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끝내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실’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철학, 역사, 자연과학, 그리고 심지어는 법정에서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말’들은 사실에 닿지 못한다. 철학의 ‘사실’이란 영원한 진리이고, 역사의 ‘사실’이란 가공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사건이며, 자연과학의 그것은 보편타당한 법칙이며, 증언의 ‘사실’은 판결을 위한 도구이다. 이러한 각각의 언어들이 ‘사실’이란 말로 묶여 인간의 입과 귀 사이를, 손과 눈 사이를 떠다니는 것은 신비에 가깝다. 그러면 문학의 ‘사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실에의 도달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말과 글을 통해 서로 소통한다는 것, 즉 사랑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또 거짓말하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에 사실을 위한 자리는 없다. 그 대신에 문학은 진실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그런 까닭에 문학은 항상 음지에 묻혀 지낼 수밖에 없다. 다른 ‘말’들이 제각기 ‘사실’을 주장할 때 그 말들은 항상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 사실을 주장하는 말들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는 문학은 무기력하게도 항상 이러한 힘들에 억눌린다. 그러나 문학이 이 모든 힘들을 압도하는 일시적인 순간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문학이 예언으로 변모할 때이다. 인간의 언어 가운데 예언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예언은, 특히 그것이 높고 큰 권위를 가진 존재로부터 나온 것일 때는 더욱더, 구속적인 힘을 발휘하며, 이 힘은 그것의 소유자에게는 더없이 강력한 무기가 된다. 가령 IMF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른바 경제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위기대처법’ 운운하는 강연과 저술을 통해 그야말로 위기를 기회로 삼아 배를 불렸던 사실을 상기해 보라. 철학과 역사 혹은 자연과학이나 정치, 경제 분석에 이르는 온갖 종류의 ‘말’들이 어떤 힘을 가지는 현상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언어라는 조건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데서 기인한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양태로 실현되는 언어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예언인 것이다. 예언은 특히 미래라는 시간의 영역을 담당하는 말이기 때문에 ‘불안’을 존재의 기반으로 삼는 인간 존재에게는 절대적인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 ‘불안’을 마음씀Sorge라고 명명했거니와, 인간의 마음씀은 언제나 ‘앞’을 향해 있는데, 앞이 캄캄하므로 걸음을 내딛거나 방향을 잡는 일은 늘 모험인 것이다. 모험은 늘 위험과 함께 닥치는 것이고, 인간은 지나온 모험/위험의 기억으로 인해 더욱더 모험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런데 예언이 정말로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예언이 예기치 않은 곳으로부터 올 때이다. 예언을 하는 이도 듣는 이도 모두 예기치 못했는데, 그것이 예언이 되어버리는 경우. 가령 부모가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에게 ‘너는 가망이 없어’라고 말한다면,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 해도 그 말은 아이에게 무서운 예언이 되어버려서 그 아이의 미래가 정말로 가망이 없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말한다. 예를 들어 영어에선 명령형을 미래형으로 말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쪽이 강한 명령이 되는 것입니다. 본래 미래형과 명령형은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될 것이라”라는 것은 “이렇게 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아이에 대해 너는 실패한다는 예언을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언어와 비극』, 도서출판 b, 2004, 76면.) 소설가 김훈은 제 글쓰기의 이유를, ‘말로 해선 안 되는 세상에 말 거는 자의 슬픔’이자 동시에 밥벌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말과 글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확고하다. 그러나 누구나 인정하듯이 그는 지금 한국 최고의 인기 작가다. 그의 최신작 『남한산성』이 최근 기업 면접에서 활용될 정도로 그의 글쓰기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막강하다. 세상을 바꿀 수 없기에 세상을 바꿀 생각이 없는 그의 ‘밥벌이용’ 글쓰기가 지금 세상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학이 예언으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이 순간에 대한 탐구가 이 글이 나아갈 길이다. 시간의 알갱이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무슨 지순하고 지고한 가치가 있어 가지고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현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문학이란 걸 하찮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문제가 참 많잖아요. 우선 나라를 지켜야죠, 국방! 또 밥을 먹어야 하고, 도시와 교통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애들 가르쳐야 하고, 집 없는 놈한테 집을 지어줘야 하고….(신문인터뷰 중에서) 김훈이 이렇게 문학을 폄하하는 것은 그것이 삶의 자리에 붙박여 있지 못하고 헛바람처럼 떠다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밥벌이로 상징되는 삶의 직접성에서 문학에 이르는 거리는 말 그대로 아득하다. 그가 보고 겪은 모든 삶의 무늬들은 ‘밥벌이’라는 틀 속에 자리하고 있다. 밥을 무시하거나 밥벌이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인간의 행위, 특히 믿을 수 없는 ‘개소리’로 배고픈 영혼을 구원하려는 문학은 없어져야 마땅한 것이다. 세상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찮은’ 문학 따위는 제쳐둘 수밖에 없다. 불을 꺼서 밥을 먹는 소방관의 이야기다. 세월이 흐를수록 말이라는 것이 하나 마나 한 헛바람처럼 느껴지지만, 그 중에서도 수락!은 아주 대표적인 헛바람일 것이었다. 밥과 불의 세월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것은 수락할 수 없는 것들이 생애 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수락이나 배척을 일체 떠나서, 비비적거리고 쓸리우면서 자리 잡는 과정이거나, 그 쓸리움에서 분비되는 진물 같은 것이어서, 그 진물에 질척거리는 시간 속에서 수락한다는 말이나 그 반대말로 사전에 등록되어 있는 배척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하나 마나 한 소리일 것인가.(『빗살무늬토기의 추억』, 128면.) 허허로움을 본질로 하는 바람조차도 되지 못하는, 헛바람 같은 말. 무기나 폭력 앞에서 ‘말’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다. ‘무기’나 ‘폭력’이라는 말이 아닌 진짜 무기와 폭력 앞에서 사람들은 목숨의 직접성을 남김없이 실감케 된다. 살 떨리는 생의 직접성. 김훈에 따르면 이 직접성을 지배하는 것은 시간이다. 성을 포위한 적병보다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면서 종적을 감추는 시간의 대열이 더 두렵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아무도 아침과 저녁에서 달아날 수 없었다.(『남한산성』, 180면.) 아무도 달아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삶과 죽음이 뒤섞이고 풀어지며 흘러가는 것이 역사라는 생각에 김훈은 강하게 사로잡혀 있다. 시간은 모든 것을 포위하므로 삶을 지배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삶의 직접성에서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다. 가장 자명해 보이는 것, 가장 가까워 보이는 것이 사실은 가장 희미하고 가장 멀리 있다는 이 역설 앞에서 김훈의 언어는 주춤거린다. 궤도가 땅바닥에 비벼질 때, 시간의 들숨과 날숨은 그 숨결 위에 실리는 무거움을 버림으로써 그 무거움을 밀어젖힐 힘을 빨아당기는 것이었는데, 시간의 숨결 위에서 밀고 당겨지는 그 버림과 얻음은 흔적도 구획도 없었고, 공간을 통과하되 공간에 의하여 채색되지 않는 시간은 순결했고 무균(無菌)했으며, 이윽고 한 바퀴의 회전이 끝날 때 시간의 알맹이들은 궤도의 위쪽으로 떠올라 한동안 허허로운 무위의 공간을 흘러갔으나 그 무위의 시간들은 궤도의 밑바닥에 깔리는 수고로움의 시간과 한 피대의 지속으로 엉기면서 수억만 개의 알맹이로 소리 없이 명멸했다.(『빗살무늬토기의 추억』, 84면.) 이 묘사는 소설의 화자가 작중 인물 장철민이 불도저나 포클레인 같은 중장비를 가지고 작업하는 순간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어휘 선택과 그 선택에 의한 문장의 구성으로부터 독자가 받게 되는 느낌은 우선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것이며, 이 느낌은 정확한 느낌이다. 이 말은, 김훈 식으로 표현하자면, 결국 ‘하나 마나 한 말’에 불과한 것이다. 인용문 전체는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문장에서 ‘수억만 개의 알맹이로 소리 없이 명멸했다’라는 서술어의 주어는 ‘시간의 알맹이’이다. ‘시간의 알맹이’라는 표현 자체가 지극히 추상적이어서 아득히 먼 느낌을 주는데, 이 알맹이들이 또 알맹이로 명멸한다는 대책 없는 동어반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독자들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아무도 시간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데, 시간이 수억만 개의 알맹이로 소리 없이 명멸한다면,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인간도 역시 명멸하는가? 수억만 개의 알갱이로 흩어져 버리는가? 그러면 결국 인간도 말도 모두 먼지에 불과한 것인가? 김훈은 위의 인용문이 담긴 자신의 첫 장편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을 두고 ‘문체를 실험한 난삽한 작품’이라 평했는데, 그렇다면 1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작품은 이러한 대책 없는 동어반복에서 벗어난 것일까? 언 강 위에 눈이 내리고 쌓인 눈 위에 바람이 불어서 얼음 위에 시간의 무늬가 찍혀 있었다. 다시 바람이 불어서 눈이 길게 불려갔고, 그 자리에 새로운 시간의 무늬가 드러났다.(『남한산성』, 41면.) 적에게 닿는 저 하얀 들길이 비록 가까우나 한없이 멀고, 성 밖에 오직 죽음이 있다 해도 삶의 길은 성 안에서 성 밖으로 뻗어 있고 그 반대는 아닐 것이며, 삶은 돌이킬 수 없고 죽음 또한 돌이킬 수 없을진대 저 먼 길을 다 건너가야 비로소 삶의 자리에 닿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남한산성』, 197면.) 눈 위에 바람이 불었는데 얼음 위에 시간의 무늬가 찍히고, 눈이 길게 불려갔는데 그 자리에 새로운 시간의 무늬가 찍힌다면, 그 시간의 무늬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도대체 볼 수 있는 것인가? 볼 수 있다면,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는 누구인가? 성 밖에는 죽음이 있는데, 삶의 길이 성 밖으로 뻗어 있다면, 성 밖은 죽음인가 삶인가? 그리고 성 안은? ‘문체를 실험한 난삽한 작품’으로부터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어도 그는 이 대책 없는 동어 반복에서 달아날 수 없었나 보다. 그러나 이러한 ‘대책 없음’과 ‘동어 반복’은 그에게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오히려 싸움의 기술이고 전략이며 무기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무기가 어떻게 ‘변신’을 하는지 살펴보자. 육체와 어둠, 어두운 육체 인간은 입이 있으므로 말을 한다. 그런데 입은 홀로 입이 아니다. 입은 얼굴과 함께이고, 목구멍과 함께이며, 또한 허파와 함께이다. 따라서 인간의 입은 다른 것들과 함께 몸으로서 있는 것이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고로 인간의 입은 몸이고, 말하는 것은 몸이다. 인간의 몸은 살아 있어야 몸인 것이지, 죽은 자의 그것을 몸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면 몸의 살아 있음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먹고 움직이고 자는 따위의 특징들을 들 수 있을 테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과 온기이다. 호흡과 온기는 몸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이다. 호흡과 따뜻함이 있어야 인간은 말을 할 수가 있다. 호흡과 따뜻함이 실린 말을 통해서 사람들은 서로의 살아 있음을, 인간됨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김훈이 그리는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하나같이 ‘느낌표(!)’가 없다. 아무리 다급하고 절박한 상황이어도, 흥분이 극도로 고조된 상황이어도 느낌표는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늙음’을 살아가는 인물들이란 점에서-다시 말해, 연륜이 주는 침착함이라고 본다면- 일견 그럴싸해 보이지만, 뒤집어 보면 살아 있음의 강렬함 혹은 인간됨(감정)의 표현이라 할 수 있는 ‘느낌표’가 없다는 것은 그 인물들이 동시에 죽음에 속해 있다는 표시로 생각될 수도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의 인물들은 자신들의 살아 있는 육체 속에 이미 죽음을 가지고 있다. 이는 표면적으로 김훈의 소설들이 대개 병病과 아픔(혹은 이에 연접하는 전쟁과 고통)을 다룬다는 점에서도 드러나지만, 더 세밀히 관찰해 보면 ‘어둠’에서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어둠은, 깊고, 멀다……. -얘, 난 이게 올 때 꼭 몸속에서 불덩어리가 치솟는 것 같아. 먼 데서부터 작은 불씨가 점점 커지면서 다가와서 아래로 왈칵 터져나오는 것 같아. 넌 어떠니? 나는 어떤가. 나는 몸의 안쪽에서부터, 감당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우울과 어둠이 안개처럼 배어나와서 온몸의 모세혈관을 가득 채운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스펀지가 물을 떨구듯이, 게눈에 거품이 끓듯이 조금씩 조금씩, 겨우겨우 몸 밖으로 비어져나온다.(『강산무진』,「언니의 폐경」, 234면, 강조는 인용자.) 그러나 이 어둠이 꼭 인간의 육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동물에게도 식물에게도 있다. 동물과 식물도 제각기 자신들의 삶과 죽음을 살고 죽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김훈의 눈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삶 속에 웅크리고 있는 ‘저 먼 어두움’을 응시하는 특별한 시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눈은 파충류의 눈구멍이나 꽃봉오리 안으로까지 파고든다. 그 눈구멍을 통해 그것들의 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어린 파충류의 내면에는 깊이 모를 어두움이 바다처럼 고여 있을 것이었고, 그 바다의 어두움이 그것들의 눈구멍을 통해서 그처럼 깊고 날카로운 어둠의 빛을 쏘아내고 있는 모양이었다.(『빗살무늬토기의 추억』, 34면, 강조는 인용자.) 날이 저물어서 수련이 꽃잎을 오므려가고 있었다. 아직 덜 오므려진 틈새로 안쪽의 꽃술이 내비쳤고, 꽃잎의 안쪽에 흐린 어둠이 배어 있었다. 어둠은 밖에서 꽃봉오리 속으로 흘러 들어간 것 같기도 했고, 봉오리 안에서 생긴 어둠이 꽃잎 틈새로 흘러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강산무진』, 「강산무진(江山無盡)」, 347면, 강조는 인용자.) 그런데 이 어둠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그의 특별한 눈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이 어둠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냄새이다. 김훈의 소설에서 냄새에 대한 묘사는 그 질과 양에 있어서 압도적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냄새는, 가령 생선 비늘의 비린내와 정육점 고기의 피비린내, 파, 부추, 양파, 마늘 등의 채소에 묻어 있는 흙냄새, 그리고 순대와 곱창, 잔치국수와 떡볶이 등의 온갖 음식 냄새와 더불어 장사꾼과 짐꾼의 땀냄새, 그리고 이 손에서 저 손으로 건네어지며 왔다 갔다 하는 돈냄새가 모두 어우러지는 장터의 그것에서 보듯이, ‘살아 있음’에 가장 가까운 표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음을 확인케 해주는 이 냄새는 동시에 육체의 어둠에 접속되어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하다. 몸의 저 깊은 오지에서 나의 몸과는 무관하게 살아 있는 짐승이 어두움의 벽을 향해 내지르는 발길질처럼 구역질은 난데없는 복받침의 파장으로 창자를 거꾸로 타고 올라와 목젖을 눌렀고, 출동대기하던 간밤에 먹은 라면과 김치가 창자를 따라 내려가면서 삭는 냄새의 끄트머리가 구역질을 따라서 목젖을 넘어 왔다. 입밖으로 뛰쳐나가려는 구역질을 어금니를 응물어 몸속으로 밀어넣으면 구역질은 몸의 어둡고 먼 곳으로 내려가서 희미하고도 둔중한 여운을 끌며 떠돌았다.(『빗살무늬토기의 추억』, 22면, 강조는 인용자.) 라면과 김치가 삭는 냄새가 가 닿는 곳은 ‘몸의 저 깊은 오지’, ‘몸의 어둡고 먼 곳’이다. 이 어두움은 설명될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에 맞닿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둠을 통과한 냄새는 악취로 변한다. 아내의 똥은 멀건 액즙이었다. 김 조각과 미음 속의 낱알과 달걀 흰자위까지도 소화되지 않은 채로 쏟아져나왔다. 삭다 만 배설물의 악취는 찌를 듯이 날카로웠다.(『강산무진』, 「화장(火葬)」, 45면.) 이처럼 냄새는 저 어둠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삭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삭는 것이 냄새의 본질이고, 그것이 저 어둠으로 뻗어있는 길인 것이다. 이 어둠을 벗어나면 무엇이 있을까? 국물에서 흙냄새가 났다. 봄볕에 부푼 흙냄새 같기도 했고 젖어서 무거운 흙냄새 같기도 했고 마른 여름날의 타는 흙냄새 같기도 했다.(『남한산성』, 104면.) 졸립던 그 봄날, 대낮에 공원을 산책하다가 햇볕에 부푼 황토 흙을 집어먹고 싶은 충동에 쩔쩔맸던 기억이 난다. 흙 속의 잔구멍 속으로 햇빛이 스며서 구멍 속에서 가는 빛과 그림자들이 오글거렸다. 햇볕에 부푼 그 흙을 집어먹으면, 몸이 부드러운 흙 속에 누운 것처럼 편안해지고 손가락 발가락 사이와 겨드랑과 허벅지, 그리고 자궁 속에까지 빛이 자글거릴 것만 같았다.(『강산무진』, 「언니의 폐경」, 239면.) 빛, 빛이 있는 것이다. 이 빛은 사람의 발이 닿아 있는 흙 속에 스미는 것이고, 이 흙을 먹으면 ‘자궁 속에까지 빛이 자글거릴 것’이다. 자궁은 김훈이 ‘몸의 깊고 어두운 곳’으로 묘사하는 대표적인 곳인데, 봄볕에 부푼 흙을 먹으면 그곳에서까지 ‘빛이 자글거린다’는 것이다. 비록 그 흙을 실제로 집어먹진 못한다 해도 그 생생한 느낌을 가질 수는 있는데, 그것은 바로 냄새를 통해서이다. 그러나 삶으로도 죽음으로도 통하는 이 냄새를 맡지 못하는 인간들이 있다. 그들은 ‘말로써 말을 다투는 자들’이다. 사물은 몸에 깃들고 마음은 일에 깃든다. 마음은 몸의 터전이고 몸은 마음의 집이니, 일과 몸과 마음은 더불어 사귀며 다투지 않는다……라고 김상헌은 읽은 적이 있었다. 김상헌은 서날쇠에게서 일과 사물이 깃든 살아 있는 몸을 보는 듯했다. 글은 멀고, 몸은 가깝구나……(『남한산성』, 121면.) 살아 있음의 냄새를 맡고, 그리하여 또한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자는 말과 글을 다루는 자들이 아니라 몸으로 몸을 다루고 몸으로 ‘사실’들에 부딪치는 자들이다. 말과 글에는 냄새가 없으며, 그러므로 말과 글의 인간은 ‘봄볕에 부푼 흙냄새’도, ‘몸의 어둡고 먼 곳’으로 내려가는 냄새도 맡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말과 글의 인간은 삶에서 비켜나 있으므로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헛것이요 혼백들이다. 그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은 것인데, 이것들은 ‘서로 엇물면서 떼뱀으로 뒤엉켜 보이지 않는 산맥으로 치솟아’ 삶의 시야를 가로막고 출렁거린다.(『남한산성』, 9면) 보이지 않는 산맥이 시야를 가리는 이 기가 막힌 상황이 바로 김훈에게 절망을 안겨주는 근본적인 이유다. 보이지 않는 산맥은 다시 산산이 흩어져 말먼지로 변하며, 기이하게도 이 말먼지들이 성을 쌓아 살아 있는 사람들을 거두고 있다. 바로 이러한 기묘함이 파쇄되어야 된다고 보고, 그것을 목표로 ‘글쓰기’에 도전하는 의지가 김훈의 소설을 지탱하는 힘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묘함이 주는 긴장은 그것 자체로 스스로의 꼬리를 물고 도는 우로보로스의 형상으로 지속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산맥과 말먼지가 사람들의 생을 좌지우지할 수도, 해서도 안 될 터인데,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속수무책’의 상황에 대하여 김훈은 말과 글로써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대책 없는 동어 반복’은 그의 본질이자 생존의 몸부림에 다름 아니다. 그는 이 몸부림을 ‘컥컥거림’이라 부른다. 그의 말투는 몸속 깊은 곳에 가두어져 있던 말의 토막들이 목구멍을 기습적으로 넘어오는 순간의 컥컥거림이었다. ...... 죽은 장철민의 살았을 적 컥컥거림을 주워모아 그것들을 인간의 언어 속으로 편입시키려 한다면, 거기에는 죽은 자의 컥컥거림 위에 산 자의 컥컥거림이 겹쳐서, 개의 짖음에 소의 울음을 포개는 꼴이 될 터이지만, 그러나 나는 나 자신에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나의 생애 속에서 이물스럽게 살아서 걸리적거리는 그의 생애로부터, 이해되었다는 구실 아래 이제는 그만 돌아서기 위하여 그 컥컥거림의 길로 나아간다.(『빗살무늬토기의 추억』, 80∼81면.) 이 컥컥거림의 길은 너무나 멀고, 살아 있는 김훈은 죽을 때까지 ‘소의 울음’을 포갤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으므로, 김훈은 울며 말한다. 삶은 돌이킬 수 없고 죽음 또한 돌이킬 수 없을진대 저 먼 길을 다 건너가야 비로소 삶의 자리에 닿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남한산성』, 197면.) 예언과 비극 말로써 말을 쓸어내고자 하는 김훈의 애처로운 시도는 그것이 아름다운 까닭에 더욱 애처롭다. 말을 쓸어내고자 하는 욕망은 동시에 인간이기를 거부하는/벗어나려는 욕망이기도 하다. 이 욕망은 죽음의 순간에야 비로소 충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순간에 이르렀을 때 그 욕망이 정말로 충족될 것인지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한다. 살아 있는 우리는 언어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벗어나는 것은 언제나 언어의 길을 통해서만 시도될 수 있을 뿐이며, 따라서 그것은 처음부터 실패인 시도이다. 시작과 동시에 좌절되는 시도. 가라타니 고진은 이를 두고 ‘언어의 비극성’이라는 말로 개념화했다. “말에 의해 있고 말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자연사적인 조건이라는 것은, 그것을 없앨 수도 해결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언어와 비극』, 66면.) 김훈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자연사적인 조건’으로서의 언어의 본질이다. 그에게 말은 헛바람이기 때문이다. 말이 헛것이요 헛바람이라는 진술은 오직 파악할 수 있고 확정할 수 있는 사실의 세계를 상정할 경우에만 타당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라도 사실을 확정할 수는 없다. 사실이란 것 자체가 이미 말 속에 묶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렇게 표현하는 것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사실 자체가 말에 의해 빚어지고 시간에 의해 풍화되기 때문에, 말과 시간의 흐름에 실려 있는 존재는 그것과 함께 흐를 수 있을 뿐 결코 그것을 붙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사실이란 건 아무렇게나 만들어지고 변형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물론 실제 현실에 있어서 많은 경우에 ‘사실’은 조작되고 왜곡되고 변형된다. 어떤 경우에는 있었던 사실마저 없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것도 실은 언어의 힘에 의해서다. 그러므로 언어의 헛됨에 대한 김훈의 비판은 과녁이 잘못 조준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활시위는 왜곡과 조작과 은폐, 요컨대 언어를 이용한 술책으로 이득을 꾀하려는 자들을 향해야 하는 것이지,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언어 그 자체로 화살이 당겨지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을 꾸며내고 제멋대로 바꾸려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말로써 말을 다투는 일’이 오히려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다. 이때 ‘말로써 말을 다투는 일’이란 결코 탁상공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보다 ‘꾸며진 사실’의 권력에 대항하는 일이고, 그리하여 삶을 헛되지 않게 하려는 안간힘, 진실을 지키고 일구어내려는 노력이다. 그것의 다른 이름은 문학이다. 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말로 지어진 성을 무너뜨리려는 김훈에게는 분명한 ‘사실’이 존재한다. 그것은 ‘이 세계는 악하다. 그러나 어쨌거나 살아남아야 한다’라는 것이다. 그는 온갖 이념과 이데올로기, ∼주의 따위가 ‘밥벌이’와 ‘목숨’에 무슨 소용이냐고 따져 물을 것이다. 진리와 올바름을 말로써 독점하려는 그 모든 헛바람들이 헐벗고 주린 자들에게 밥과 옷을 지어줄 수 있느냐고. 그럴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옳다. 설명될 수 없는 이 세계의 칼과 폭력 앞에서 문학 따위의 헛바람은 그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김훈이 몰랐던 것이 있다. 그것은 그의 ‘사실’이 다만 ‘그의 사실’일 뿐, 다른 이의 사실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가 사실에 입각해서 아름답고 화려한 말의 성을 축조해 내었을 때, 그곳에 들어간 자들에게 그의 말은 그냥 말이 아니라 ‘예언’이 되고 명령이 된다는 점이다. ‘예언’ 앞에서 칼 따위는 무기력하다. 미래에의 불안을 양식으로 삼고 살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에게는 눈앞에 닥친 칼보다도 캄캄하게 펼쳐진 미래가 훨씬 더 무서운 법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미래의 캄캄함에는 과거의 짙은 어두움이 포개어진다. 그래서 인간은 ‘예언’에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비극성이다. 김훈이 “삶 속의 어떤 사태는 설명이나 이유와는 애초에 무관한 것이어서 그 앞에 ‘왜’를 붙여서 의문문을 만들 수는 없을 터인데 아마도 ‘너는 왜 소방관이 되었는가?’라는 질문 따위가 그러하리라. 인간의 생애가 어떤 필연성 위에 세워지는 것이라고는 이제, 말할 수 없다”(『빗살무늬토기의 추억』, 27면.)라고 말할 때, 그는 삶에 어떤 필연성을 그리하여 운명이라는 굴레를 덮어씌우고 있는 것이다. ‘의문문’을 만들 수 없다는 것. 이것이 김훈이 삶에 덧씌우는 운명의 굴레다. 이 운명은 ‘삶에는 필연성 따위는 없다. 악은 악으로서 다만 악이니, 그저 살아남아서 살아가라’는 예언의 형태로 선포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거짓예언’에 대항해 끊임없이 진실을 일궈가려는 노력이야말로 문학의 존재이유인 것이다. 문학은 개별적 삶에 이래라 저래라 혹은 이렇다 저렇다 규정하거나 명령하지 않는다. 문학은 언어의 그 비극적인 양가성 위에서 위태롭게 줄타기 하면서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김훈의 소설이 앞으로도 계속 ‘의문문 만들기’의 가능성을 부정한다면, 그의 ‘소설’은 다른 이름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선 떠오르는 이름은 ‘아름답고, 끔찍한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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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화가 박방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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