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훈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 읽기
1. 꿰매고 붙이는, 소설
현대는 늘 새것으로 채워지는 시대이다. 새것이 출현할 때 이전의 것은 옛것이 되어 물러난다. 현대는 늘 새것이 출현하지만 그만큼이나 늘 옛것들로 채워지는 시대이다. 옛것들로 채워진다는 것은, 달리 말해 버려진다는 말이자 누구도 다시 찾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는 신상품과 쓰레기가 동시에 양산되는 시대이다. 어쩌면 남들보다 먼저 새것을 만들어내지 않을 거라면, 오히려 남들이 찾지 않는 옛것을 다시 쓰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하나의 지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누군가는 소설을 쓴다. 그리고 우리는 마케팅을 공부한 사람이 이제는 도서관 서고에 박힌 이야기들을 모아 소설을 꿰매 쓰기도 하는 것을 본다. 타인에게 새로운 욕망을 창출하고, 그들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편승해 또 다른 욕망을 창출해야 하는 사람이, 이제는 누구도 찾지 않는 문장들의 무덤을 뒤지고, 그것들을 기워서 소설을 쓴다. 그 사람이 바로 소설가 최제훈이다. "인간의 상상력이 감히 미치지 못하는 속도로 무한히 재창조되는 현실 속에서"(79쪽), 최제훈은 고전의 명예훈장을 받고 퇴직한 소설들을 경력직이란 이름으로 다시 현장에 복귀시킨다.
『퀴르발 남작의 성』은 최제훈이 2007년 등단 이후 발표한 일곱 개의 단편들과 에필로그격으로 추가한 단편 하나를 묶어 수록한 그의 첫 소설집이다. 그의 소설에서 현실과 가상은 서로의 꼬리를 물거나, 평행선을 달리다가 어느 순간 매듭을 묶는다. 또 메마른 현실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가상이 현실의 벌어진 틈을 봉합하기도 한다. 최제훈은 이러한 현실과 가상의 관계맺기를 통해 훼손된 고전을 복원하고 서사의 빈 곳을 채워 쓴다. 또 그는 조각난 서사들을 기워 그 위에 자신의 이야기를 겹쳐 쓰기도 한다. 고전과 그것의 재구성, 그리고 현실과 가상의 다양한 관계맺음이 최제훈의 바느질을 거쳐 다채로운 서사적 옷을 입는다. "전통 소품을 사용하면서도 화사한 색으로 깜찍하게 코디하는 게 특징"인 최제훈의 소설은, "고유의 클래식한 멋을 살리면서 개성을 발휘"(이상 160쪽)한다. 이러한 최제훈식 소설창작 방법론을 범박하게 '다시 쓰기'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시 쓰기'의 소설창작을 통해 소설가 최제훈이 기획한 것은 무엇일까, 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그가 소설을 통하여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고, 그럼에도 다 말하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의 소설에서 무엇을 읽고, 무엇을 읽지 못할까. 첫 창작집은 작가가 작품활동을 통하여 구현하고자 하는 작품세계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글은 최제훈의 첫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을 읽음으로써 최제훈 소설이 들려주는 말을 귀담아 듣고자하는 작은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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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박재웅·화가 |
2. 우리가 듣지 못하는, 말
최제훈의 소설은 빈번히 가상과 현실을 꿰매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서사적 재구성은 작가와 작품 사이의 역전된 관계를 드러낸다.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부터 보자. 이 소설은 셜록 홈즈가 왓슨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로서, 홈즈가 코넌 도일의 자살사건을 조사하는 과정과 그 결과를 담고 있다. 추리작가 코넌 도일은 자신이 창조한 인물인 홈즈를 폭포에 빠져 죽은 것으로 처리하여 수많은 독자들의 항의를 받게 되고, 결국 죽은 홈즈를 되살려 낸다. 이것은 현실이 가상에 개입한 경우이다. 이러한 사실을 전복하여, 이 소설에서는 허구적 인물인 홈즈가 자신을 창조한 코넌 도일의 자살사건을 조사한다. 이것은 가상이 현실에 개입한 경우이다. 즉 이 소설은 현실이 가상에 개입하고, 가상이 현실에 개입하는 상호 개입을 특징으로 한다. 여기에는 창조주와 창조물의 위계적 관계, 원인과 결과의 순서를 교란시키려는 서사적 욕망이 잠재되어 있다.
코넌 도일의 「빈집의 모험」을 모티프로 하여 다시 쓴 이 소설은 허구적인 인물이 자신을 창조한 작가의 죽음을 조사한다는 발상을 보여주는데, 특히 역설을 사건 전개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 홈즈는 깃펜, 벽난로, 아령, 덧문의 흠집, 핏자국 등의 단서들을 바탕으로 사건에 대한 완벽한 추리를 보여주지만, 곧 그러한 단서들이 모두 코넌 도일의 함정이었음이 밝혀진다. 홈즈는 "너무 깔끔한 진행을 의심했어야"(66쪽) 함을 후회하게 되는데, 홈즈가 추리에 실패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가 잘못된 추리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완벽한 추리를 했기 때문이다. 또 홈즈는 아령에 매달린 국자를 코넌 도일이 자신을 속이기 위해 조작한 가짜 단서라고만 생각하다가, 정작 그 가짜 단서가 코넌 도일이 자신에게 보내는 사건 해결의 결정적 단서였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여기에 추리가 성공적이기 때문에 추리에 실패한다는 역설, 추리를 교란시키기 위한 가짜 단서가 정작 사건을 해결할 결정적 단서라는 역설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설이 가리키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코넌 도일과 홈즈 사이의 유사성, 다시 말해 창조자와 창조물 사이의 유사성이다. 이 사건은 코넌 도일이 짜놓은 트릭에 홈즈가 걸려들고, 코넌 도일이 제공한 단서의 참의미를 홈즈가 정확히 알아차릴 것이라는 점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다. 그리고 사실이 이러할 때, 코넌 도일이 홈즈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단순한 '도전장'이나 '단서'가 아니라 '편지'이자 '유서'가 된다.
두서없는 상념에 빠져 있다 보니, 자신의 죽음을 미스터리로 만들고 나를 끌어들인 의도가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더군.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누군가가 그 미스터리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고뇌에 대해 다만 숙고해 주기를 바랐던 걸세. 자기 피조물의 죽음에 광분하는 수많은 대중이 아닌, 코넌 도일의 죽음을 차분히 되새겨줄 단 한 사람. '셜록 홈즈에게', 그 암호문은 도전장이자 그의 유서이기도 했어. 자살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고 유일한 독자는 셜록 홈즈였지.(74쪽)
왜 홈즈만이 코넌 도일의 유서를 읽을 유일한 독자인가. 그것은 오로지 홈즈만이 사건을 해결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코넌 도일은 자신의 메시지를 단순히 '탐정' 홈즈에게 보낸 것이 아니라 '읽을 수 있는' 홈즈에게 보낸 것이다. 즉 자신의 메시지를 온전히 이해할 사람은 자신이 창조한 인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코넌 도일이 홈즈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유서이면서 편지이고, 달리 말하자면 자신에게 되돌아온 편지이자 부치지 않은 편지이기도 하다. 자네트 말콤에 의하면, 편지를 부치지 않고 간직하는 행위는 편지의 가치를 모를 수도 있는 실제의 수신자 대신 환상 속의 동등한 자, 즉 편지를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다고 전적으로 믿을 만한 자에게 보내는 행위이다. 코넌 도일은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보냄으로써, 아니 편지를 부치지 않음으로써 진의의 온전한 전달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최제훈에 의해 다시 쓰인 셜록 홈즈의 추리서사가 가리키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여기서 현장은 범인을 알고 있고, 현장이 하는 말을 듣는 자가 탐정이라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최제훈에게 소설쓰기란 탐정이 사건을 추리하는 것, 다시 말해 현장이 하는 말을 듣는 것에 비유된다. 즉 최제훈에게 작가란 소설을 쓰는 자이면서, 자신이 쓴 소설이 하는 말을 듣는 자이다. 최제훈은 현실과 가상을 서로의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꿰맴으로써, 소설쓰기란 마치 '나르킷수스와 에코'의 이야기처럼 자기반영적 글쓰기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유사성 안에 이미 채워지지 않은 존재론적 차이성이 있듯이, 작가는 자신이 쓴 소설로부터 같지만 다른, 또는 더 많은 말을 들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에코는 나르킷수스의 말을 반복하지만, 이 반복은 자기가 따라하는 말을 넘어서는 반복이다. 소설은 작가가 쓴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의도하는 것 이상을 말한다. 오히려 작가는 자기가 쓴 소설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요컨대 작가는 자신이 쓴 글을 확인하는(성공) 자이면서, 동시에 자기가 의도한 것 이상의 말을 듣지 못하는(실패) 자이다. 홈즈가 코넌 도일의 메시지를 두고 "왜 자꾸 거기에 네 번째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는 예감이 드는 걸까? 아직 하나의 수수께끼가 더 남은 듯한……"(78쪽)이라고 어떤 미진함을 느끼는 것은 이러한 작가와 작품 사이의 역전된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이 현실과 가상이 상호 개입하는 양상을 보여준다면, 「그녀의 매듭」에는 현실(선택한 삶)과 가상(선택하지 않은 삶)이 혼재한다. 인간에게 현실은 진부하지만 그만큼 견고하다. 이 견고한 현실에 "오랜 이성 친구에게 사랑을 느낄 때"(83쪽)처럼 틈이 발생하면, 현실은 분열된다. 분열된 현실(가상)은 저마다의 기억을 축적해 가며 평행선을 달리다가 어느 순간 또 다른 현실과 매듭을 묶는다. 이럴 때 매듭으로 묶인 현실과 가상은 구분이 불가능해진다. 소설에서 서술자 '나'(화연)의 견고한 현실에 모두 네 번에 걸쳐 틈이 발생한다. 같은 학원에 다니는 친구(현정)가 원조교제를 하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 '나'는 대학 입시에 떨어지고 '내'가 빌려준 학원비로 공부한 현정이는 합격했을 때, '나'보다 먼저 대학에 입학한 현정이가 모두의 호감을 얻고 '나'와 같은 취향의 남자친구를 사귀고 있음을 보았을 때, 교통사고의 충격으로 정신을 놓은 '나'를 현정이가 '깨진 유리 조각처럼 반짝이던 눈빛'으로 바라보던 것을 떠올렸을 때, 틈이 발생한다. 이러한 틈을 통해 현실은 분열되고 가상이 만들어진다. 가상은 학원비를 벌기 위해 원조교제를 하는 친구의 모습을 몰래 핸드폰 사진으로 찍는다거나, 친구의 남자친구에게 그녀의 험담을 하고 그를 자신의 방에 끌어들이는 추악한 모습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삶으로서의 가상은 정작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삶이자 '내'가 무의식적으로 억압한 삶이고, 그러므로 이 가상은 또 다른 현실이다. 무의식적으로 억압한 '나'의 또 다른 삶(가상)이 어느 순간 현재를 살고 있는 '나'의 현실을 교란시킨다는 발상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처럼 역설의 추동력으로 서사가 전개된다.
화연은 지민으로부터 어릴 적 친구인 성호를 되찾기 위해서, 현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낯선 타인의 사진에 성호의 얼굴을 합성하고, 지민이 그것을 보도록 계획한다. 화연의 예상대로 지민은 성호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그러나 성호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있던 화연은, 그의 옆에 예상하지 못한 다른 여자가 있음을 알게 된다. 놀랍게도 그 여자는 화연이 임의로 사진을 조작한 바로 그 낯선 여자이다. 성호가 자기에게서 느낄 것이라고 의도한 '성숙한 매력'과 '편안함'을, 성호는 자기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느끼게 된다. 여기에 자신이 의도한 대로 일이 너무나 잘 진행되었기 때문에 결과가 자신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는 역설, 자신의 사진 조작이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에 조작된 사진이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는 역설, 그리하여 가해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피해자가 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설이 환기하는 바는 무엇인가. 화연이 현정과 지민에게 느끼는 매혹은 자신과의 유사성에 바탕을 둔다. 즉 그들이 화연의 신경을 긁는 이유는 그들과 화연의 취향이 비슷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들은 화연과 닮았으면서도 화연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존재들이다. 이러한 양상은 앞서 살펴본 작가와 작품의 관계에 그대로 환치된다. 요컨대「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에서 보여준 작가와 작품 사이의 역전된 관계가 「그녀의 매듭」에서도 반복된다. 화연은 현정에게 그녀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음을 알리고, 그녀에게 학원비를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의지에 따라 그녀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위계적 관계는 역전된다. 화연이 자신의 품에 엎어진 현정의 웅얼거림을 듣지 못하듯이, 작품은 작가에게 자신의 모든 말을 들려주지 않는다. 아니 작가는 작품이 하는 말을 온전히 읽거나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화연의 "왜 나에게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까?"(114쪽)라는 질문은 사진을 꿰매고 붙이는 자의 말이지, 자신이 만든 사진 속의 인물의 말은 아니다. 화연은 "프레임 바깥을 쳐다보고" 있는 자들을 보며, 오직 "이 애는 무엇을 보고 있던 걸까?"(115쪽)라고 질문할 수 있을 뿐이다. 작가가 작품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허상일 뿐이며, 그는 오직 자신이 쓴 작품의 모든 것을 읽지 못했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뿐이다.
앞서 살펴본 두 소설과 달리 「그림자 박제」와 「마리아, 그런데 말이야」는 메마른 현실을 견디기 위해 임의로 가상이 만들어진 경우에 해당한다. 이럴 때 가상은 현실의 벌어진 틈을 봉합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림자 박제」의 경우,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학대받은 서술자 '나'는 자신과 동일한 상황에 처한 가상의 친구를 만들어 고통스런 어린 시절을 견딘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그 친구는, '내'가 성인이 된 후 다시 찾아와 '나'의 현실에 개입한다. 요컨대 이 소설은 가상으로 봉합된 현실은 다시 가상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마리아, 그런데 말이야」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마리아, 그런데 말이야」를 살펴보자. 이 소설에는 서술자 '나'(성민)와 수연 사이에 가상의 인물인 '마리아'가 개입한다. '침묵할 수 있는 친구'를 원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이들의 삶을 봉합하는 인물이 바로 마리아이다. 성민과 수연은 마리아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서 서로의 상처 입은 삶의 틈을 메운다.
소설은 지난 봄 이혼한 남자와 올 봄 결혼할 여자가 6년 만에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된다. '새내기 이혼남과 예비 신부'는 서로의 명함을 주고받음으로써 6년의 시간을 건너뛴다. 이들은 불필요한 감정 정리를 할 필요가 없어서 서로가 편하다. 다시 말해, 이들은 마음을 주고받지 않아도 되는 사이이므로 서로에게 마음이 끌린다. 이미 결혼을 했던 사람과 이제 결혼을 하려는 사람을 연결하는 키워드는 결혼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결혼에 대해서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이들을 연결한다. 이들은 할 말이 없기 때문에 만나고, 만나기 위해서 할 말이 필요하다. 이들의 삶의 틈은 마리아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이들은 마리아에 대해서 말함으로써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서로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이 하지 않은 중요한 이야기, 그래서 더욱 회피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는 것이다. 수연은 자기를 아껴주는 사람을 겁내고, 성민은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아프지만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그래서 진정 아픈 사람들에게 가상은 곧 아픔을 숨길 수 있는 현실로 다가온다. 성민이 이혼을 원치 않는 아내의 진심을 연기로, 불륜의 상대인 록커의 허풍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사정에 기인한다. 아프지만 아프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쿨한"(224쪽)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냉정함을 과시해야 할 만큼 나약함도 지녔음을 가까스로 부인하는 행위이다. 성민과 수연은 그들 사이의 '쿨한' 관계를 위해 가상의 인물 마리아를 창조하고, 그녀를 이야깃거리로 소비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과적으로 가상의 인물인 마리아에게 지배받고 마는데, 왜냐하면 마리아가 없으면 그들의 관계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상과 현실을 꿰매어 다시 쓰는 최제훈의 소설은 작가와 작품의 역전된 관계를 보여주며, 작품은 항상 작가가 쓴 것 이상을 말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시킨다. 작품에는 작품이 말하는 것 이상의, 말해지지 못한 말이 있다. 우리는 왜 그 말을 듣지 못할까.
3. 소설이 가능한, 빈틈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을 비롯하여 이 소설집에서 흥미로운 몇몇 작품들은 설화, 고전, 문화사 등을 다시 쓴 소설들이다. 최제훈은 이러한 서사들에 덧씌워진 인간의 오해와 편견을 해체하면서 서사의 원형을 복구한다. 최제훈의 등단작이자 이 소설집의 표제작인 「퀴르발 남작의 성」은 최제훈식 '꿰맴'의 소설공학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작품이다.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소설로, 소설은 영화로, 영화는 다시 리메이크 영화로 확장되고, 그 영화는 다시 저널 기사로, 뉴스의 사건 보도로, 대학생의 리포트로, 블로거의 영화감상 후기로 가지를 친다. 최제훈은 이러한 서사들을 꿰매어 한 편의 소설로 다시 쓴다. 그런데 서사가 확장될수록 처음의 이야기는 인간의 이해관계와 욕망에 의해 고정되거나 왜곡된다. 말썽 부리는 손주에게 들려준 할머니의 전래 동화는, 자신의 무의식의 동굴을 배회하는 유령과 대면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소설로, 소설은 호러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자는 제작자의 욕망에 의해 영화로, 영화는 할리우드 진출을 앞둔 일본 영화감독에 의해 리메이크 영화로 변주된다.
처음 이야기의 모티프인 퀴르발 남작과 그 성은 그들의 욕망과 그 욕망의 투사에 의해 다양한 의미의 옷을 입는다. 그리고 옷이 덧입혀질수록 원래 이야기가 지닌 의미의 공간은 사라진다. 달리 말해, 이 소설은 서사의 무한 확장과 그로 인한 풍요로움을 보여주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서사적 확장이 정작 이야기가 말하지 못한 말을 가린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소설 속 벙어리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리메이크 영화를 만든 일본 감독에 의해 "언어를 잃어버린 현대인의 남루한 영혼"(19쪽)으로 규정되고, 반공주의 저널 기자에 의해 "공산주의 치하의 반체제 인사에 대한 가장 적절한 비유"(39쪽)로 의미화된다. 소설은 마지막 부분에서 확장된 모든 서사의 가장 처음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다양한 해석의 옷을 입은 서사의 이면에 숨겨진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남자가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일어섰다. 성으로 향하는 길과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고개를 돌려 멀거니 한 번씩 바라보았다.
"일어나. 어서 가자구."(45쪽)
1697년 6월 9일, 프랑스 크뢸리에서 르블랑 부부는 딸 카트린느를 데리고 퀴르발 남작의 성을 향한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르블랑은 '어디로' 가자고 말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다양한 시간과 장소에서 서로 다른 인물들의 장면을 연출하며 인물의 내면과 욕망을 드러내면서, 정작 모든 이야기의 기원인 1697년을 다룬 장면에서는 철저히 외적 초점화의 서술로 일관하여 인물의 내면을 숨긴다. 즉 르블랑이 가자고 한 곳이 '어디'인지는 말해질 수 없고, 그 '어디'는 읽는 자의 욕망의 투사일 뿐이며, 그런 면에서 항상 미진함이 남는 읽기에 그칠 뿐이다. 이 소설은 겉으로는 서사가 다양하게 확대 변용되는 과정을 통하여 인간적 욕망과 욕망의 비인간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그것만으로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한다.
「퀴르발 남작의 성」이 서사의 다양한 확장을 병렬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처음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이야기가 말하지 못한 말을 들으려 한다면,「괴물을 위한 변명」은 인간에 의해 말을 빼앗긴 괴물의 이야기를 통해 말할 수 없는 것의 소리 없는 말을 들으려 한다. 메리 셸리의 소설『프랑켄슈타인』을 다시 쓴 이 소설은, 원작에는 드러나 있지 않은 괴물의 최후에 대한 질문, "괴물은 어떻게 되었을까?"(235쪽)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최제훈은 소설에서 괴물에게 투사한 인간의 오해와 편견을 해체하여, 왜곡되고 훼손된 괴물의 본모습을 복원하려 시도한다. 최제훈은 인간이 괴물을 소비하기 위하여 그에게 이름을 붙이고, 인간의 언어를 배운 괴물을 벙어리로 만들고, 범죄자의 뇌를 이식받았다는 근거를 내세워 그에게 괴물의 낙인을 찍는 과정을 추적한다. 그리하여 괴물이 태어날 때부터 버려졌음을, 괴물이 사랑받고 싶어 인간의 언어를 배웠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인간에 의해 훼손된 서사는 괴물이 창조자로부터 버림받은 것은 단지 "흉측하게 생겼다"(247쪽)는 이유 때문이고, 목숨을 걸고 소녀를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는 것도 그가 지닌 끔찍한 외모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이 괴물을 타자화하고 배제한 과정을 추적하는 최제훈의 시선은, 역으로 괴물은 흉측하게 생겨서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괴물을 흉측하게 본 인간의 시선 때문이고, 괴물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은 인간의 닫힌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괴물은 괴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괴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우워∼ 우워∼ 우워워∼"(243쪽)라는 괴성은, 괴물의 말을 뺏은 인간의 폭력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함께 드러낸다. 흥미롭게도 최제훈의 분신인 서술자 '나'는 원작의 저자인 메리 셸리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여, 그녀가 수집한 "실제 자료와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고백 사이에 벌어진 틈새"(249쪽), 즉 두 개의 서사가 말하지 못한 말을 듣기 원한다. 그러나 셸리는 '나'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다. "좋을 대로 생각하세요"(250쪽), "그 사람도 말 못할 사정이 있었겠죠", "답이 왜 필요하죠?"(이상 252쪽) 등의 셸리의 대답은, 진실을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인 저자마저도 작품에 대한 모든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제훈은 두 서사의 말해질 수 없는 틈새에 자신의 생각을 겹쳐 이야기를 다시 쓴다. 괴물의 이야기에 빅터의 이야기가, 그 위에 월턴 선장의 이야기가, 그 위에 샤빌 부인의 이야기가 겹쳐지고, 여기에 서술자 '나'의 이야기가 겹쳐지는 셈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중요하다. 최제훈은 낭만주의의 산물인 메리 셸리의『프랑켄슈타인』을 고전주의적으로 재해석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동생 에르네스트는 형과 괴물의 행적을 따라 이동하며 사건 현장을 조사하고 증거를 수집한다. 그리고 증거에 근거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 가족과 친구를 죽인 것은 형이고, 괴물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결론짓는다.
"재밌는 이야기로군. 아주 재미있어. 헌데 이상하네그려. 그러니까 자네 이야기에 따르면, 프랑켄슈타인 그 친구가 광기에 사로잡혀 사랑하는 가족들을 차례로 죽이면서, 자네 하나만은 건너뛴 게로군."(266쪽)
그러나 에르네스트의 결론에 대해 월턴 선장은 가족들이 모두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으로 에르네스트만 살아남았음을 지적한다. 결론의 치명적 허점은 바로 그 결론을 내린 사람의 존재에 있었던 것이다. 이성과 합리를 무기로 형의 낭만적 이야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겹쳐 쓴 에르네스트는 자기 자신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빈틈으로 존재함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요컨대 이야기의 빈틈에 또 다른 이야기를 겹쳐 쓸 때, 빈틈은 메워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빈틈을 드러낸다. 그럴 때 빈틈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이지만, 오히려 더 많은 말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가 된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가 지닌 독/약이다.
인간 언어의 타락과 그 극복에 대한 최제훈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소설이 바로「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이다. 마녀를 서술자로 내세워 마녀사냥에 대해서 다시 쓴 이 소설은 「괴물을 위한 변명」과 마찬가지로 "어설픈 악당"이나 "악마의 하수인"(이상 161쪽)으로 타자화된, 마녀의 정체성이라는 텅 빈 기원을 향해 서사가 진행된다. 최제훈은 이 소설에서도 마녀라는 기표에 투사된 인간의 불안과 욕망을 해체한다. 그는 그러한 해체의 시작을 인간과 마녀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존했다는 점"(167쪽)에서 찾는다. 즉 먼 옛날 인간과 마녀는 서로 공존하면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마녀의 정체성을 향해 나아가는 서사는 곧 인간의 언어가 타락하는 과정에 대응된다. 벤야민에 의하면, "언어는 창조하는 무엇이고 완성하는 무엇이며, 언어는 말씀이고 이름"이다. 그는「창세기」를 인용하며 "인간의 정신적 본질은 창조를 담당하는 언어"라고 말한다. 세상은 신의 말씀으로 창조되고, 인간은 사물을 명명함으로써 신의 창조를 계속한다. 그러나 명명함으로써 완전하게 인식하는 아담의 말은 선악에 대한 지식인 "인간의 말"로 타락한다. 이 소설은 언어가 지닌 존재수립의 기능이 어떻게 타락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명명함을 통해 없던 것을 생기게 만드는 목적의 언어는, "마녀다!"(165쪽)와 같은 타자를 배제하는 수단의 언어로 타락한다. 마녀사냥의 원인에 대한 학자들의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심리적 분석"(164쪽)들은 원인을 밝히기는커녕 도리어 가려 버린다. 최제훈은 배제의 말이자 분석의 말인 인간 언어의 틈을 역설로써 드러낸다. 이 소설은 역설로 가득 차 있다. 마녀사냥꾼으로 명성이 높았던 매튜 홉킨스가 "마녀를 밝혀내는 그의 '귀신 같은' 솜씨"로 인해 도리어 마녀로 몰리고, "악마에 씐 연기를 하며 신부가 자신들에게 마법을 걸었다고 고발"(이상 163쪽)한 수녀들이 연극이 끝난 뒤에도 광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마녀라는 죄목으로 처형된 피해자들 대부분"(181쪽)이 인간이었다는 사실 등은, 마녀사냥꾼이 마녀사냥을 당하는 역설, 꾸며낸 거짓이 현실이 되는 역설, 마법은 마녀가 아니라 인간이 부린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최제훈은 타락한 인간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빈틈을 드러낼 수밖에 없고, 그것을 메우는 말은 또 다른 빈틈을 만들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에게 언어가 지닌 그 빈틈은 이야기를 무한하게 담을 수 있는 공간, 즉 소설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소설은 그 빈틈을 통해 타락한 인간 언어의 모순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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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박재웅·화가 |
4. 책을 덮은 후 듣는, 말 작가는 소설을 쓰는 자이면서 자신이 쓴 소설을 가장 먼저 읽는 자이다. 최제훈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더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셜록 홈즈가 사건 현장을 조사하듯이, 무엇보다도 소설이 하는 말을 잘 들으려고 노력한다. 혹시 그는 읽기 위해 쓰고, 듣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최제훈의 소설을 읽으며, 소설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 확인하고 생각해 본다. 그것은 소설은 가장 포용력이 넓은 장르이고, 우리는 그 공간에서 타자의 이야기를 읽고, 거기에 나의 이야기를 겹쳐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소설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분명히 내 이야기도 받아들여질 공간이 있다. 우리는 이야기를 읽고 들으며 풍족해지고, 다 듣지 못한 이야기가 있어 우리를 머뭇거리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니 우리는 내가 다 들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듣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최제훈은 소설의 포용력과 소통가능성을 이해하고, 또 그러한 소설적 특징을 가장 잘 활용하는 작가 중의 한 명이다. 이제 최제훈에게 던지는 마지막 질문이 남았다. 최제훈은 잊혀진 설화, 고전, 문화사 등을 현재에 다시 소환하여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겹쳐 쓴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시 쓰기를 통해 최제훈이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가 단순히 현재를 읽기 위한 대상이자 서사적 확장의 소재로만 활용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소환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지금 당장 듣기는 어렵다. 그 대답은 최제훈의 소설이 하는 말이 완결되었다는 가정된 시간이 도래할 때에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를 통해 그 대답의 실마리를 짐작해 보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소설집의 에필로그격으로 실린 이 소설은 한 권의 소설집을 감싸는 테두리의 역할을 하면서 앞으로 쓰일 미래의 소설들과 현재의 소설들을 묶는 매듭의 역할을 수행한다. 소설집 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퀴르발 남작의 성에 모여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는 것이 소설의 내용이다. 허구의 인물들이 모여 또 다른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발상이 최제훈의 소설답다. 그러나 독자가 책장을 덮은 후에 자기들끼리 모여서 파티를 한다는 이러한 설정이 그리 단순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설정은 독자의 독서행위를 통해 작품과 독자가 의사소통을 한다는 전통적인 독서이론을 넘어서, 독자가 책을 읽지 않는 순간에도 작품 스스로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책장이 덮여 있는 시간에, 작품이 하는 말이 들리지 않는 시간에 소설 속 인물들이 등장하고, 모두가 자신의 말을 발언한다. 그들은 자신의 팀원이 보이지 않는다고 팀원을 찾기도 하고, 각자의 개성껏 중구난방 떠들어대지만, 누구도 이야기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최제훈이 소설 다시 쓰기를 통해 지향하는 세계가 바로 이런 장소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들려오는 말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해 본다. 책을 덮은 이후에 작품이 하는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작품과 소통한다는 것은, 책을 덮고 난 이후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라고.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