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럿인 동시에 하나인 ‘별빛’ 루카치가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고 했을 때, 그 별은 물론 하나였을 것이다. 실제 밤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빛나고 있을지라도 우리가 바라보고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는 별은 하나여야만 했던 시대가 있었다. 그 별이 빛을 잃어서인지 저마다의 빛들이 찬란해서인지, 이제 별빛이 하나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총체성으로서의 보편이 너무 낡은 개념이라고 판단하는 자들의 대답은 둘 중 하나이다. 여럿이거나 없거나. 그러나 저마다의 별빛을 하나의 작품 안에 담아야 하는 작가는 쉽게 답할 수 없다. 세계의 재현자로서 작가가 처한 운명은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와 자신이 속한 세계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된다.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는 저마다의 빛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지만, 작품이라는 만들어진 세계 안에서 그 빛깔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작가는 쉽게 별빛이 없다거나 하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창공에 빛나는 별빛을 따라 채색할 수 있었던 시대의 작가가 아닌, 지금-여기의 작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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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화가 류하완 |
2000년대 문학의 장에서 이러한 문제를 고민하는 작가는 많지 않아 보인다. 지금의 문학은 별빛 없는 세계를 이미 선험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대의 문학과 구별된다. 1990년대 문학이 보여준 냉소와 좌절, 허무의식이란 그동안 간직하고 있던 ‘별빛’에 대한 애도(mourning)였다는 점에서 2000년대 문학과 다르다. 이제 2000년대 소설이 보여주는 상상이란 ‘환상’-물론 전복적인 의미로서의 환상이 될 가능성을 포함하여-이 되고, 출구 없는 일상의 과잉 이미지들은 체계의 알레고리로 브리꼴라주된다. 황정은이나 윤이형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환상’은 너무나 완고하게 문을 닫고 있는 현실 속에서 주체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이고, 강영숙이나 편혜영의 소설에 널려 있는 시체와 쓰레기들은 닫힌 세계의 비체(abject)인 동시에 난무하는 과잉 이미지들이다. 이러한 소설은 ‘별빛’이 사라진 자리에 피어난 독특한 환상과 이미지들을 예민하게 응시하고 있다. 김연수는 동시대의 이러한 작가들과는 좀 다른 자리에 있다. 그는 이미지가 아니라 ‘이야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이야기를 통해 보편으로서의 ‘별빛’을 찾고자 한다. 이로써 김연수의 소설은 다소 현학적이고 다분히 낭만적인 ‘이야기’가 된다. 고립된 개인이 기막힌 우연에 의해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하는 소설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러나 그러한 연결은 지속적이고도 해석학적인 개입(invention)에 의해 가능하다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연수의 소설은 다소 현학적이 된다. 또 그러한 개입이 만들어낸 무수한 ‘이야기’를 통해 세계의 유일무이한 존재이자 보편인 존재를 빚어냄으로써 이 시대 ‘별빛’에 대해 답하고 있다. 보편으로서의 별빛은 ‘여럿인 동시에 하나’라는 것. 여럿인 존재들의 겹침 속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하나의 형상. 그것이 길의 지도를 밝혀줄 별빛은 아닐지라도 이 시대의 보편자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인 동시에 대답을 소설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작가가 바로 김연수이다. 2. 독해 불능의 세계와 해석적 개입으로서의 이야기 김연수의 근작(近作)들을 읽으면 스핑크스 앞에 서 있는 오이디푸스를 떠올리게 된다. 삶을 바꿔놓을 만한 질문들, 해독되지 않는 텍스트를 마주 한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하 「설산」)의 ‘그’는 여자친구의 유서 앞에서, 『밤은 노래한다』의 김해연은 연인 이정희가 남긴 편지 앞에서, 또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하 『네가 누구든』)의 ‘나’는 할아버지가 남겨놓은 여자의 나체 사진 앞에서 “커다란 의문부호”와 만나고 있다. 총명한 영웅인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질문에 ‘인간’이라는 답을 내놓고 테베의 왕으로 등극하지만 김연수 소설의 인물들은 (불)완전한 텍스트 독해의 (불)가능성 앞에서 번번이 좌절하고 만다. 세계라는 텍스트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었으니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그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불가해한 텍스트 앞에서의 좌절은 초기작부터 이어져온 김연수 소설의 모티프이다. 작가의 등단작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에서 『?바이 이상』에 이르기까지 김연수 소설은 언제나 진실/거짓, 사실/허구, 진본/위본, 필연/우연이 대립하는 세계에서 전자의 존재가능성을 타진해왔다. 그 가능성 없음 앞에서 ‘가면’을 쓰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의 환멸이 초기작들의 형식을 ‘포스트모던’하게 만들었다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이후의 소설들은 ‘포스트’의 문자적 의미 그대로 ‘좌절 이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좌절 혹은 단절 이후 소설 속 인물들은 독해 불가능한 세계의 양면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커다란 의문 부호”와의 대면을 기점으로 인물들의 삶은 단절된다. 그 기점은 최근에 출간된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서 케이케이의 죽음으로(「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죽기 직전 대학생의 눈빛으로(「내겐 휴가가 필요해」), 엄마가 죽던 날의 노을로(「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연인의 아버지를 죽이게 된 사건으로(「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 변주된다. 이러한 사건들, 그로 인해 품게 되는 질문들은 전에는 볼 수 없던 세계를 보게 하고 이로써 독해 불능의 세계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은 마치 실재계의 구멍을 들여다본 것처럼, 혹은 세이렌의 노래를 들은 것처럼 상징계적 질서와는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관측이 불가능한 암흑물질, 삶의 절정이 드리운 그림자, 흔적, 유령들이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다. 작가는 이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하 「네가 누구든」)에서 사진작가의 입을 빌려 “무슨 일인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 순간, 예전으로는 되돌아 갈 수 없다. 그게 바로 내가 아는 리얼리티다”라고 썼다. 리얼(real), 즉 실재가 드러나는 순간, 예전으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사건을 경험한 이들은 비로소 세계란, 또 그 속에서의 삶이란 “모순에 가득 찬 것인 동시에 논리적인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하나의 존재론적 상황 안에서의 삶은 내재적으로 충만한 논리에 의해 설명될 수 있지만 그 상황을 벗어난 바깥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모순에 가득 찬 것일 수밖에 없다. 사실 스핑크스의 질문에 인간이라고 답했던 오이디푸스도 그 질문의 진의가 실은 “아침에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점심에는 어머니와 결혼하며 저녁에는 장님이 되어버리는 자는 누구인가?”였으며 그 답이 바로 자기 자신이었음을 알게 되자 스스로 눈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왕이었던 세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기점으로 테베의 오이디푸스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로 단절된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장님이 되어 세계를 떠돈다. 김연수의 인물들 또한 어느 ‘순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낯선 도시를 떠돈다. (…) 그러니까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시간에 늦는다고 말하며 그 교차로를 지나가던 그 순간부터. 푸른 신호등이 노란색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빨간색으로 옮겨가던 그 짧은 순간부터. 그로부터 그의 삶은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205쪽) 그 순간 이후 “기븐 네임도, 패밀리 네임도 기억하지 못하는 처지”가 된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이하 「웃는 듯 우는 듯」)의 그는 이국의 도시에서 알렉스를 만나 그의 일을 대신하게 된다. 알렉스의 일이란 리 선생의 사랑 이야기를 『레드 스타』란 잡지에 매호 다르게 게재하는 것이었다. 리 선생 또한 삶의 단절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매번 다르게 씀으로써 삶의 연속성을 찾고자 했다. 그러면서 “합리적으로 자신의 삶을 설명하려는 생각이 결국에는 새로운 현실을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결국 인생이란 리 선생의 공책들처럼 단 한 번 씌어지는 게 아니라 매순간 고쳐지는 것, 그러니까 인생을 논리적으로 회고할 수는 있어도 논리적으로 예견할 수는 없다는 것. 리 선생 자신이 쓰는 이야기도 매 시기 달랐으니, 그가 쓰는 이야기와 알렉스가 쓰는 리 선생 이야기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세계의 끝 여자친구』, 224쪽) 이렇게 보면 삶이란 “모순에 가득 찬 것인 동시에 논리적인 것”이라는 말은, 삶의 순간 순간은 모순에 가득 찬 우연의 연속이지만 그것을 논리적인 이야기로 재구성할 수는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사후적인 구성은 삶에 대한 해석적 개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무죄를 증명하고픈 욕망이든 낭만적인 사랑으로 재구성하고픈 욕망이든 반복적인 개입을 통해 삶의 ‘진실’이라 할 만한 것이 만들어진다. 알렉스는 매번 다르게 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리 선생이 구원받는다고 했지만, 「내겐 휴가가 필요해」의 전직형사는 책을 읽으며 과거를 회고할수록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해석적 개입으로서의 삶-이야기는 삶-실재로부터 멀리 가지 못 한다. 언어가 실재 그 자체를 지시할 수는 없다 해도 반복적인 재현을 통해, 이야기의 중첩을 통해 그 실루엣을 드러낼 수는 있다. 그리하여 십년 동안 매일 도서관에 나와 책을 읽었던 전직 형사, 고문당해 죽어가던 대학생의 마지막 눈빛을 잊을 수 없었던 전직 형사는 바다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석적 개입이 죽음만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새로운 첫 문장을 만들어내면서 단절된 삶을 연결시킨다. ‘연결’은 김연수 소설의 키워드라 할 만한데, 이는 한 개인의 삶의 지속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개인과 개인의 소통을 의미하기도 한다. 둘 중 무엇이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야기이다. 아이를 잃었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통역사 혜미의 삶은 아이를 잃기 전의 삶과 연결되고, 케이케이를 잃은 ‘나’의 삶과 연결된다.(「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이하 「케이케이」) 사진작가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엄마를 잃기 전과 후의 나의 삶이 연결되고, 여자친구 ‘미아’를 잃었던 김경식의 삶과 연결된다.(「네가 누구든」) 연결된 이야기는 중첩되어 교집합을 만든다. 무수한 이야기들이 겹치고 겹쳐서 만들어낸 교집합. 작가 김연수는 거기에 지금-여기의 ‘별빛’이라 부를 만한 진실, 혹은 실재 같은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네가 누구든』에서 ‘나’의 할아버지가 지니고 있었던 여자의 나체 사진이 서로 겹쳐 놓았을 때만 특수한 아우라를 발산하는 것처럼 무수한 개인들의 이야기는 서로 중첩됨으로써 보편이면서도 특수한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 각 개인은 ‘진실’을 보게 되고 죽음 혹은 타인과 같은 타자와 연결된다. 이렇게 김연수가 하는 이야기는 모두 “따지고 보면 같은 이야기”가 된다. 오이디푸스 이야기처럼 사건을 통해 단절되고 이야기를 통해 연결된다. 그 이야기는 1991년 5월이 될 수도(『네가 누구든』), 조선시대의 박지원이 될 수도(「쉽게 끝날 것 같은, 농담」), 6·25가 될 수도(「뿌넝숴」) 있다. 그런데 왜 하필 1930년대 만주의 이야기인가? 『밤은 노래한다』는 2004년 4회에 걸쳐 《파라21》에 연재했던 것을 4년여의 개고 기간을 거쳐 2008년에 출간한 것으로 착상 및 자료 조사는 훨씬 오래전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지고 들어가자면 소설가가 되기로 작정한 무렵부터 그 모티프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1930년대 만주의 무엇이 작가를 그토록 매료시킨 것일까? 3. 이방인의 삶, 밀입국자의 언어 두 눈을 잃은 오이디푸스는 낯선 세계를 떠돌다 아테네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곳이 이방인으로서 들어설 수 있는 곳인지를 묻는다. 오이디푸스가 그 문턱에 서서 이방인의 자격으로 질문을 던짐으로써 들어갈 수 있는 자와 들어갈 수 없는 자로 나누는 ‘경계 있음’이 드러나게 되는 장면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현실 생활을 엄격하게 분할하고 있는 ‘국경’의 존재처럼 이러한 경계들은 언제나 있으면서도 이방인의 도래와 같은 예외적 상태에서만 그 실체를 드러낸다. 1930년대의 만주는 이방인들이 모여 질문을 던지는 문턱과 같은 공간이다. 나라를 잃은 조선인들은 중국땅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다. 조선 민족으로서 조선 혁명을 이루고자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국 혁명을 외쳐야 했던 그들. 중국 공산당에 의해 일제의 스파이 ‘민생단’이라는 누명을 쓰고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그들. 결국에는 서로가 서로를 민생단으로 몰아 죽고 죽일 수밖에 없었던 그들. 그들이 ‘거기 있음’으로 인해 민족 혹은 국가와 같은 경계, 역사가 만들어낸 ‘경계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해석적 개입을 하는 작가는 역사를 쓰되, 그 공백과 틈을 이야기하게 된다. 역사는 이미 말해진 이야기이므로 공백과 틈을 통해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쓰는 것이 작가에게 남겨진 몫이다. 작가 김연수가 1930년대 만주를 주목한 이유는 ‘그때-거기’의 시공간이 역사의 공백이며 거기 있던 조선인들은 그 누구라도 될 수 있는/없는 공집합과 같은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국적 없는 민족으로서 일제라는 집합에도 중국이라는 집합에도 속하지 않지만 거꾸로 언제나 일본이나 중국, 또는 그 어떤 나라의 부분집합으로도 호명될 수 있는 존재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1933년 여름, 유격구에 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누구인가? 하지만 이 물음의 정답은 없다. 그들은 조선혁명을 이루기 위해 중국혁명에 나선 이중 임무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은 중국 구국군이 일본군에 패퇴한 뒤에도 끝까지 투쟁한 가장 견결하고 용맹스런 공산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였던 동시에, 한편으로 일단 민생단으로 몰리게 되면 제아무리 고문해도 절대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던 일제의 앞잡이들이었다. 누구도, 심지어는 그들 자신도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밤은 노래한다』, 213쪽) 역사가 만들어낸 거대한 공백을 이야기함으로써 “그들 자신도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했”던 만주의 조선인에게 이름을 부여하려 했던 시도가 바로 『밤은 노래한다』이다. 민생단이라는 이유로 같은 민족을, 아니 동고동락을 같이 한 유격구의 동지를 죽인 자라면, 그렇게 살아 남은 자라면 「내겐 휴가가 필요해」의 전직형사나 「웃는 듯 우는 듯」의 리 선생처럼 사건의 반복적 재현을 통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 들 것이다. 『밤은 노래한다』 역시 살아남은 자 김해연이 ‘만주 조선인’의 무죄를 증명하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일제의 앞잡이, 민생단으로 오해되었다. 오해된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주어가 생략된, 명사 위주의 문장으로 이뤄진 밀입국자”의 언어를 사용한다. 밀입국자의 언어란 행위에 대해 주체가 될 수 없는 타자의 언어이다. 알렉스는 리선생의 이야기만 들으면 “구토가 치민다”고 하는데, ‘그’는 “그건 어쩌면 리 선생의 영어가 불완전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알렉스의 태도는 타자의 언어를 재현해야하는 재현-작가의 난감함을 보여준다. 주어가 생략된 언어에 누가, 어떻게 주어를 부여할 것인가. 스피박이 타자 재현의 (불)가능성을 말했듯이, 그것은 불가능한 문제에 가깝다. 주어를 부여하는 순간 타자는 타자 아닌 것이 되고, 주어는 더 이상 타자를 지시하는 언어가 되지 못 한다. 김연수 소설의 이방인-타자들 또한 자신이 주어가 되는 언어를 가지지 못한 채 소통의 대상으로만 존재하고 있다. 「모두에게 복된 새해」의 인도인은 ‘나’의 집에 들어서도 되는지 오이디푸스처럼 묻지는 않는다. 다만 “사트비르 싱이라는 이름의 인도인이 집으로 찾아온다는 얘기를 미리 전해들었”던 ‘나’가 문을 열고 들어선 인도인을 당황스러워했을 뿐이다. 오이디푸스는 물었고 사트비르 싱은 묻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방인이고 그들과 ‘나’ 사이에 문턱이 있음은 다르지 않다. ‘나’의 당황스러움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싱과 ‘나’ 사이에 낯설고도 어눌한 대화가 오갈수록 그들은, 아니 정확히 말해 ‘나’와 ‘나’의 아내는 문턱을 넘어 연결된다. 인도인은 그들을 연결했지만 여전히 낯선 타자로 남는다. 「네가 누구든」에 나오는 자이니치 김경식과 스웨덴 국적의 ‘미아’처럼 김연수의 소설에는 꽤 많은 이방인이 등장한다. 그들을 통해 ‘나’와 사진작가는 연결되지만 그들은 끝내 연결되지 못 한다. 스웨덴으로 떠난 ‘미아’가 점차 한국어를 잊어버림에 따라 김경식과 ‘미아’의 소통은 단절된다. 김경식은 “우리는 더 이상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졌어요. 사람이 서서히 눈이 멀어가는 것, 그게 아니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서서히 죽어가는 것, 그런 느낌과 아주 비슷해요.”라고 말한다. 김연수의 소설은 이야기를 통한 소통과 연결을 설파하고 있지만 정작 그 이야기를 연결해주는 중간자-타자는 연결되지 못 한다. 이를 알고 있는 알렉스는 “우는 듯 웃는 듯” 탑승구를 향해 걸어가고, 남은 ‘그’는 “어둠 속 첫 문장들 속으로 걸어”간다. 이것이 작가의 운명일 것이다. 타자 재현의 (불)가능성 앞에서 포기하거나, 지속적인 개입 속에 찾아질 첫 문장을 붙들고 글쓰기를 계속 하거나. 김연수가 후자 쪽에 서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불가능을 알고도 ‘세계의 끝’까지 가고자 하는 작가에게 주어진 ‘성숙한 낙관’이란 평가에 동의할 수 있는 것이지만, 타자에게 어떠한 주어를 부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반도의 역사가 만들어낸 가장 큰 공백이자 틈이라 할 만한 ‘만주 조선인’의 삶을 썼지만 아직 그들에게 적합한 이름을 명명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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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화가 류하완 |
4. ‘나’ 혹은 ‘그’의 이야기 김연수는 한 인터뷰(김연수·황종연(대담), 「사람 사이의 소통을 위한 이야기꾼」, 《문학동네》 2007 겨울)에서 『네가 누구든』의 화자에 대해 말하면서 지금 시대에는 전지적 시점이 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눈이 없는 시대에 어떻게 역사를 해석하는 혹은 사건을 해석하는 전지적 시점을 사용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여기서 ‘바깥’ 없는 세계, ‘별빛’ 없는 세계에서의 소설의 운명을 직시하고 있는 작가 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보편으로서의 ‘별빛’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개인들은 “상상하는 만큼 보게” 되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게 되는데 이렇게 저마다의 ‘자기’들이 공존하는 세계에서는 전지적 시점은 있을 수 없고 다만 그 세계를 관찰하고 편집하는 또 하나의 ‘자기’가 있을 뿐이다. 그것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나’이다. 이러한 시대 편집자적 지위에 있는 작가에게 전지적 시점은 가능하지 않다. 『밤은 노래한다』에서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나’이다. 또하나의 ‘자기’일뿐인 ‘나’는 1930년대 만주에 살았던 조선인, 그들이 겪은 민생단 사건에 대해 해석적 개입을 하지 못한다. 다만 관찰하고 주석을 달 수 있을 뿐. 그런데 작품의 도입부와 말미에는 ‘그’가 등장한다. 마지막에 가서 최도식을 죽이기 위해 찾아가는 ‘그’는 그때까지 ‘나’로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던 김해연이지만 도입부의 ‘그’는 김해연이 아니다. 도입부의 ‘그’는 토비인지 공비인지 모를 무리들에 의해 호송인지 호위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대우를 받으며 왕우구 쪽으로 걸어갔던 자이다. ‘그’는 만주에 사는 조선인이라면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그’를 1930년대 만주의 보편인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작품 말미에서 김해연을 ‘그’라고 칭한 것은, 이제 김해연이 만주의 보편인이 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일 터, 보편인으로서의 김해연은 최도식을 죽이지 못한다. 개인으로서의 김해연은 최도식을 죽임으로써 인생의 한 시기에 있었던 사건을 마무리지을 수 있을 테지만, 보편인으로서의 김해연은 역사의 공백과 같은 시기를 살아가며 변절한 조선인으로도 보이지 않는 정보원으로도 살 수 있었던 최도식을 죽이지 못한다. 보편인이 된 김해연이 최도식을 죽이는 것으로 작품이 마무리되었다면 1930년대 만주라는 사건적 장소의 의미는 봉합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사건적 장소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죽이지 못한 것은 아닐까. 사건에 대한 해석적 개입은 기존의 의미에서 벗어난 새로운 이름을 사건에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1930년대 만주라는 사건에 해석적 개입을 할 수 있었다면 그 이름으로 최도식을 죽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밤은 노래한다』의 결말은 봉합하지 않음으로써 사건에 대한 개입의 여지를 남겨 놓은 것인가, 아니면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명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행동하지 못했던 것인가. 『밤은 노래한다』에서 ‘그’가 등장한 이유는 작가가 지향하는 ‘삼인칭의 세계’와 관련이 깊다. 김연수는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작가 후기에서 “일인칭. 나. 내 눈으로 바라본 세계. 이제 안녕이다”라고 썼다. 또 인터뷰를 통해서도 “지금 내 소설에서 중요한 건 삼인칭을 들여오는 일”이라고 했다. 물론 여기서의 삼인칭은 위에서 말한 전지적 시점이 아니라 ‘일인칭 화자를 내포한 삼인칭’ 정도의 의미이다. 이는 무수한 ‘자기’들의 세계를 쓰지만 거기서 시대의 보편자를 찾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겠는가. 또 다양한 ‘자기’들의 세계에 ‘나’의 관점으로나마 개입하겠다는 작가의 윤리의식으로도 볼 수 있다. ‘자기’라는 다자의 세계에서 일자로서의 진리는 지양하겠지만 사건적 진실, 사건에 다가서는 과정으로서의 진실은 버리지 않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바디우가 말한 사건에 개입하고자 하는 ‘충실성’, 진리에 다가서고자 하는 충실성이 될 수 있다. 아직은 ‘그’가 작품의 말미에서 최도식을 죽이느냐 죽이지 않느냐 정도의 개입을 할 수 있을 뿐이지만, 작가가 충실성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의 개입은 더 집요해지고 넓어질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밤은 노래한다』가 ‘그’-‘나’(김해연)-‘그’(김해연)로 서술주체의 변화를 보이는 것은 「설산」의 ‘그’-‘나’와 관련이 깊다. 『밤은 노래한다』가 ‘나’의 이야기인 반면 「설산」은 ‘그’의 이야기인데, 사실「설산」의 ‘나’와 ‘그’는 서로 또다른 ‘자기’일 뿐이어서 ‘그’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얼마든지 치환 가능하다. 『밤은 노래한다』는 ‘나’가 보편자의 지위에 가까이 감으로써 ‘나’와 ‘그’의 이야기가 치환 가능해진다. 여기서 ‘그’의 자리가 커질수록 전지적 시점에 가까워질 텐데 작가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나’와 치환 가능한 수준에서만 서술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별빛’ 없는 세계에서 소설이 지향할 수 있는 한계이다. ‘그’를 별빛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시선으로 본다면, 지금-여기에서는 그러한 별빛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작가의 시대 인식이고 그래도 별빛을 찾고자 한다는 것이 작가의 윤리 의식이며 그것은 ‘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작가 김연수의 대답인 셈이다. 따라서 ‘나’의 이야기는 언제나 또 다른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1930년대 만주의 김해연은 1991년 5월의 ‘나’가 될 수도(『네가 누구든』), 조선시대의 박지원이 될 수도(「쉽게 끝날 것 같은, 농담」), 6·25에 참전한 중국 인민지원군(「뿌넝숴」)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나’의 이야기는 환유적인 자리바꿈을 통해 개별자로서의 특이성을 잃는 대신 인간으로서의 보편성을 가지게 된다. 김연수의 소설이 “따지고 보면 같은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밤은 노래한다』를 포함한 김연수의 작품들은 어느 시대 어느 곳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리스 비극과 유사하게 인간 존재의 보편적인 질문을 품게 된다. 그 대신 ‘1930년대 만주’와 같은 사건적 특이성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나’-‘그’로 서술주체의 변화를 주면서 타자에게 적합한 주어를 찾고자 했지만 그것은 어느 시대 어느 곳의 주어도 될 수 있는 것이므로 ‘1930년대 만주’의 주어가 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만주에 사는 한, 사람을 죽이게 될 것”이라는 나카지마의 말은 만주의 특이성을 담고 있는 듯하지만 결국 ‘한 개인의 운명’이라는 보편성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별빛’ 없는 세계에서 소설이 갖는 한계일 수 있다. 특이성과 보편성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바로 서사시적 세계일 것이다. ‘보편’ 없는 세계에서는 각각의 특이성만을 보여줄 뿐인데, 이러한 ‘보편’ 없는 세계에서 보편성을 추구하는 소설은 어떤 모습일까. 『밤은 노래한다』는, 나아가 김연수의 소설은 그 질문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5. 따지고 보면 같은 이야기, 특수한 보편의 이야기 김연수 소설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낸 것으로 보이는 『네가 누구든』이 그 원제가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이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 ‘나’와 정민, 정민의 삼촌, ‘나’의 할아버지, 이길용/강시우, 칼 하프너/헬무트 베르크의 이야기는 각각의 특수한 개인의 이야기인 동시에 서로 얽혀있는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그 이야기를 통해 할아버지의 시대와 ‘나’의 시대가 연결되고 칼 하프너의 공간과 ‘나’의 공간이 연결된다. 기록된 역사의 틈에 존재하는 수많은 개체들의 삶이 마치 유령처럼 지금-여기에 있는 특수한 ‘나’에 깃들어 있다고 유령작가 김연수는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김연수의 소설은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공동의 역사와 떨어져 있지 않고 기록된 역사를 쓰면서도 누락된 개인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존재. 이것은 ‘별빛’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특수한 보편’(singular universal)으로서 작가 김연수가 찾아낸 ‘별빛’이다. 이렇게 보면 닫힌 세계의 공백을 드러내고 해독 불가능한 텍스트의 틈을 찾아내는 윤리적 작가의 충실성은 보편 속에서 특수를, 특수 속에서 보편을 읽어내는 행위라 할 수 있겠다. 김연수는 『밤은 노래한다』에서 ‘1930년대 만주’라는 특수성을 통해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보편을 말하고자 했다. 그러나 『네가 누구든』이 존재적 특수성을 겹쳐 놓음으로써 시대의 보편을 말하고자 했다면 『밤은 노래한다』는 사건적 특수성을 그리면서 보편적 존재자를 찾고자 했다는 점에서 두 작품의 체감은 달라진다. 김연수의 화두가 존재론인 만큼 무수한 존재들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진 『네가 누구든』이 저마다의 빛으로 가득한 풍성한 밤하늘을 바라보는 느낌이라면 『밤은 노래한다』는 어둠만이 가득한 밤이다. 그 어둠, 공백, 결여에서 밤의 노래가 들려온다. 그 노래는 아름답긴 하나 풍성하진 못하다. 1930년대 만주의 섬세한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있으나 그때-거기의 무수한 개인들의 이야기로 풍성하게 채워지지 못함으로써 ‘특수한 보편’의 노래가 되지 못했다. 그때-거기에도 있고 지금-여기에도 있는 이야기가 되긴 했지만 그러면서 민생단 사건의 특수한 맥락이 흐려졌고 ‘1930년대 만주’의 보편자가 되기에 부족한 ‘그’는 그 사건적 특수성을 명명하지 못했다. 다만 행동하는 ‘손’, 노래를 듣는 ‘귀’와 같은 추상적 보편을 찾아냈을 뿐이다. 우리가 영국더기 언덕에서 찍었던 그 사진이 생각나요. 그러니까 멀리서 몸을 뒤척이며 흘러가던 강물들. 눈송이들처럼 떨어져 내리던 봄의 하얀 꽃잎들. 십자가를 향해 구불구불 이어지던 영국더기의 언덕길. 사진 속에 찍힌 그 모든 것들은 내가 더없이 아끼던 보물들이었고, 내게 필요한 건 오직 그게 보물이라는 걸 알아보는 단 한 사람뿐이었어요.(『밤은 노래한다』, 324쪽)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야 공개되는 이정희의 편지에는 보물들에 대한 전언이 담겨 있다. 그녀는 세상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보물들을 보았고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단 한 사람을 원했다. 세이렌의 목소리와도 같은 이 편지는 낮의 세계에 속해 있었던 한 남자를 유혹해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죽음에서 되살려 상처를 치유하고 행동하게 하기도 한다. 상처의 치유는 연인의 죽음이라는 사건 이전과 이후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일이었고 타인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었다. 연결과 소통이라는 동어반복은 김연수의 소설에서 앞으로도 계속될 것처럼 보인다. 그의 ‘여자친구’는 ‘세계의 끝’에 있으므로.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김연수의 소설을 계속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번엔 또 어떻게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써 내는지를.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