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명 : 모빌리티 사회,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 -김숨론 『떠도는 땅』
성 명 : 김유림


1. 떠도는 인간, 공유지의 딜레마

태생적으로 떠나야 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첫발을 디딘 자리는 허공이다. 허공에 뿌리내려 방향 없이 흔들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동 여정이 얼마나 걸리는지조차 헤아리지 못한다. 어쩌면 영원히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존재로 이 세계에 남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간인가요? 그들의 질문은 땅에 도달하기 어렵다. 자본과 권력이 잠식한 세계는 떠도는 질문에 둔감하다. 김숨 소설 『떠도는 땅』은 ‘사이 공간’에 부유하는 자들의 목소리를 현실 세계로 호출하는 이동 매체의 한 양식이다.

모빌리티(mobility)는 이동이 활발한 현대사회의 현상에서 태동한 개념으로 일차적 의미는 ‘이동’이다. 이동은 물리적으로 공간과 장소를 매개하는 특성상 사회의 다층적인 문제와 연관성을 갖는다. 존 어리(John Urry)는 모빌리티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실천 인프라와 이데올로기의 집합이며 계급, 젠더, 민족, 국민, 연령에 따른 사회적 결속과 같은 문제와 강요된 정착과 강제적 이동까지 복잡한 맥락으로 얽혀 있다고 진단한다. 이는 이동이 일반화된 현대사회에서 모빌리티가 단순히 물리적인 이동이나 이주의 함의를 넘어 사회의 다양한 관계와 의미, 그리고 실천적인 문제를 포괄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현대사회의 모빌리티 현상을 유동성 공포로 인식한다. ‘고-모빌리티’ 시대 글로벌리즘은 자본의 불균형을 초래했으며 전쟁, 테러, 범죄, 폭력을 양산했다. 국가 재난으로 떠돌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이동 권리 박탈이다. 특히 대규모 인구의 집단 이동을 제한하거나 이동을 강제하는 사례는 사회 집단공동체의 삶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다. 과거 역사를 볼 때 주로 전쟁 동원, 식민 약탈 디아스포라 집단의 추방에서 피해가 발생했다. 비단 과거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에서도 전쟁에 인적 자원을 동원하거나 난민을 구금하고 추방하는 사례는 빈번하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며, 전쟁 난민은 이동, 또는 이주를 감행하다 죽임을 당하거나 추방당한다. 모빌리티 권리는 일부 특권층에 편중되어 있다. 상대적 약자는 이동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벌거벗은 생명으로 떠돈다.

난민을 포함하여 경제 취약 계층에게 이동은 생존의 문제다. 모빌리티 자유 박탈은 생명을 빼앗겠다는 의미와 같다. 이른바 ‘새모빌리티 패러다임’은 과거 이동의 비극이 남긴 잘못된 역사, 관행을 바로잡아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자는 것이다. 존 어리의 사유를 직관할 때, 새모빌리티 패러다임은 근대국민/민족국가 담론에 이의제기이며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의 유목주의와 상응한다. 정체(停滯)는 없고 오직 창조와 변형의 과정만 존재한다는 유목 사유는 예술의 본질이다. 인간과 기계(사물)의 ‘공-진화’ 관점은 이동성이 범람하는 현대사회와 포스트 휴먼 시대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창구가 될 것이다.

『떠도는 땅』은 리얼리즘 재현 문학으로 집단 이동의 비극이 남긴 민족 수난사를 다룬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러시아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하루아침에 생활 터전을 빼앗기고 추방당한다. 등장인물 27명은 경제 취약계층으로 ‘이동적 삶’이 몸에 밴 존재다. 그들은 생계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러시아 국경을 넘는다. 희망을 품고 이주한 사람들은 러시아에 도착 후에도 각지를 떠돌며 소작농, 지게꾼, 어부로 전전한다. 맨손으로 버려진 땅, 불모지를 개척하여 어렵게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나 러시아 정부는 징벌적 세금 부과, 토지 소유 제한 등의 차별 정책을 시행한다. 한인들은 정부의 부당한 조치를 감내하며 러시아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착의 꿈은 이루지 못한다.

금실은 다섯 살 때 아버지 길동수를 따라 러시아 국경을 넘는다. 한인들을 일본 첩자로 몰아가는 러시아 사회 분위기에 라즈돌나야강 주변에서 12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다 17살 되던 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거처를 옮긴다. 이후 금실은 근석과 결혼하여 신한촌(러시아 한인 집단거주지)에 정착한다. 근석은 봇짐장수로 간도, 연해주, 만주 일대 접경지를 떠돈다. 금실은 한곳에 정착하기를 원하지만, 근석은 떠도는 삶을 고집한다.

“난 땅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 땅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지.”(…)

“땅! 땅에 화가 나!”(102쪽)

땅에 얽매여 사는 삶은 육체를 타고난 존재자의 숙명이다. 땅에 화가 난다는 근석의 진술은 디아스포라의 영원한 타자성에서 기인한다. 근석은 한인 2세로 조선말보다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그 사회 문화가 익숙한 사람이었으나 러시아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차별적 대상자가 된다. 더구나 소비에트 정부의 콜호스(집단 농장 체제) 도입으로 땅의 개인소유는 불가능해졌다. 공유지의 비극은 모두에게 접근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가 이를 전유하고 다른 사람들이 공동으로 가진 권리를 부정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근석은 누구보다도 정착 욕망이 강했으나 민족 차별, 인종차별의 벽을 넘지 못한다. 근석의 정착을 가로막는 요인은 영토를 토대로 생성된 국민/국가라는 본질주의다. 땅은 자연을 포함한 생명체를 가진 모든 존재가 누려야 할 공공의 자산임에도 불구하고 국가 권력이 전유물로 취급하면서 불평등의 산물이 된다.

근석이 장사를 떠난 후 추방 명령이 내렸고 부부는 영영 생이별한다. 금실은 만삭의 몸으로 친정아버지 길동수, 시어머니 소덕과 함께 이주 열차에 올랐으나 뿔뿔이 흩어져 생사조차 알지 못한다. 강제 추방은 가족 이산, 민족 이산의 비극으로 남았다.

황 노인은 열다섯에 국경을 넘는다. 넓은 땅에 미래 희망을 걸었고 홀로 러시아로 이주하여 북간도 일대를 떠돈다. ‘백두산 아래 내두산, 연길, 안도현, 용정, 왕청현, 도문, 훈춘을 돌아 무작정 흘러든 데가 러시아 그레데코보’이다. 근근이 돈을 모아 신민증을 얻었고 블라디보스토크, 하코다테, 페트로파블롭스크 항구를 지나 캄차카 어장에서 연어잡이 어부로 생계를 이어간다. 각지를 전전하다 신한촌에 정착하지만, 강제 이주 명령을 받고 다시 ‘뿌리 뽑힌 존재’가 된다.

“흘러가는 건 구름이 아니라 땅…… 그때 내 나이가 아홉 살, 아버지하고 밭을 갈고 있는데 땅이 흔들렸어. 아버지도, 나도 맨발이었어. ‘아버지, 땅이 흔들려요.’(…) 아버지가 말했지. ‘두더지가 땅 밑으로 지나가서 그렇다.’ 땅이 계속 흔들렸어…….”(159쪽)

황 노인이 아홉 살에 ‘흘러가는 건 구름이 아니라 땅’이라고 지각한 것은 그가 태생부터 경제적 약자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땅의 흔들림이 뜻하는 바는 첫째, 일평생 떠돌며 살 황 노인의 운명이다. 둘째,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일평생 소작농으로 살아야 하는 취약계층의 불안정한 삶의 메타포다. 그를 떠돌이 삶으로 내몬 요인은 조선의 식민지, 가난의 대물림, 생계 위기이다. 황 노인은 고향 가까운 신한촌에 묻히기를 바랐으나 죽음을 목전에 두고 강제로 열차에 실렸다. 그는 기차를 타고 이동 중에 정신이 혼미해져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든다. 사경을 헤매면서도 노인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땅이다.

“황 노인은 눈을 뜬 채 꿈을 꾼다. 그는 땅 위에 홀로 누워 있다.”

임자 없는 땅이야…….

그는 자신의 손가락이라도 부러뜨려 그것으로 땅에 울타리를 치고 싶다. 평생 임자 없는 땅을 찾아 떠돌다 마침내 땅을 찾았는데 손가락 하나 자신의 의지대로 까닥일 수 없다.

‘내 땅이야, 내 땅!’(160-161쪽)

러시아인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돌과 자갈로 뒤덮인 땅은 조선인들에게 희망이었다. 그들이 맨손으로 개척한 불모지는 ‘내 땅’이었으나 결론은 러시아 영토에 불과했다. 국가는 영토의 지배력을 행사하는 관념적 권력으로 초월 법적 대상이다. 국가 제도에 예속된 개인은 소유권뿐만 아니라 일시적 점유권마저도 주권 권력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황 노인은 땅을 빼앗기고 천길만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고 느낀다. 그의 절망감은 디아스포라의 한계를 비유하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국가 권력의 지배하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개개인의 운명을 상징한다.

떠도는 인간의 본질을 보여주는 황 노인은 새 땅에 도착하면 다양한 민족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황 노인의 지혜는 다민족 다인종이 섞여 사는 러시아 사회에서 몸으로 체득한 결과다. 공존 모색은 땅의 공공재적 특성과 맞물린다. 땅은 한정되어 있고 인간은 땅에 의존하여 살 수밖에 없다. 공존과 유대는 떠도는 사람들의 생존 방식이기도 하다. 기차에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연명한 황 노인은 카자흐스탄 모래사막에 도착하지만 굶주림에 목숨을 잃고 만다. 한편 금실은 척박한 땅에 도착하여 갈대숲에서 홀로 아기를 출산한다. 아기와 함께 굶어 죽을 위기에 직면했을 때 이방 민족 여인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이방 여인의 도움은 황 노인이 강조한 공존하는 삶의 실천 방식이다. 공존 실천은 지금 여기 혼종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로 ‘새모빌리티 패러다임’에 속한다.

그림=조미형 작가


2. 철도에 포획된 몸, 사이 공간에 부유하는 질문

이동은 인류의 오랜 생활양식이다. 현대사회의 이동성은 ‘모빌리티 테크놀로지’가 주도한다는 측면에서 과거와 차이가 있다. 철도의 등장은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차가 없었다면 러시아 정부가 대규모 인구를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지방까지 단기간에 이동시키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권력이 방대한 영토를 지휘권에 두고 통치력을 행사한 이면에는 이동 기술과 이동 기계의 역할이 컸다. 권력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된 철도의 ‘이동 능력’은 ‘권력의 능력’이 된다.

이주에 동원된 열차는 사람들이 잠시 체류하는 장소로 ‘사이 공간’이다. 이러한 장소에서는 사람, 장소, 환경에 대한 제약, 즉 부동적 네트워크 체계가 작동한다. 사이 공간의 부동성은 인간을 억압하는 양식이다. 기차에 탑승한 이주민들은 이동의 자유를 빼앗기고 열악한 환경에 방치되어 있다. 가축이나 물류를 수송하던 화물열차를 개조하여 2층으로 칸막이를 질러 3.5평 정도의 공간에 27명을 몰아넣은 형국은 흡사 포로수용소 같다. 창문은 양철 조각으로 막아 빛은 차단된 상태이며 공기의 순환도 가로막았다. 배변 시설 미비로 이주민들은 서로 옷으로 가려주면서 볼일을 봤다. 그들은 탁한 공기와 악취가 떠도는 공간에서 최소한의 인권도 보호받지 못했다. 연료 공급, 식량 배급과 식수 제공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부는 일주일 정도 먹을 식량을 준비하라는 지시 외에 목적지가 어딘지, 얼마나 걸리는지, 이주 일정 전반을 비밀리에 진행했다. 기차가 40여 일을 달리는 사이 이주민들은 시베리아의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전염병으로 죽어갔다. 기차 내부 환경은 소비에트 정부가 이주 과정에서 조선인들이 사망할 위험이 상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방치한 정황을 여실히 드러낸다. 생명 권력이 작동하는 공간에서 이주민들은 법의 제외권역에 무방비로 노출된 존재로 ‘호모 사케르’나 다름없다. 사실상 기차는 인간의 몸을 담보로 ‘모빌리티 정치’가 실행되는 공간이다.

폐쇄된 기차 공간의 끔찍한 실태와 이주를 둘러싼 의혹은 증폭되었다. 호위 대원의 강압적인 태도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으나 소년 미치카는 궁금증을 참지 못한다. 왜 조선인을 총살형에 처하려고 했는지, 강제로 이주 열차에 태웠는지, 인간이 들개처럼 버려진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자신을 둘러싼 세계 전부가 의문이다. 소년은 어머니, 안나에게 묻지만, 답을 들을 수 없다. 어른들도 자신들이 왜 추방당하는지 그 연원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정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의 존재론적 자명성은 물음을 통해 확보된다. 소년은 스스로 답을 구하려는 듯 가려진 세계를 향해 물음을 던진다.

혼혈아 미치카는 자신이 조선인인지, 러시아인지 묻는다. “모빌리티 ‘권리’를 강제하거나 제한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피부색, 종교, 민족, 문화적 실천에 근거하여 특정 집단을 낙인찍는 국가의 개입 방식과 연계되어 있다.” 소설에서 미치카는 경계인으로 디아스포라의 타자성을 드러낸다. 이후 소년은 “엄마 난 어디서 왔어요?”(109, 123쪽)라고 자신의 태생적 본질을 캐묻는다. 조선인/ 러시아인/ 혼혈인, 다만 한 인간일 뿐인 소년은 세상이 쳐놓은 차별의 덫에 단단히 걸려든 모양새다. “엄마 나도 인간이에요?”(127쪽) “난 왜 태어났어요?”(136쪽) 소년은 덫에 걸린 인간으로 태어나 고통을 받느니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참새로 태어날 걸 그랬다고 토로한다. 어른들은 고통스럽고 비참해도 참고 견뎌야 한다며 상투적인 해법을 내린다. 언제 총살형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현실과 덫에 걸린 새처럼 기차에 실려 끌려가는 소년의 질문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향한다. 존재의 물음은 방향성이 있으며 질문 그 자체로 여기에 있음을 확증한다. 소년의 물음은 현존재로서 실존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다. 실존 회복은 인간의 본성 추적으로 발현한다.

“하늘 아래 인간이 가장 추해요.”, “가장 욕심쟁이고요,”(214쪽) 소설은 인간이 가진 악한 본성을 통해 인간이, 그리고 사회와 정치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를 주문한다. 소년의 시선에서 추방당한 피해 주체와 추방을 강행한 가해 주체가 같은 인간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인간이냐’는 미치카의 절망적인 물음에 어머니 안나는 ‘그래도 엄마는 널 사랑한다.’라고 말한다. 자식을 위해 아무것도 답해줄 수 없는 무기력한 모성은 인간과 이 세계가 가진 양면성의 실체를 날것 그대로 인정하는 것뿐이다. 자아 형성기에 있는 미치카의 다층적인 물음은 개인의 정체성을 내포한 국가 정체성과 연관성이 있다.

황 노인과 소덕처럼 한인 1세대는 조선 땅에 정체성을 두고 있다. 족보를 외워 후손에게 알리고 조선인을 만나면 고향을 묻고 조상의 제사를 챙기는 등이다. 다섯 살에 러시아로 이주한 금실은 조선 땅의 ‘쑥새’를 고향으로 여기며 살아왔으나 이주 열차가 출발하는 순간 자신의 고향이 연해주라고 느낀다. 2, 3세대인 근석, 최아나똘리, 아리나는 어릴 때부터 인종차별을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조선인 피를 물려받은 자신을 혐오한다. 근석은 자식이 태어나면 뼛속까지, 영혼까지 러시아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러시아 사람이 되고 싶은 근석의 심리는 욕망의 표출이다. 조선인이 러시아인이 될 수 없고 황인종이 백인종이 될 수 없기에 근석의 욕망은 실현 불가능한 욕망이다. 근석은 불가능한 욕망, 좌절된 욕망으로 인해 정체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영원히 떠도는 존재로 남는다. 세대별 국가 정체성 차이는 삶의 기억과 애착이 있는 곳이 모국이며 고향이라는 초국가적 인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추방당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정체성 혼란에 빠진다. 기차는 이주가 일상화된 사람들의 정체성이 떠도는 공간이다.

3. 벌거벗은 영혼, 이념 담론의 해체

혁명 당시 이념을 신봉했던 조선인 대부분은 지식층이다. 올가의 남편, 강치수와 인설 형, 이고억이 대표적 인물이다. 그들은 공산주의 이념이 지향하는 사회 차별철폐와 평등이 러시아 한인들의 삶과 조선의 독립에 도움이 되리라 믿었다. 올가는 한인 3세로 강치수와 결혼하여 아들을 두었다.

강치수는 아들이 태어나자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10월 혁명의 앞 글자를 조합해 ‘멜로르’라는 이상한 이름을 지을 만큼 철저한 공산주의자다. 그는 공산주의가 표방하는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가부장적인 권위를 내려놓고 아내 올가를 한 인간으로 동등하게 대했다. 강치수의 신념 이면에는 이데올로기가 러시아 사회의 한인 차별 정책을 개선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강치수는 일본 간첩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게 될 운명에 처한다. 요셉 외삼촌은 문인으로 한글(조선어)로 ‘송아지’라는 시를 발표했다가 사상이 불순하다는 죄목으로 러시아 경찰에 끌려간다. 강치수를 비롯한 공산주의 신봉자들이 반동분자, 사상이 불순한 부르주아, 반역자라는 미명하에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거나 유배형을 선고받는 모순이 횡행했다.

러시아 정부가 지식인들에게 누명을 씌워 숙청한 이유는 추방에 반발하여 한인 집단을 선동하리라는 추측 때문이다. 강치수나 인설 형, 이고억처럼 공산주의 이념을 추종하고 혁명에 적극 가담했던 사람들은 민족 차별의 벽을 넘지 못하고 희생된다. 소비에트 정권의 지식인 처형은 권력의 폭력성과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고억은 ‘형법 58조 조국위반죄’로 체포되어 간첩 누명을 쓰고 카자흐스탄 유배형을 선고받는다. 형의 억울한 유배형에 인설은 소비에트 정부의 모순된 행태를 헌법에 빗대 성토한다. 정부에 불만은 반역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일천은 자신까지 처벌될까 두려워 인설의 비판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혁명에 몸 바쳤던 사람들은 소비에트 정부에 분노를 표출한다. 허우재는 혁명이 성공하면 땅을 나눠준다는 약속을 믿고 러시아 내전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귀머거리가 되었으나 땅을 준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으며 추방까지 당한다. 볼셰비키 혁명이 근간인 헌법은 인민을 사물화하는 통치 도구에 불과했다. 레닌과 스탈린은 초월 법적 권한을 행사하는 존재로 신격화되었고 차별철폐 평등의 가치는 바닥에 떨어졌다. 조선인들은 소수민족 탄압 정책보다 이념의 허구성에 절망한다. 조선의 독립은 요원한 일이 되었고 땅을 공평하게 분배받아 정착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도 사라졌다. 이주민들의 이념 정체성 해체는 그들의 삶을 지탱하고 있던 물질적 정신적 세계가 모두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기차에는 정부의 조치에 불만을 드러내거나 저항하는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 비밀 요원이 배치되었다. 이주민들은 일상적인 대화조차 함부로 주고받지 못했다. 공권력에 의해 모빌리티 통제가 엄격한 기차는 파놉티콘 원리가 작동하는 ‘이동 감옥’의 형태를 띤다. 이때 감옥은 전형적으로 인간의 ‘임(이)모빌리티화’를 위한 ‘장치’로 여겨진다. 기차에서 이주민들은 법을 떠나 윤리적으로 인간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배변 시설 미비 등 기차의 열악한 환경)마저도 박탈당했기 때문에 감옥에 갇힌 죄수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감옥의 원리를 인용하여 근대 권력을 비판한 미셸 푸코(Paul-Michel Foucault)는 정치가 신체 영역에 들어가 직접 신체를 공격하고 의식을 강요하고 여러 가지 기호를 부여한다고 판단했다. 소비에트는 한인들을 외딴 유형지로 이송 중에 이데올로기를 빌미로 공포정치를 강행한다. 이데올로기는 대상 인구를 임모빌리티 상태로 길들이기 위한 일종의 규율 기술이다. 규율 기술은 인민 재판으로 실체를 드러낸다.

볼셰비키 집권 후 인민 재판은 공장이나 학교, 광장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열렸으며 즉결 처형도 내릴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이 조선인들에게 씌운 죄목은 사상이 의심스러운 반동분자, 변절자, 노동자를 착취하는 부르주아였다. 정권 수립에 일조한 사람들에게 반동분자라는 죄목은 모함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소작농이나 날품팔이로 떠돌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 온 이주민들이 부르주아라는 죄목은 억지에 가깝다. 반발은 즉결 처형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의 부당한 조치에 누구도 적극적으로 대항하기 어려웠다. 권력이 죄목을 정하면 그에 준해 처벌이 가해지는 독재 정치가 기차 안에서도 횡행했다.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내면 의식을 통제하고 신체형을 집행하는 초월 법적 규율 장치라면, 기차는 물리적으로 인간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권력의 도구적 장치다.

소비에트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기차 내부는 물론 기차역, 선로 주변을 봉쇄하였다. 본래 기차역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타고 내릴 수 있는 장소다. 처음 이주 열차가 하바롭스크역에 정차했을 때 이주민들은 기차에서 내려 분뇨통을 비우고 요깃거리를 사서 허기를 달랬다. 호위 대원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빨리 기차에 오르라고 욕설을 퍼부었으나 아쉬운 대로 급한 볼일을 보며 한숨을 돌렸다. 기차역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반역자로 몰린 사람들이 처형당하면서 철도 시스템 전반이 이동 인구의 임모빌리화를 위한 처벌적 장치로 기능을 한다.

이주민들에게 죽음은 기차역 주변뿐만 아니라 기차 내부에서도 목격되는 일상이었다. 이주민 대부분이 당국의 지시에 따라 며칠 먹을 분량의 식량만 준비하였으나 이주 여정이 길어지자 굶주리는 사람이 늘어난다. 난방시설 미비와 의약품 공급도 없는 기차에서 굶주림과 추위, 전염병이 겹쳐 노약자들이 죽어갔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기차가 역에 정차하면 선로 주변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심지어 달리는 기차 밖으로 시신을 유기하는 광경도 일상이 되었다.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일상에서 목격되는 죽음은 매 순간 공포를 유발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권력이 지목하면 죄 없이도 처형당할 수 있는 현실이었다. 이주민들은 기차가 정차하면 집단 처형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기차는 ‘신체 정치’, ‘죽음의 정치’가 난무하는 공간이다. 인간의 편익을 위해 쓰여야 할 이동 기계는 인간을 사물화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그림=조미형 작가


4. 상상의 모빌리티, 이동하는 미적 양식

인문학 그리고 예술은 모빌리티를 인간과 사물의 ‘공-진화’ 관점으로 접근한다. 문학작품의 모빌리티 재현은 존재함을 실증하는 작업보다 ‘형식의 모빌리티(mobility of form)’라는 관념이 전제된다. 예술의 경험은 일상의 경험과 통합되기 때문에 문학은 그 자체로 이동하는 형식이다.

열차가 바이칼 호수 근처에 정차했을 때 한인들은 집단 죽음의 처참한 현장을 목격한다. 바이칼 호수로 탈선한 열차와 열차에 갇힌 채 끌려가던 수많은 조선인의 죽음이 그것이다. 기차 탈선 사고는 한인 이주 당시 실제 있었던 일이다. 참혹한 사고 현장은 인간이 임의로 저지른 집단 학살을 방불케 한다. 이동 수단은 인간의 삶에 편익을 제공하는 만큼 위험성도 크다. 기계, 기술이 가진 문명의 한계는 완벽한 통제가 어렵다는 데 있다. 모빌리티 테크놀로지가 인간을 대량 살상하는 정황은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이 지배하는 포스트 휴먼 시대 인류에게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허공을 향해 쇠바퀴 두 개를 쳐들고 호수에 기우듬히 잠겨 있는 기차, 만세를 부르듯 양팔을 활짝 펼치고 하늘을 향해 얼굴을 쳐들고 죽은 여자.’ 소설은 호수에 곤두박질친 기차와 젊은 여인의 죽음을 동일시한다. 기차에 탑승하는 순간부터 이동 기계는 인간과 한 몸으로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공동운명체다. 탈선 사고로 인해 수많은 죽음이 목격되면서 기차는 죽음으로 내달리는 지옥 열차가 된다.

‘기계 본성’은 기계적 몽상에 일조한다. 인간과 사물의 공진화 관점에서 ‘기계적 몽상’이 조형하는 초월적 세계가 문학의 세계다. 소설에서 인간과 함께 ‘이동의 주체’가 되는 기차는 인간의 몸과 동일시되어 내면 심리에 개입하고, 삶과 죽음의 세계를 재현한다. 소설 초반부 뿌리까지 썩은 어금니처럼 흔들리는 기차는(12쪽) 속도를 줄이면서 쟁기질에 지친 소로 변한다.(39쪽) 다시 속도를 높인 기차는 미친 망아지처럼 달린다.(139쪽) 공동묘지에서 들리는 소리와 기차 소음이 병치되면서 기차는 죽음이 머무는 묘지가 된다.(151쪽) 역에 정차했던 기차가 출발하면서 몸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작두 위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절벽 끝에 앉아 있다가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공포를 체감하면서 기차가 인간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형국을 연출한다.(152쪽) 소설은 실제 열차 사고와 이주민들의 고통스러운 모빌리티 경험을 상상 이동 양식으로 전면화한다.

“아나똘리, 이 열차는 회전목마란다. 앞으로 달리고 있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제자리를 돌고, 돌고, 도는….”(227쪽)

기차의 순환성은 회전목마가 되어 이주민들의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질곡을 조형한다. 돌고 도는 인생의 질곡은 떠돌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인간에게 주어진 일상이다. “여차하면 열차에서 아기를 낳게 생겼네. 열차에서 어떻게 애를 낳아요. 이렇게 계속 달리면 열차에서 낳아야지 별수 있어.”(68쪽) 기차에서 아기가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은 목숨이 되어 기차 밖으로 내던져진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기차는 인간의 한 생애를 표방한다. “우리가 돌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구가 돌고 있으니까요.”(239쪽) 이동 기계의 물리적 속성은 우주의 순환 운동으로 변주되어 초월적 세계를 재현한다. 이는 ‘기계적 몽상’이 가공하는 이동하는 미적 형식이다. 철도 모빌리티는 ‘이동적 삶’에 내몰린 약자들의 고통스러운 인생 여정을 보여주며 떠도는 존재로서 인간의 본질을 구현한다.

5. 목소리를 복원하는 힘, 문학의 모빌리티

『떠도는 땅』은 약자들의 떠도는 삶이 개인의 역량 부족이 아닌 사회 주권 권력의 무능과 부패, 비윤리적 통치행위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조선 후기 무능한 권력과 부패한 관료들은 일제강점기라는 비극을 양산했다. 등장인물 27명은 누구보다 삶에 충실했던 일반 백성들이다. 19세기 후반 노동력이 필요했던 러시아 정부가 이주하는 조선인에게 땅을 분배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부지런한 근성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일제의 식민 수탈로 생계 위기에 봉착한 한인들은 러시아로 이주한다. 정착을 꿈꾸며 맨손으로 불모지를 개간하여 생활 근거지를 마련하였으나 소비에트 권력에 땅을 빼앗기고 추방당한다. 실제 역사를 참고할 때 사회차별과 불평등을 양산하는 주체는 주권 권력이다. 한인 강제 이주는 스탈린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알려져 있다. 권력자 한 사람이 대규모 인구의 ‘생살여탈권’을 행사한 것이다. 이는 권력자의 인식이 사회 공동체의 삶을 한순간 비극으로 내몰 수 있다는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인뿐만 아니라 당대 러시아 지주들도 콜호스에 반대하다 대거 처형당했다.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을 통해서도 사지에 내몰린 병사들과 국민의 비참한 일상을 목격할 수 있다. 권력의 정치 논리 앞에서 상대적 약자인 국민은 영원한 ‘호모 사케르’로 남는다.

약자들의 생존은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소설은 기차에서 부족한 양식을 나눠 먹고 어둠이 부유하는 공간에 돌아가면서 촛불을 밝히는 행위를 통해 집단연대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금실은 이웃한 소수민족 사람들과 서로 돕고 우의를 다지며 살았다. 집단연대는 공존 모색의 방편이다. 이는 ‘혼종성’이 범람하는 모빌리티 사회, 인간과 기계가 공존하는 시대가 지향해야 할 본질이다. 모빌리티 이론가들은 불투명한 미래 인류의 공존을 위해 이분법적 사고에 매몰된 토대주의 배격을 주장한다. ‘모빌리티 전환’은 ‘이항 대립의 해체’ 개념과 맞물린다. 국민 국가, 민족, 인종, 좌파, 우파, 남자, 여자 등의 이분법적 사고는 사회 갈등과 분쟁의 씨앗이 되어 전쟁으로 번진다. 전쟁의 승자는 언제나 권력이며 일반 국민은 영원한 패자다. 금실과 소수민족 사람들이 보여준 화합과 공감대 형성은 약자들의 생존 전략이며 포스트 휴먼 시대의 대안이다.

세상 만물이 돌아가지만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모빌리티 사유는 존재론적 물음을 던진다. 나도 인간인가요? 소년의 물음은 지금 여기, 모빌리티 사회 공간에 떠돌고 있다. 『떠도는 땅』은 사물화된 인간의 실존 회복을 강구한다. 김숨 작가는 공포에 질려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역사의 그늘에 묻힌 17만 2천여 명의 목소리를 복원하여 문학의 영토에 이식했다. “내가 떠도는 것인지 땅이 떠도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떠돌았지.”(183쪽) 모빌리티 사회, 사람들은 여전히 생존을 위해 이동한다. 목적지도 방향도 알지 못하고 떠도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문학의 공간에서 계속될 것이다.


<끝>


COPYRIGHT ⓒ SEGYE.com Contact Webmaster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용자약관
세계닷컴 뉴스 및 콘텐츠를 무단 사용할 경우 저작권법과 관련,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