잔을 돌리며 결속력을 다졌다. 지난 일은 다 잊자는 분위기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선배가 남자를 불렀다. 신입이라는 말 대신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회식 전에, 선배는 이왕 소문이 난 것 괜히 약점 잡히지 말자며 남자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게 숨기지 말고 대놓고 말하자는 뜻인지 남자는 그때 알았다. 저놈이 학교 다닐 때부터 노래 하난 끝내줬거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고 남자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 끝에서 숟가락을 꽂은 술병이 넘어왔다. 남자가 그것을 받으려는데 갑자기 조용해졌다. 얼떨결에 뒤를 돌아보니 식당 출입문에서부터 여자가 신발을 벗고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여자가 태연하게 테이블로 다가왔다.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쳐다보기만 했다. 이쪽으로 와. 누군가 마뜩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는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여자는 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잔이 돌며 술자리는 다시 활기를 찾았다. 누군가 여자에게 술을 따랐다.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술을 한번에 마셨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여자에게 술을 따랐다. 초상화 고마워요. 누군가 여자에게 말을 건네기도 했지만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말이었다. 저쪽 어디서 여자에게 말했다. 술만 먹지 말고, 안주도 좀 먹어. 그래, 고기를 먹어야 체력을 유지하지. 설마 진짜 채식주의자는 아니지? 자리 곳곳에서 한마디씩 끓는 기름처럼 튀어나왔다. 남자는 문득 여자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남자는 눈앞의 잔을 들어 연거푸 들이켰다. 그러는데 다시 주위가 조용해졌다. 남자는 술잔을 입에 댄 채 여자 쪽을 힐끔 쳐다봤다. 순간 남자는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여자가 잔뜩 기름기가 묻은 고기를 입에 집어넣어 우걱우걱 씹고 있었다. 남자의 목구멍까지 그만하라는 말이 나왔다 들어갔다. 입이 가득 찼는데도 여자는 계속 고기를 우겨넣었다. 붉은 여자의 입술이 흉하게 번졌고 입 주위에 기름이 잔뜩 묻었다. 접시만 보며 고기를 우겨넣던 여자가 한순간 남자를 쳐다봤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눈을 돌려 버렸다. 가슴이 뛰었고, 다른 한편으론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을 느꼈다.


여자의 눈이 젖어 있던가, 조금 전의 일인데 남자는 기억할 수가 없었다. 짧은 순간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여자를 외면한 건 남자만이 아니었다. 다들 여자를 보지 않고 말없이 술만 마셨다. 여자가 입을 틀어막으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들어온 문을 향해 뛰어갔다. 다들 그 모습을 넋 놓고 쳐다봤다. 남자는 여자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여자는 음식점 골목 뒤편에서 방금 먹은 것을 게워내고 있었다. 남자가 다가가자 여자가 남자를 뿌리쳤다. 남자는 여자가 다 토해내길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여자는 사라졌다.

여자는 며칠이 지나도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자가 보이지 않자 ‘실종’이라고도 했고 ‘도망’이라고도 했다. 남자처럼 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남자는 정말로 여자가 사라진 것 같았다. 여자가 항상 앉았던 공간에 주인 없는 붓과 물감만 남아 있었다. 일주일쯤 지나 선배는 여자의 짐을 치우라며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누구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선배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그날 모두가 퇴근한 후, 남자는 여자의 책상 앞에 앉았다. 짐이라고는 여자가 야채주스를 마시던 머그잔과 물감을 만질 때 둘렀던 앞치마밖에는 없었다. 책상 서랍을 열었다. 남자는 그것들을 꺼내 작은 상자에 넣었다. 돌려줘야 했지만 남자가 여자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연락망에 기재된 전화번호밖에 없었다. 남자는 자꾸만 여자가 어딘가에 웅크리고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남자가 복도를 걸어간다. 지날 때마다 조명이 켜졌다 꺼진다. 남자는 열일곱 번째 집을 찾고 있다. 여자가 있는 곳이다. 남자는 복도를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발걸음으로 걷는다. 복도 제일 끝에 이르러 남자는 문에 적힌 호수를 확인한다. 남자는 낙심하고 만다. 복도의 집은 열여섯 번째가 끝이다. 남자는 그 자리에서 서성인다. 건물을 잘못 찾은 건가, 하는 생각이 남자의 머릿속을 지난다.

그때 남자의 눈에, 복도 제일 끝 집의 옆에 난 문 하나가 보인다. 다른 집들과는 색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다. 남자는 그 문 앞으로 걸어간다. 문 앞 센서가 고장 났는지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남자는 문 손잡이를 잡는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쉰다. 남자가 힘을 주자 손잡이가 천천히 돌아가며 문이 열린다.

문을 열자 집안에 차 있던 물감 냄새가 휙 끼쳐온다. 공중에 오랫동안 부유하고 있던 냄새다. 남자는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선다. 벽 한 면을 차지한 창문은 블라인드에 가려져 있다. 복도 조명마저 들지 않아 실내가 어두컴컴하다. 남자가 천천히 집 안을 걷는다. 집 안은 완전히 비어 있다. 오랫동안 누구도 살지 않은 듯하다. 남자는 창가로 가 내려져 있는 블라인드를 걷어낸다. 밝은 빛이 방 안으로 들어와 남자는 눈이 부시다. 눈이 빛에 적응하자 남자는 주위를 둘러본다. 그런 남자의 눈을 끄는 것이 있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입이 벌어진다. 집안 벽 전체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도시 속 건물과 건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벽에 그려진 그들의 모습은 매우 희극적이어서 마치 축제를 즐기는 듯하다. 남자는 손으로 그림을 훑는다. 그린 지 오래되었는지 그림 위에 앉았던 먼지가 남자의 손에 묻는다. 그림들은 밝거나 화려한 색으로 칠해져 있다. 남자는 시선을 옆으로 옮긴다. 다른 그림들과는 다르게 어두운 방 하나가 그려져 있다. 남자는 그 방을 자세히 살펴본다. 그리고 곧 그곳이 어딘지 깨닫는다. 207개의 계단을 걸어 올라오면 그 층 복도 끝에 있는 방. 방 안에는 여자가 있다. 여자는 웅크려 앉아 망원경을 들고 건너편 건물의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다.

그날 밤, 술자리에서 뛰쳐나온 여자를 따라 남자는 담벼락에 앉았다. 지나는 사람이 없어 조용했다. 조금 떨어진 번화가로부터 소음이 간혹 들려올 뿐이었다. 여자는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망원경 때문이라고 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었어. 여자는 누군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망원경을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건너편 건물이 여자가 사는 곳이었다. 여자는 집으로 들어와 사무실에서 들고 온 망원경에 눈을 가져갔다. 망원경 렌즈로 사무실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망원경은 사람들을 여자에게로 가까이 끌어왔다. 사무실이라는 공간에 늘 있었지만 여자에게는 그들이 건물 밖에서 지켜보는 것보다도 멀게 느껴졌다. 여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망원경 렌즈에 눈을 가져갔다. 사람들 모르게 그들 모습을 지켜보며 여자는 은밀한 쾌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사람들의 내밀한 부분까지 보게 되었다. 사무실에 혼자 남을 때면 다른 사람의 책상을 뒤지던 기획팀 직원을 보았고,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상사의 책상을 발로 차는 사람을 보았다. 늦은 저녁에 사무실에 단둘이 남아 연애를 즐기는 직원들도 보았다. 여자만 알고 있는 사실들이었다. 여자는 가슴속에 감춰 둬야 했다. 사람들이 여자에게 그림을 부탁하면서 말을 걸어온 것도 그 즈음이었다. 여자는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이야기를 하며 그들끼리 함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일종의 가면이었다. 나도 가면 하나가 필요했는지도 몰라. 여자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돌려 여자를 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남자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남자는 창밖을 내다본다. 그리고 여자의 서랍에서 가져온 망원경을 꺼낸다. 남자는 망원경을 눈으로 가져간다. 망원경 렌즈 속으로 사물이 가깝게 다가온다. 남자는 사무실 쪽으로 망원경을 돌린다. 남자와 함께 일하는 직원들의 모습이 렌즈 안에 가득 찬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거나, 업무에 열중하는 평범한 모습이다. 렌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이, 하나의 삽화 같다.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행동밖에는 없다. 사람들의 행동에 소리와 이야기를 부여하는 것은 여자의 몫이었을 거다. 사람들 사이에 파티션으로 가린 세 평의 공간이 보인다. 항상 저곳에 있었으면서도 사람들과의 거리가 이 망원경으로 보는 거리보다 멀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남자는 입술을 깨문다.


남자는 붓을 든다. 책상 위에는 하얀 종이가 있고, 기획팀에서 넘어온 서류도 펼쳐져 있다. 남자는 약간의 숨을 머금고 붓을 들어 종이에 갖다 댄다. 이번에 개업한 꽃집에서 쓸 캐릭터를 그려 달라고 했다. 남자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선들이 생겨나고 갖가지 색이 입혀진다. 여기 신입. 선배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든다. 포트폴리오 봤는데 페인터 다루는 실력이 끝내줘. 선배가 물러가고 신입사원과 남자 둘만 남는다. 남자는 아무 말도 않고 손가락으로 뒤쪽 책상을 가리킨다. 그게 신입의 자리다. 돌아서는 신입을 붙잡고 남자는 문제를 낸다. 자네가 있는 이 층까지 오르는 데 몇 개의 계단이 있는지 혹시 알아? 신입의 표정이 어리둥절하다.

남자는 계단을 오른다. 하나 둘 셋…… 계단을 오를 때마다 숫자를 센다. 남자가 오르는 건물은 벌써 몇 번째 오르는 계단이다. 남자는 208번째 계단을 밟고 통로에 난 문을 연다. 디딤판을 밟고 복도에 내려선다. 207번째 계단을 밟은 셈이다. 남자는 복도를 따라 걷는다. 저 끝에 열일곱 번째 집이 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이다. 남자는 그 집 현관 앞에 선다. 문을 열기 전에 항상 기대를 했다. 혹시 여자가 웅크리고 있지는 않을까. 남자가 문을 열자 물감 냄새가 풍긴다.

남자는 가져온 가방을 내려놓고 벽 앞에 쪼그려 앉는다. 가방을 열자 물감과 붓이 가득 차 있다. 얼마 전 남자는 벽에 그려진 그림 위에 흙색으로 덧칠했다. 여자가 눈에 망원경을 대고 있는 부분이다. 남자는 덧칠한 부분을 만져본다. 물감이 아주 잘 말랐다. 남자는 붓을 들어 그 위에 선을 긋는다. 서툴지만 조심스럽다. 점점 남자의 손이 빨라진다. 남자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선이 그어지고, 또 겹쳐진다. 남자는 가끔 창문 틈으로 고개를 빼고 밖을 내다본다. 어디선가 여자가 보고 있지 않을까. 두 눈에 망원경을 대고 남자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생각한다. 붓을 내려놓고 남자가 일어선다. 창문으로 들어온 빛이 점점 남자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그 자리에서 빛이 잠시 흔들린다. 거기에 씨앗 하나가 있다.

남자는 일어나 붓과 물감을 가방에 넣는다. 가방을 든 남자가 들어왔을 때처럼 조용히 문 밖으로 걸어 나간다. 그러다 남자는 다시 몸을 돌려 자신이 그린 씨앗을 바라본다. 황토빛 대지에 심어진 작은 씨앗이다. 씨앗은 자유롭게 날아가지 못하고, 또 누군가와 항상 함께 하지 못할 것이다. 자라면서 동물에게 짓밟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씨앗은 땅 깊숙이 뿌리를 내릴 것이다. 단단하게 지탱하며 점차 자랄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도 아름다운 그것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릴 것이다. 남자는 씨앗을 보며 훗날의 모습을 눈으로 그려본다. 그것은…… 꽃이다. 아주 붉고 생명력 넘치는 싱싱한 꽃이다.

남자는 방 안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는 오래된 나무의 구멍을 메우듯 조용히 문을 닫는다. 여자의 오래된 나무는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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