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명 : 붉은 베리야
성 명 : 유호민
신춘문예 (소설) 심사평 - 김화영·권지예

“‘치매’라는 상투적인 소재… 애틋하고 따스하게 풀어내”


◇ 김화영(왼쪽), 권지예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12편이었다.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다루고 있었으나, 작의가 뭔지 애매모호하거나 용두사미 격이어서 완성도나 완결성에 아쉬운 응모작이 많았다. 그중에서 ‘모래가 새어 나오는 가방’과 ‘붉은 베리야’ 두 편이 경합을 벌였다. 두 작품은 여러 면에서 대비되었다.

‘모래가 새어 나오는 가방’은 기존소설 문법을 해체하며 시적인 문장과 독특한 서술구조, 화려한 필력으로 독자의 사유를 자극하고 끝까지 긴장하게 만든다. 소설의 서사와 소설 속 연극의 서사가 반전과 대칭을 이루며 역동적인 깊이를 보여준다. ‘르네 마그리트, 데칼코마니’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단편은 문학의 지적, 철학적, 예술적 유희를 확장하는 면이 있다.

‘붉은 베리야’는 치매에 걸린 과학자 교수 출신의 아버지와 그를 둘러싼 가족의 이야기이다. 일견 상투적일 수 있는 소재를, 유머가 깃든 시선으로 인물들의 개성을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소설이 어둡지 않고 애틋하고 따스하다. 특히 치매 환자인 아버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치매 환자와 달리 전문적인 지식과 추리력이 특출나 삶의 통찰력과 아이러니를 지혜롭게 묘파한다.

소설 제목인 ‘붉은 베리야’는 가족들이 열대식물인 부겐빌레아를 부르는 단어다. 추운 겨울에 피는 붉은 것은 꽃이 아니라 꽃받침이고, 정작 가운데 꽃술처럼 아주 작고 하얀 것이 꽃이다. 그렇게 전혀 다른 기준을 가진 식물이다. 세상에는 겉모습과 달리 진실은 간혹 오히려 그렇게 작고 눈에 안 뜨이는 것. 다이아로 오해할 커다란 유리 반지가 더 소중할 수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다른 기준에 맞춰 자신만의 꽃을 피우며 살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 소박한 위로를 준다.

‘모래가 새어나오는 가방’이 역작이지만 소설이 이렇게 어려울 필요가 있을까. 심사숙고의 논의를 거쳐, 물흐르듯 노련하게 쓴 ‘붉은 베리야’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아까운 낙선자에게는 격려를,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드린다.
COPYRIGHT ⓒ SEGYE.com Contact Webmaster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용자약관
세계닷컴 뉴스 및 콘텐츠를 무단 사용할 경우 저작권법과 관련,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