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의 마지막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까지의 긴 여로를 몇 줄의 문장으로 요약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시의 시작점이자 모어였던 진주를 고향이라는 그리움에게 물려줄 때까지, 전 세계의 폐허를 전전하며 발굴해낸 무수한 고향들을 다시 자연이라는 아득함에게 돌려줄 때까지, 허수경은 지난한 시적 변모의 과정을 감행해 왔다. 제1시집 당시, 동시대 독자에게 ‘주모적 여성’으로 이해될 때 모두 해명되지 않던 “아낙들의 눈물”(「남강시편3」)이 제5시집에서 “나의 어머니는 꼬치구이였다”(「카라쿨양의 에세이」)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13페이지의 장시로 심화되어 발현될 때까지, 그는 모계를 통해 전해져 오는 오랜 폭력의 역사를 응시하고 증언한 시인이기도 했다. 폐허 도시의 지층 속 상흔을 발견해낸 고고학적 발굴의 시간을 거쳐, 물에 잠긴 도시들을 하나씩 호명하던 순간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예정된 미래를 향해 직선으로 나가는 근대적 시간관을 역행하여 “뒤로 가는” 시적 여로의 끝에 마지막 시집에서 허수경이 도달한 곳은 문명의 지층 가장 아래, 최초의 기억 이전의 기원의 시간이었다. 오랜 과거이자 도래할 미래인 이 ‘자연’의 시간에, 폭력의 세계에 대한 비관 속에서도 시인이 잃지 않았던 “나지막한 희망”의 자리가 있다. 그리고 그곳에 오랜 당신과, 고향이 있다.
자연이라는 오랜 불가능
마지막 시집에서 자연은 ‘자연물’로서뿐만 아니라 ‘자연’ 그 자체로 시의 전면에 등장하기에 이른다. 이 자연은 인간의 편안한 거주처도 아니고, 문명의 대립항이나 현실의 초월로서의 자연은 더욱 아니다. 이 자연은 시인의 오랜 ‘당신’과 엉클어져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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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조미형 작가 |
당신 보고 싶다. 라는 아주 짤막한 생애의 편지만을 자연에게 띄우고 싶던 여름이었다 ―「레몬」 부분
자연을 과거시제로 노래하고 당신을 미래시제로 잠재우며 이곳까지 왔네 ―「이국의 호텔」 부분
생각해 보니 꽃이나 당신이나 모두 노래의 그림자였군요 치료되지 않는 노래의 그림자 속에 결국 우리 셋은 들어와 있군요
생각해 보니 우리 셋은 연인이라는 자연의 고아였던 거예요 울지 못하는 눈동자에 갇힌 눈물이었던 거예요 ―「그 그림 속에서」 부분
이 “자연”은 차원적 공간이나 관념이 아닌, 시적 실체로 작용한다. 여기에서 자연은 당신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편지의 대리 수신자이며, 노래의 대상이 된다. 또한 나, 당신, 꽃이 동등하게 상실한, 그리하여 셋을 우리로 묶어주는 근원이기도 하다. 이 자연은 폐허 도시의 발굴자로서 시간의 지층 가장 아래에 마주하게 되었던 심원(深苑)인 동시에, 도래할 빙하기로서의 세계의 전망이며, “꽃”이라는 자연물을 매개 삼아 순간을 환기하는 ‘현재의 없는 근원’, 우리를 고아로 만든 ‘파양한 부모’가 된다. 이 자연은 무엇인가? 무엇으로 자연인가? 어째서 자연인가?
포도나무의 시간은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습니까 그 시간을 우리는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이라고 부릅니까
지금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무엇으로 불립니까 ―「포도나무를 태우며」 부분
불타는 포도나무 앞에서 시적 화자는 포도나무의 시간과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을 분리하여 사유할 수 있는가 묻는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고 가정한다면,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은 앞서 말한 ‘자연’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이어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포도나무가 생겨난 후 무수한 포도나무가 세계에서 생멸하며 형성된 역사의 시간, 지층의 시간이다. 여기에서 지금 시적 화자가 마주한 불타는 나무는 포도나무의 시간과 별개로 존재하며, 포도나무의 역사로도 자연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현재의 시간, 물질과 몸의 시간이다. 불타는 포도나무의 입장이라면,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자연의 고아”라고 진술할 테다. 하지만 여기에서 시적 화자는 그 분리 가능성을 확언하지 않으며 각각의 시간에 대한 명명을 질문으로 갈음한다. 이 유보된 명명과 지연된 순간의 허공에서 “빛과 공기의 틈에서 꽃이 태어”났듯(「그 그림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이 탄생한다. 이 시(詩)공간에서는 ‘우리’의 자연으로부터의 소외가 ‘자연물’로부터의 소외로 이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허수경의 시는 “불타는 포도나무의 시간” 위에 쓰여진다. 이 영원과 같은 고통을 육체로 겪어내는 찰나, 불가능했던 모든 재회가 가능해진다. 우리가 자연의 고아라는 건, 역으로 우리가 한때 자연과 가장 친연했음을, 당신과 내가 자연 아래 하나의 혈연이었음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 몸속의 오렌지, 세계 바깥의 오렌지
앞서 이야기했듯 그의 시에서 자연은 지금 이곳에 부재한다. 당신과 나는 자연에서 비롯하였으나 자연으로부터 파양되어 흩어졌기 때문이다. 갈 수 없는 근원인 이 자연은 허수경의 ‘고향’ 의식이 더욱 심화하여 발현된 ‘회복할 수 없는 에덴’이다. 이 상실한 고향은, 그러나 ‘자연물’을 통해 현재의 공간 위에 얼핏 실루엣을 드러낸다. 특히 이 자연물은 오랜 시간 숙성된 그리움의 정서와 호응하여 계절에 따른 순환의 특성을 가진 ‘열매’의 이미지로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2부에 수록된 시들은 모두 「딸기」, 「레몬」, 「포도」, 「오렌지」, 「목련」 등과 같은 ‘열매’나 ‘꽃’을 나타내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이 열매들이 무엇을 환기하는지 살펴보자.
당신이 오는 계절 딸기들은 당신의 춤에 얼굴을 묻고 영영 오지 않을 꿈의 입구를 그리워하는 계절 ―「딸기」 부분
달이 뜬 당신의 눈 속을 걸어가고 싶을 때마다 검은 눈을 가진 올빼미들이 레몬을 물고 향이 거미줄처럼 엉킨 여름밤 속에서 사랑을 한다 ―「레몬」 부분
먼 사랑처럼 기어이 휘어지면서 오이가 열리든 말든 ―「오이」 부분
열매들이 올 거다 네가 잊힌 빛을 몰고 먼 처음처럼 올 거다 ―「포도」 부분
이 열매의 이미지는 그리움의 대상인 ‘당신’, 혹은 “먼 사랑”과 함께 등장한다. 이 열매들은 “먼 처음”, “먼 사랑”과 같은 과거의 시간을 환기하는 현재의 이미지다. 동시에, “먼 처음처럼 올”, 혹은 “영영 오지 않을” 미래를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을 이 열매가 엮어주고 있다. 두 사람이 약속을 위해 걸었을 새끼손가락 고리처럼 말이다. “꽃”과 “나”와 “당신”이 “자연이라는 연인의 고아”였다고 진술했듯(「그 그림 속에서」) 이 시편들에서도 ‘열매(꽃)’를 바라보며 ‘나’는 필연적으로 ‘당신’의 기억을 호출하게 된다. 이곳에 부재하는 당신과 먼 사랑의 기억이 ‘열매’를 통해 시작된다. 이 열매는 근대적 자연관에서의 주체와 대립하는 질료적 대상이 아닌, 주체와 호응하여 과거에 대한 현재의 불가능성, 재회 불가능성을 시에서 (찰나이지만) 극복하게 만드는 매개이자 배경이 된다. 열매가 열리고, 당신으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 어떻게 이 열매가 불가능한 재회를 가능하게 만들었는지, 그 열매의 모나드가 시 「오렌지」에 잘 나타나 있다. 잠시 좁은 걸음으로 살펴보자.
우리의 팔은 서로에게 닿으면서 둥글어졌다 묘지 근처 교회당에서 울리던 종소리처럼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 안았다 우리의 검고도 둥근 시간, 그리고 그 옆에서 오렌지 나무 하나가 흔들거렸다
(중략)
오렌지 나무는 아무 말 없이 녹빛 그늘의 눈을 우리에게 주었다 단단한 잎은 번쩍거렸다 나는 너에게 둥글게, 임신 말기의 여름에 열리던 아주 둥근 열매처럼 단 한 번만 더 와 달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잘가, 라고 말하는 순간 깊숙한 고요는 얼마나 너를 안고 빛의 아이를 낳고 싶어하는가 나는 모른 체했다 그것이 오렌지가 열리는 여름에 대한 예의였다 오렌지 안으로 천천히 감기고 있는 너의 눈꺼풀을 나는 보았다 ―「오렌지」 전반부
“우리의 팔”이 “서로에게 닿으며 둥글”어져 결국 포옹하게 되는 과거의 “둥근 시간”에 이 시는 시작한다. 그리고 그 최초의 순간엔 마치 혼례의 증인처럼 “오렌지 나무 하나가 흔들”거리고 있다. 이 둥근 포옹의 모티프는 이후 “둥글게, 임신 말기의 여름에 열리던 아주 둥근 열매처럼 단 한 번만 더 와 달라”고 당신에게 재회를 요청하려다 단념하게 되는 장면에서처럼, 여름으로 순환하는 오렌지의 둥근 열매의 계절이 되어 시적 화자에게 부재하는 당신을 환기한다. 최초 ‘포옹’의 모티프는 오렌지를 통해 “임신 말기”의 둥근 산모의 배로 분화하여 오렌지가 열리는 계절인 여름의 빛과 결합해 “빛의 아이”의 이미지로 심화된다. 그러나 “잘 가”라고 말하는 이별의 순간에 찾아온 “빛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욕망을 “이 삶을 집어 치”울 수 없는 화자는 모른 체하게 된다. “몸은커녕 삶도 추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추상화가 아니었다 우리는 내일이라도 이 삶을 집어치우면서 먼 바다로 가서 그늘로 살 수도 있었다 언제나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몸은커녕 삶도 추상화가 아니어서
몸속 황금빛 동굴에는 반달 같은 오렌지 조각이 깨어져 있다 여린 껍질 속, 타원형 눈물들이 촘촘히 박혀 시간의 마지막 빛 아래에서 글썽거렸다 우리는 여름 속에 들어온 푸름이 아니라 푸름의 울음이었다 ―「오렌지」 중반부
이후 시적 화자는 그의 몸속의 “황금빛 동굴”에서 “반달 같은 오렌지 조각”을 발견한다. 너와 나의 포옹의 외부에 있던, 그러나 포옹의 둥글음과의 유사성을 통해 그 포옹을 증거하던 오렌지가 너의 부재 끝에 마침내 나의 ‘몸속’에서 발견되기에 이른 것이다. 나―당신―오렌지의 삼각관계에서 당신을 매개하던 오렌지가 내 몸속에서 발견될 때, 이 오렌지는 기존의 서정시가 가진 원관념―보조관념 유비의 종속적 틀을 벗어나 그 자체로 하나의 시적 주체가 되어 스스로를 변주해 나간다. 이 자연물은 더 이상 관조의 대상이 아니며 무엇을 대체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이 몸으로 혹은 기억이 자연으로 전도되는 것이 아니다. 이 시집 전반에서 여러 시를 통해 반복적으로 드러나듯, 내면의 자연과 외면의 자연이 언어를 통해 교호(交互)작용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행에서 시적 화자는 “우리는 여름 속에 들어온 푸름이 아니라 푸름의 울음이었다”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여름이라는 시공간 속 ‘푸름’이라는 일순간 현현하는 속성이 아닌, 푸름의 ‘울음’이라는 보다 근원적 존재가 되어 현실세계에서의 재회불가능성을 시의 공간에서 제한적이나마 극복하게 된다. 내 “몸속”에서 오렌지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우리의 몸은 추상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재회할 수 없는 물질의 세계가 시적 화자의 내면을 투사하는 시의 세계로 치환된다.
잘가,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난다면 어떤 춤을 추면서 너와 나는 둥글어질까, 여름의 장례식, 우리는 오래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우리는 오렌지의 영혼을 팔에 안으며 혼자서 둥글어졌다 잘가, 원점으로 어두워가던 너의 발이여, 오렌지빛의 소풍이여 ―「오렌지」 후반부
그러나 이 순간적 재회는 완전하지 않고, 다시 이별의 순간, 즉 “여름의 장례식”이 찾아오게 된다. 이곳에서 우리는 서로가 아닌 “오렌지의 영혼을 팔에 안으며 혼자서 둥글”어진다. 오렌지의 영혼’을 포옹하며, 오렌지 열매라는 자연물이 현현해내는 그리움의 순간을 “오렌지의 영혼”의 시간, 즉 “원점”의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제례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자연의 고아”였던 우리는 이제 “여름의 장례식”에 와 있다. 여름이라는 시간에서 분리된 “오렌지의 영혼”이라는 ‘시간의 낙과’를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기 위함이다. 최초의 “오렌지 나무”는 여름의 “오렌지 열매”, 몸속의 “오렌지 조각”을 거쳐 이제 “오렌지의 영혼”이 된다. 상실을 배태하여 다시 상실하는 이 기이한 생명력으로 시인은 몸속의 오렌지와 세계 밖의 오렌지가 만나는 기수지(汽水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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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조미형 작가 |
자연의 고아, 시간의 낙과, 우주의 난민
이 자연은 ‘바람’, ‘태양’,‘열매’ 등의 자연물의 이미지나 자연현상으로 뿐만이 아닌 시간과 공간이 되어 시적 사건이 일어나는 배경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얼어붙은 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내 속의 할머니가 물었다, 어디에 있었어? 내 속의 아주머니가 물었다, 무심하게 살지 그랬니? 내 속의 아가씨가 물었다, 연애를 세기말처럼 하기도 했어? 내 속의 계집애가 물었다, 파꽃처럼 아린 나비를 보러 시베리아로 간 적도 있었니? 내 속의 고아가 물었다, 어디 슬펐어?
(중략)
하지만 무언가, 언젠가, 있던 자리라는 건, 정말 고요한 연 같구나 중얼거리는 말을 다 들어주니
빙하기의 역에서 무언가, 언젠가, 있었던 자리의 얼음 위에서 우리는 오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처럼 아이의 시간 속에서만 살고 싶은 것처럼 어린 낙과처럼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악수를 나누었다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내 속의 신생아가 물었다, 언제 다시 만나? 네 속의 노인이 답했다, 꽃다발을 든 네 입술이 어떤 사랑에 정직해질 때면 내 속의 태아는 답했다, 잘 가 ―「빙하기의 역에서」
빙하기는 선사시대 인류가 문명을 이루기 전 찾아왔던 과거이며, 또 계절과 같이 도래할 미래의 기후이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빙하기는 시에서 ‘역’이라는 문명의 공간을 감싸고 있다. 제4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에서 문명적 시간이라 할 수 있는 “청동으로 된 시간”이 땅 속의 “감자”가 자라는 자연의 시간과 분리·병치되어 제시되었던 것과는 달리 이 시에서는 하나로 결합되어 나타난다. 이 “빙하기의 역”에서 우리는 “얼어붙은 채” 불가능한 재회를 한다. 앞선 시 「오렌지」의 시적 화자가 몸속에서 “오렌지”를 발견했듯, 이 시에도 “내 속”의 여러 화자들이 너에게 말을 건넨다. 이 화자는 “할머니”로부터 시작해 “아가씨”와 “계집애”를 거쳐 “고아”로 시각을 역행하는 순으로 나뉘어 모든 시간에 걸쳐 너와 해후한다. 이곳이 모두에게 잊힌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이고, 우리가 세계로부터 벗어난 “얼어붙은”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시간이 펼쳐진다. 과거―미래―현재의 우리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곳의 이별은 한 번의 헤어짐으로 종결되는 사건이 아니게 된다. 모든 시간의 내가 너를 상실하는 과정이며, 거듭 이별의 시간을 되풀이하며 이별이 곧 해후가 되는 것이다.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선형적으로 진행되는 “청동의 시간”으로부터의 탈주는 우리의 “믿을 수 없는 악수”를 가능하게 해준다. 빙하기라는 자연이 불가능한 시간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얼어붙은 시적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빙하기의 역은 ‘역’이라는 흔적이 말해주듯 문명 이전 원시의 자연공간이 아닌 “무언가, 언젠가 있었던 자리”의 얼음 위다. 또한, 이는 기독교의 과거―현재―미래의 직선적 시간관을 계승하여 미래와 진보에 대한 긍정을 그 특징으로 하는 근대적 시간관에서 제시하는 미래로부터의 탈주이기도 하다. ‘어린 낙과’인 우리는 세계의 열매인 동시에 싹을 틔워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없는 ‘어린’ 고아이기 때문에 다시 함께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이 오래된 에덴에서 마지막 이별의 순간 “잘 가”라 작별을 고하는 건 나의 근원에 가장 가까운 “태아”의 순간이다. 제4시집에서부터 문명의 지층을 거꾸로 파 내려가며 발견한 전쟁과 폭력의 상흔을 드러내며 대결해온 인류의 세계를 시인은 이제 오래된 미래인 자연의 세계로 다시 환원한다.
태양은 나를 오늘도 고아로 남겨두었다 노을로 부풀어 오르는 저녁을 던져주고 태양은 떠나가고 고아였네, 우리는 반나절의 그리고 영원의 고아 시간의 실을 양 떼의 무심한 먹이와 바꾸던 고아 ―「지구는 고아원」 부분
하얗게 남은 인간과 짐승의 뼈가 널린 황무지 자연을 잡아먹는 것은 자연뿐이다 ―「아사 餓死」 부분
그들은 없는 이들 보이지 않는 자연의 천사 나뭇잎이 떨어진다 의지 없이 기억 없이 ―「그 그림 속에서」 부분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자연의 고아”인가? 시간과 자연은 어째서 우리를 파양하고 이곳에 남겨두는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자연은 스스로를 우리에게 열어 보이며 우리에게 그 원래 자리인 근원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근원에 닿을 수 없는 시간 속 필멸의 존재들이기에, 자연은 우리에게 끝없이 펼쳐보이는 현상들 속에서 기억과 회상이라는 그리움으로 우리를 밝히고 떠나간다. 우리는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 위의 존재로 남아 우두커니 영원의 고아가 된다. 고아라는 상흔 위에서 너와 나는 비로소 우리가 되는 것이다. 허수경 시에서 꽃, 열매, 포도나무, 태양 등의 여러 자연물들은 이 자연이 발현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를 “자연의 고아”라고 고백할 때의 자연은 스스로를 감추며 본래의 자리인 근원으로 돌아간다. 이 양가적 사랑의 세계에서 시인은 은폐하는 자연 속으로 돌아가지 않고, 기억과 회상의 그리움의 자리인 고아의 자리에 남기를 자처했다.
너는 왔는데도 없구나, 새롭고도 낡은 세계 속으로 나는 이미 잃어버린 것을 다시 잃었고 ―「너, 없이 희망과 함께」 부분
하늘에 구멍이 뚫릴 때 청년이 아직 가슴에 피를 흘리면 우주의 난민이 되어 구멍으로 들어가고 있었네 ―「죽음의 관광객」 부분
우리의 현재는 나비처럼 충분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곧 사라질 만큼 아름다웠다 ―「레몬」 부분
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 살고 싶다 ―「농담 한 송이」 부분
은폐된 자연 속으로 돌아감이 아니라 고아로 머무름에 허수경 시의 미학이 있다. “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 “사라져도 좋을 만큼 살고 싶다”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는 불멸의 욕망도, 사라짐의 미학도 아닌, 허공을 껴안은 채 사라질 만큼 살아가며 ‘머무름의 미학’이다. 이 머무름의 자리는 “흰 빛의 마라톤을 무심 지켜”보아 “나는 사라지고 /시인은 탄생”(「눈」)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 “몇백년 동안 되풀이된 항의였던 희망”(「너, 없이 희망과 함께」)이 있고, “타들어가는 포도나무”가 있으며, 이곳에서라면, “당신을 위해서라면 모든 세상을 속일 수 있었다”(「레몬」)고 늦은 고백을 할 수 있다. 허수경에게 시인의 자리는 고아의 자리, “곪아가는 낙과”(「나의 가버린 헌 창문에게」)의 자리이며, “우주의 난민”(「죽음의 관광객」)이 지켜야 할 자리였다. 그리하여 이 세계의 고아를 자처하여 머무를 때, 시인은 오랜 당신인 세계에게 천진하게 물음을 던질 수 있었다. “지구여 네 바깥에는 태양 빛 별들이 / 고아로 남겨져 있는가?” (「나의 가버린 헌 창문에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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