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테레오적 시점과 삶의 진실 -대립하는 두 인물을 가진 세 편의 소설 이 성 우 세기말과 새 천 년의 의미가 겹치는 희망과 불안의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현실은 천(千)의 얼굴을 가졌다,라고. 천의 얼굴이라고 할 만큼 현실은 복잡 다단하여 어느 일면의 관찰만으로는 진면목을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일 게다. 특히 현대 문명 사회에서 개인화되고 전문화된 삶은 전체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단편으로서의 의미밖에 갖지 못한다는 견해가 팽배해 있다. 이렇게 볼 때 현대 사회는 수많은 파편으로 된 모자이크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견해도 있다. '현실의 천의 얼굴'은 다만 하나의 얼굴이 지어낸 표정과도 같은 것이며, 분명하게 실재하는 것은 '얼굴'일 뿐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전자의 견해에 따른다면 세계를 움직이는 기본 질서나 법칙 같은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단지 파편화된 삶이 존재하며 우리는 그 파편들을 주워 모아 전체 현실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 후자의 견해는 다양한 현실의 저변에 일정한 삶의 원리나 법칙이 있음을 말한다. 우리는 이 두 세계관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전자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한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들의 주장처럼 들리고, 후자는 세계를 곧잘 관념화.도식화하는 현실 변혁 운동자들의 주장과 유사해 보인다. 우리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두 세계관 중 어느 하나의 범주에 이미 속해 있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 사람들도 잠시 그 범위에서 벗어나, 우리가 함께 읽을 세 작품을 확인하자. 각기 10∼20여 년의 사이를 두고 발표된, 전광용의 [사수(射手)](1959), 송기원의 [춘몽(春夢)](1978), 임철우의 [붉은 방](1988)이 바로 그 작품들이다. 대립적인 위치의 두 인물이 주인공 또는 화자인, 우리 소설사에서 그 예를 찾기 힘든 이 작품들은, 새로운 세기를 맞아 가치관의 혼란에 빠진 우리들에게 기꺼이 판단의 위기에 직면하며 삶의 진실에 다가서는 소설의 한 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소설 작품에서 대립적인 위치의 두 인물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경우, 두 인물 가운데 누가 발언의 기회를 갖느냐, 즉 누가 작중 화자가 되느냐에 따라 독자의 인식과 판단이 크게 달라진다. 의도적으로 반어의 효과를 노린 작품이 아니라면, 독자는 화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이해하고 작중 인물들의 잘잘못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자가 1인칭이라면 독자의 작품 이해의 범위와 각도는 매우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의 작품 가운데 하나가 전광용의 [사수]이다. [사수]는 주인공이자 작중 화자인 '나'와 친구 B 사이의 경쟁을 그린 작품이다. '나'와 B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 오면서 우연이랄 수만은 없는 극적인 경쟁 관계를 지속하다가 급기야는 B의 사형 집행 사수로 '내'가 차출되기까지 한다. '나'와 B의 대결의 내용은, B의 사형 집행 현장에서 실신했던 '내'가 침대에 누워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서술된다. '나'의 회상은 일화를 중심으로 빠르게 전개되어 극적 긴장감을 형성하기도 한다. ① 국민학교 때 : "곰" 선생의 수업 시간에 '나'와 B는 서로의 뺨을 때리는 벌을 받는다. (B의 승리-'내'가 코피를 흘렸다.) ② 중학교 때 : 경희를 양보 받기 위한 공기총 시합을 벌인다. (B의 승리-'내' 자신의 실수로 귓바퀴에 상처를 입었다.) ③ 청년기 1 : 6.25 전쟁 중에 '나'는 B와 다시 만난다. (B의 승리-B는 이미 경희와 결혼해 있었다.) ④ 청년기 2 : B의 사형 집행 사수로 '내'가 차출된다. (B의 승리-B의 의연함에 비해 '나'는 총도 제때 쏘지 못했다.) '내'가 B와의 대결에서 모두 패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특히 일화 ②에서 생긴 귓바퀴의 상흔은 '나'로 하여금 B와의 경쟁 의식과 함께 지속적인 패배감을 느끼게 하는 구실을 한다. 그러나 B가 '나'와의 대결을 어떻게 생각하고 또 승부를 결정했는지, 독자는 알 수 없다. 성장 과정을 따라 연속되는 경쟁적 일화는 '나'의 시점에서만 회상될 뿐이다. 1인칭 화자인 '나'는 침대에 누워 있고, 독자는 그런 '나'의 진술에만 의존해 인물과 사건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B는 말할 것도 없고, '나'와 B 사이에서 경쟁의 촉매 역할을 하는 '경희'에 대한 정보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부족할 따름이다. 차라리 경희가 작중 화자가 되었더라면 '나'와 B의 경쟁 관계가 좀더 입체적으로 조명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갖게 한다. 이처럼 1인칭 화자인 '나'는 '내'가 보고 듣고 겪은 것만을 묘사할 수 있을 뿐 '내'가 없는 곳에서 일어난 일이나 다른 인물의 마음속은 묘사할 수 없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려는 하나의 시도로서 '스테레오적 시점'의 활용을 들 수 있다. 스테레오적 시점이란, 한 번은 인물 1이 자기 입장에서 사건을 서술하고, 또 한 번은 인물 2가 자기의 입장에서 같은 사건을 서술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독자는 대립하는 두 인물의 사정을 모두 알 수 있고, 따라서 사건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스테레오적 시점을 채택한 작가는 철저하게 일인이역을 감당해야 한다. 두 명의 화자가 전달하는 정보는 그 각각 독자를 설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작가가 드러내 놓고 일인이역을 한다는 형식은 독자에게 이질감과 낯선 느낌을 줄 수 있다. 심한 경우 독자는 반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작품을 대할 것이다. 스테레오적 시점은 이렇듯 불리한 조건을 함께 가진다. 작가의 인식 내용의 새로움이야말로 이러한 불리함을 딛고 일어서는 유일한 무기이다. 스테레오적 시점의 최대 목적은 소홀히 취급되어 왔던 일면의 진실을 새롭게 조명하여 입체적인 인식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송기원의 [춘몽]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1부에서는 월부책 장수인 1인칭 남성 화자(앞으로 '화자 1'로 표기)가, 제2부에서는 외국인 회사의 사장 비서로 근무하는 여성 화자(앞으로 '화자 2'로 표기)가 역시 1인칭 시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5월의 여대 교정, 하루 종일 허탕을 치고 교정을 빠져 나가려는 화자 1을 화자 2가 부른다. 화자 2는 책을 사 주는 형식으로 화자 1을 꾄다. 마침내 두 사람은 인천의 호텔에 가서 하룻밤을 묵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화자 2는 '처녀'였고, 이튿날 아침 종적을 감춘다. 이상이 두 화자 사이의 사건의 개요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일한 사건, 특히 화자 2의 '처녀성'에 대한 화자 1과 화자 2의 인식 태도가 판이하다는 사실이다. 화자 1은 여성의 처녀성을 도덕적 가치를 기준으로 인식한다. 화자 1의 이러한 인식 태도는 여느 독자들의 인식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당사자인 화자 2에게 있어서 처녀성은, 한때 금전으로도 환산될 수 있었던 것이며 지금에 와서는 가난의 흔적 혹은 거추장스럽고 부끄럽기까지 한 낡은 방식의 삶을 대변할 뿐이다. 이 작품의 묘미는 통상의 관념이나 가치관으로 볼 때 비난과 지탄을 받아 마땅한 여자인 화자 2에게 당당한 발언의 기회를 부여했다는 데 있다. 화자 2의 발언에 의하면,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은 물론 홀어머니 슬하를 떠난 대학 시절에도 가정 교사, 월부책 판매원, 출판사의 임시 교정 직원, 심지어 맥주홀의 호스티스 등 갖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했다. 그녀는 대학 4학년 때 아르바이트하던 맥주홀에서 자신의 '처녀'를 거액으로 흥정하기도 했지만 그것을 팔지는 못한다. 그녀에게는 '가난한 자존심'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인 사장의 비서로 근무하면서, 그녀는 참담했던 대학 시절의 궁핍의 때를 벗기기 위해 노력한다. 방 한 칸 없이 떠돌던 것에 대한 보상 심리로 한강변에 아파트를 장만하고, 에이프런을 두르고 서양 요리를 만들고, 자신의 육체를 금전으로 흥정하던 사람들의 기억을 덮어 버리기라도 하듯 거의 매일처럼 보디로션을 사용한다. 그녀는 스스로 "미운 오리새끼처럼 버려져 있던 나의 육체는 어느 날 느닷없이 눈부신 백조로 둔갑해 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외국인 사장과 동반해 각종 파티에 참석하기도 한다. 파티를 통해 그녀는 비로소 상류 사회의 모습을 구경했고, 그녀의 '상품 가치'는 폭등한다. 이제 그녀 앞에는 온갖 좋은 조건을 구비한 남자들이 그녀의 선택을 위해 "상품처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과는 반대로 그녀는 내심 옛날의 가난했던 모습을 그리워한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상류 사회'에 완전하게 편입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갈등한다. 그녀가 이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할 때 외국인 사장이 그녀에게 청혼을 해 온다. 그녀는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호텔 방을 예약하고, 외국인 사장 앞에서 옷을 벗는다. 그러나 외국인 사장의 반응은 그녀의 예상을 벗어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육체를 바라보는 그의 차거운 눈길을 보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난 처녀예요." 그가 여전히 차거운 눈길로 나를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오." 아아, 바로 그때 나의 내부에서 어떤 것들이 남김없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졸업한 후 이 년 동안 나를 지탱 시켜 온 그 어떤 것들이. 그녀의 '처녀성'이 외국인 사장에게는 이렇다 할 가치가 없는 것임이 밝혀졌다. 그녀에게 있어 외국인 사장의 가치관은, 그녀가 소속되기를 원하는 상류 사회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녀가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나의 처녀야말로 내가 끝내 버리지 못한 가장 큰 가난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것을 버리지 못하는 한 나는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의 갈등에서 헤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나는 마 침내 파멸하고 말리라는 것을. 그녀는 '처녀'를 자신의 한계로 인식한다. "비참하다 못해 차라리 처참하기까지 했"던 가난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그 한계를 깨뜨리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그녀는 월부책 장수를 유혹해 '처녀'를 버렸던 것이다. 화자 2의 이상과 같은 진술이 화자 1의 진술과 나란히 놓여짐으로써 독자는 두 명의 사건 당사자의 입장을 모두 고려할 수 있다. 두 화자의 진술을 토대로 그림을 그려 보자. {{ }} 화자 1 {{}} {{}}{{}}{{}}여대 교정 인천의 호텔 외국(인 사장과의 결혼) {{}} 화자 2 화자 1과 화자 2가 공유한 공간은 여대 교정부터 인천의 호텔까지이다. 그 이후의 공간은 '처녀성'에 대한 인식 태도에 따라 구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자 1은 화자 2와의 만남 이후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 상태에 빠져 대부분의 의식이 자신의 내부로 향하게 된다(실선 부분). 화자 2는 외국인 사장과 결혼해 외국으로 나간다(점선 부분). 이렇듯, 가난한 젊은 시절을 고생으로 살아 낸 두 명의 화자가 그리는 삶의 궤적은 양쪽 스피커에서 울려 나오는 스테레오 음악처럼 독자의 가슴을 흔든다. 임철우의 [붉은 방]은 모두 여덟 토막의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역시 스테레오적 시점이 활용되었는데, 두 명의 작중 화자(앞으로 오기섭 화자, 최달식 화자로 표기)가 1인칭 시점에서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 오기섭 화자 (하나, 셋, 다섯, 일곱째 토막)}}{{ 최달식 화자 (둘, 넷, 여섯, 여덟째 토막)}}{{ 본 적}}{{ 약산도}}{{ 낙일도}}{{ 나 이}}{{ 이십대 후반∼삼십대 초반(추정)}}{{ 47세}}{{ 학 력}}{{ 대졸}}{{ 고졸(추정)}}{{ 직 업}}{{ 고등학교 교사}}{{ 보안 관련 경찰}}{{피부양 가족}}{{ 아내, 1녀}}{{ 어머니, 아내, 1남 2녀}}{{ 당면 과제}}{{ 전세금 인상분 삼백만 원}}{{ 정신 이상이 된 어머니}} }} 두 화자의 만남은 오기섭 화자가 수사 기관에 연행됨으로써 이루어진다. 오기섭 화자는 시국 관련 수배자를 자신의 집에 숨겨 준 적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최달식 화자의 취조를 받는다. 최달식 화자의 취조는 주로 '고문'을 수단으로 행해진다. 이 작품이 갖는 의미의 중점은 고문의 문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편의 분량에 담겨진 사건 자체는 지루하리 만큼 단조롭다. {{}}{{ }}{{}}{{ }}오기섭 화자 : 집 학 교 집 {{ }} 붉은 방 {{}}최달식 화자 : 집 {{}} 집 작품의 표제이기도 한 '붉은 방'은 최달식 화자가 오기섭 화자를 취조하는 방이다. 오기섭 화자의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점선 부분)은, 자동화된 인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수많은 평범한 삶이 아주 쉽게 부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때 오기섭 화자의 붉은 방 체험은 독자를 포함한 평범한 다수의 삶을 파괴하는 시대의 야만성을 폭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의미하는 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작가가 두 명의 화자를 교대시키는 소설적 장치를 택한 것은, 고문이라는 비인간적 행위에 대한 일방적 비판이 가져올 독자의 의식의 자동화를 깨뜨리기 위한 것이다. 고문을 폭로하는 작품이 비슷한 내용과 수법으로 반복된다면, 오히려 고문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최달식이라는 가해자에게 피해자와 대등한 진술의 기회를 부여했다. 최달식 화자의 진술에 따르면, 그야말로 시대의 희생자이다. 6.25 때 가족들의 몰살, 그 때문에 공산주의자를 원수로 알던 아버지의 급사, 이들로 인한 충격으로 정신이 나가 버린 어머니, 게다가 어려서 죽은 아들 한수에 대한 죄책감이 최달식 화자를 괴롭힌다. 빨갱이들 손에 우리 조부모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일가까지, 모두 합해서 아홉 사람이나 떼죽음을 당하지만 않 았더라면-그랬더라면, 아버지는 홧병이 들 리도 없었을 테고 [……] 알콜중독이 심해져 끝내는 옷을 벗기우다시 피 해서 쫓겨나는 일도 없었을 테고, 결국…… 그렇게 비참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란 말이다. 정말이지, 그렇게만 되었더라면 어머니가 저렇듯 노망기가 들어 똥오줌을 떡 주무르듯 하지도 않았을 테고, 나도 너희들처럼 대학을 나와서 지금쯤은 더 그럴듯한 직장을 잡았을 테고 [……] 한때 난 은행원이 되고 싶었다. 최달식 화자의 삶의 내력을 알게 된 독자는 인간적인 연민을 금할 수 없다. 오히려 피해자인 오기섭 화자가 당하는 고통은 신체적인 부위에 머물러 최달식 화자의 삶의 아픔보다 정도가 덜해 보이기까지 한다. 작가는 최달식 화자의 삶의 내력에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투영시켜 '고문'의 뿌리가 당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말한다.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최달식 화자의 현재의 일상은, 고문으로 대변되는 폭력과 비인간화가 이미 우리의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고문을 행하는 당사자조차 그것의 부정성을 깨닫지 못하게 되었음을 힘주어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처럼 스테레오적 시점의 효과는 최달식 화자의 삶에 현대사의 비극성과 평범한 일상성을 부여함으로써 극대화된다. 최달식 화자는 가해자이기 이전 피해자인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기섭 화자로 대표되는 평범한 삶의 영위자들이야말로 최달식 화자와 같이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을 방치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스테레오적 시점은 대립적인 위치의 두 인물을 대등하고도 입체적으로 다루려는 소설적 장치임을 살펴보았다. [춘몽]과 [붉은 방]에서 스테레오적 시점은, 양쪽 당사자의 삶이 모두 일면의 진실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렇게 볼 때 스테레오적 시점은, '이쪽도 옳고 저쪽도 옳다' 혹은 '이쪽도 그르고 저쪽도 그르다'는 이른바 양시쌍비론(兩是雙非論)과 아주 흡사해 보인다. 사실 우리들 삶에는 딱 부러지게 어느 한 쪽의 잘잘못을 판단하기 어려운 사건이 드물지 않다. 이럴 때 우리는 양시쌍비론에 기대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은 편리할 뿐이지 올바른 처사라고는 할 수 없다. 왜인가? 한마디로,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존재'라는 말이 너무 거창하게 들린다면, 잘 알려진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솔로몬의 재판에서, 두 여인은 서로가 자신이 아이의 어머니라고 주장한다. 솔로몬은 아이를 둘로 갈라 나누어 가지라고 판결한다. 이때 솔로몬의 판결이 양시쌍비론이다. 둘 다 일리가 있으니 똑같이 옳다는 판결은 양측 모두를 존중하는 처사 같지만 실지로는 이처럼 진실(아이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솔로몬의 이같은 판결에 찬성한 쪽은 물론 가짜 어머니이다. 가짜 어머니에게는 아이의 목숨보다도 양쪽이 모두 옳다는, 바로 그 자리에서의 판결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러나 진짜 어머니는 지금 당장의 시시비비보다는 아이의 목숨이 남아 있기를 원한다. 솔로몬은 양측의 반응을 보고 진실을 가려낸다. 솔로몬은 양시쌍비론의 허점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양시쌍비론의 허점은 무엇인가? 과거가 없고 미래가 없는 것이다. 아이를 낳은 사실(과거)이 없고, 아이의 목숨에 대한 소중함(미래)이 없다는 말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잘 알려진 명제를 상기하는 것도 좋다. 물론 그 대화는 미래를 바라보며 나누는 것이다. 지금 당장의 현실에 급급해 판결을 내릴 때, 양시쌍비론은 잘못 판단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양시쌍비론은 판단의 회피이지 온전한 판결은 아니다. 우리는 솔로몬의 일화에서 양시쌍비론이 최종 판결에 도달하는 하나의 방법으로만 쓰이고 있음을 발견한다. 양측 당사자에게 동등한 진술의 기회를 주고(양시쌍비론), 판결하는 사람은 사건의 맥락(크게 말하면 역사 의식)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솔로몬의 재판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가르침이다. 솔로몬이 행한 재판은 작가의 소설 쓰기와 대응된다. 솔로몬이 진실을 분별하는 수단으로 양시쌍비론을 사용했듯이,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강화하기 위한 장치로 스테레오적 시점을 활용한다. 스테레오적 시점이라는 형식만으로 볼 때 작가는 엄정한 중립을 지키며 양쪽을 모두 긍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형식적인 중립은, '중립적이지 않은' 작가의 의도를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전략이다. 작가는 겉으로 중립적인 체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의도를 말하기 위해 더 교묘한 기법이나 장치들을 사용한다. 스테레오적 시점에 의해 평행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춘몽]을 자세히 뜯어보면 작가의 의도가 편향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특히 작중 인물의 인식 태도와 어조에서 드러난다. 화자 1과 화자 2는 비슷한 정도로 가난을 경험했다. 그러나 가난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태도는 매우 다르다. 화자 2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난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에 비해 화자 1은 "돈을 벌기 위하여 내 몸을 사용하는 일이라면 나는 뭐든지 해 왔었다. 좋다, 네가 원하는 게 뭐냐. 네가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해 주마."라고 했으면서도, 막상 화자 2가 '처녀'를 버리고 외국인과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태도에 변화를 보인다. 나는 그년을 원망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할 수 있다면 나는 그년의 앞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내 꼴리는 밸이나 질투를 넘어서라도 나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문제는 그년의 거울로 인하여 파괴당한 내 삶이다. 주간지에서 그년이 결혼하리라는 것을 안 이후, 나는 줄곧 내 저주스러운 모습이 비치는 그년의 거울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그년의 거울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내 삶은 가치가 없다. 가치가 없는 삶은 고통일 뿐이다. 그년의 거울은 너무나 뚜렷하게 내 삶의 한계를 보여 준다. 아아, 어떻게 내가 그년의 거울을 깨뜨릴 수가 있으랴. 그토록 눈부신 거울을. 화자 1은 자신의 도덕적인 타락의 한계를 반어적으로 "내 삶의 한계", 깨뜨릴 수 없는 "그토록 눈부신 거울"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반어법은 일차적으로 화자 1이 가치관의 극심한 혼란 상태에서 가치 전도를 경험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더 나아가 이 반어법은 작품에 대한 작가의 개입이 어조의 변화로 표출된 결과로 볼 수 있다. 화자 1의 "삶의 한계"를 보여 주는 화자 2의 "거울"이란 무엇일까? 위의 인용문에 이어지는 부분부터 화자 1의 진술이 끝나는 부분, 그러니까 제1부의 끝까지 읽어 보자. 그년의 거울이 눈부신 것은 그년이 앞으로 살아갈, 나와는 반대되는 계급 때문만은 아니다. 권력이나 돈으로만 이야기한다면 나도 그년의 계급처럼 못 되란 법도 없다. 권력이나 돈뿐만이 아니다. 그년의 거울에는 권력이나 돈 뿐만이 아닌 또 다른 무엇이 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 야외 음악당 앞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해가 지자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 버렸다. 어둠이 도심지를 혁명군 처럼 진주해 오고, 도심지는 주둔군의 품에 안겨 빌딩마다 요염하게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나는 도심지를 내려다 보며, 빌딩에 불이 켜질 때마다 얼핏얼핏 그년의 웃음소리를 들은 듯했다. 화자 1의 진술에 따르면 화자 2의 "거울"은 돈, 권력, 그리고 "또 다른 무엇"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화자 1은 돈이나 권력 때문이 아니라 그 "또 다른 무엇" 때문에 눈이 부시고 거울을 깨뜨릴 수가 없다고 말한다. 돈이나 권력 등의 물질적 가치보다는 정신적 가치의 측면에서 자신의 한계를 느낀다는 뜻일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화자 1이 자신의 도덕적 타락의 한계를 "내 삶의 한계"라고 반어적으로 말했던 사실과도 조응된다. 이제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화자 1이 말하는 "그년의 거울"이, 돈이나 권력 등의 물질적 가치 그리고 그것의 획득을 위한 정신적 타락을 의미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 화자 1은 "또 다른 무엇"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 놓고 작가는 줄 바꿔 쓰기를 하고 문맥을 바꿔 버렸다. 바로 이 부분에서 작가가 시치미를 뗀 것이다. 작가의 난데없는 시치미 떼기는 독자로 하여금 독자 자신이 짐작했던 "또 다른 무엇"의 의미를 스스로 의심하게 만든다. 독자는 이제 앞뒤 문맥을 다시 한번 살피는 주의 깊은 독서를 요구 받은 것이다. 작가가 줄 바꿔 쓰기를 한 마지막 단락이야말로 정교하고 치밀한 독서를 필요로 하는 함축적인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질 문명의 타락한 가치는 '어둠 혁명군 주둔군'으로 표현된다. 그것에 대한 항거는 이미 "삶의 한계"로 치부될 뿐이다. 따라서 '도심지(빌딩) 그년'은 자발적으로 타락한 가치의 품에 안겨서 항복 혹은 동조의 신호로 "요염하게 불을 밝히"는 것이다. "텅 빈 광장"이나 "그년의 웃음소리"는 타락을 거부하는 화자 1과 같은 존재를 오히려 비웃는 전도된 가치 풍조를 대변한다. 이상과 같은 비유 구조 속에는 물질적 가치로 인한 정신적 타락의 범위가 개인에서 도시로, 더 나아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은 화자 1의 인식의 범위가 은연중에 확대되고 있음을 가리킨다. 이처럼 화자 1이 새롭게 인식한 내용이 고스란히 독자의 몫이 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 부분에서 작가는 화자 1의 진술임을 가장하여 함축적인 의미의 문장으로 작가 자신의 의도를 독자에게 전달한 것이다. 화자 1이 보여 주는 위와 같은 인식의 확대에 비할 때 화자 2의 인식 태도는 그 자체로서 아이러니가 될 만큼 저급의 수준을 면치 못한다. 다음은 화자 2의 마지막 진술이자 작품의 끝 부분이다. 내가 처녀인 것을 알고 놀라던 그 남자의 시선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 남자에게 큰 죄라도 진 듯한 기 분이었다. 처녀를 버린 다음날 아침은 참으로 청명했다. 화자 1에 대한 화자 2의 죄책감은 화자 1을 도구로 사용한 데서 비롯된다. 결코 자신의 '처녀를 버린' 행위에 대한 자책이 아니다. 이런 인식 상태에서 "처녀를 버린 다음날 아침은 참으로 청명했다"라는 마지막 진술이 나온다. 화자 2는 도덕적 마비 상태에 있다. 작가는 화자 2에게 진술의 기회를 주었을 뿐 온전한 인식 능력은 주지 않았다. 그래서 화자 2의 진술은 일면 타당한 듯하면서도 결정적인 대목에서 독자들의 의식과 어긋나는 것이다. [붉은 방]이 스테레오적 시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최달식 화자의 삶에 현대사적 의의와 일상적 의미를 함께 부여했음은 앞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최달식 화자가 겪은 비극적 사건들은 때로 최달식 화자를 이상 성격의 소유자로 만든다. 최달식 화자가 붉은 색에 대해 가지는 이상 심리라든지, "무엇이든 허약하게 보이는 것을 나는 깡그리 증오한다"라는 진술에서 드러나는 과도한 피해 의식 등은, 최달식 화자의 정신 상태에 대한 독자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그 결과로 '고문'이 우리 시대의 보편성 있는 문제가 아니라 몇몇 개인의 특수 문제로 전락할 위험에 처한다. 삶의 양면에 객관적으로 접근한다는 스테레오적 시점에서 어느 한 쪽의 화자가 정상이 아니라면, 작품의 평행적 대립 구조가 어그러지는 것은 당연하다. ① 그렇지. 나는 내 혼자만의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니잖나. 내겐 이 사회와 국가를 저 간악한 악의 세력들로부 터 지키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해. 아암. 나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지하실로 이르는 계단을 내려간다. 그 동안에도 동료들은 수고하는 모양이다. 이 방 저 방에서 고함소리와 신음소리가 활기 있게 흘러나오고 있는 참이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붉은 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② 주님. 악을 멸하시고 의인을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 이 죄인을 버리지 마시옵고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 록 굳건한 믿음으로 지켜주시옵소서. 오오 주여. 저희들 비록 죄 많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양들이오나…… 기도를 올리고 있는 동안 어느새 성스러운 은총과 기쁨이 내 온몸을 따스하게 감싸기 시작하고 있음을 나는 역력히 느낀 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은 이 붉은 방 안을 가득히 채우기 시작하고 있다. 위의 두 인용문에서 시대 착오적이며 과대 망상적인 최달식 화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정상적인 어조의 중간 중간에 삽입된 인용문과 같은 발언들은 독자들의 의식과 정면으로 대립하여 반어적 의미를 산출한다. 3인칭 시점의 소설이라면 화자에 의한 인물 비판 곧 풍자이지만, [붉은 방]은 1인칭 시점의 소설이므로 화자와 독자의 대립, 곧 반어의 효과가 된다. 이것을 작가의 개입이라는 측면을 고려하여 읽는다면 작가에 의한 화자 비판, 곧 풍자로도 볼 수 있다. 결국 위의 인용문은 자신의 참모습을 직시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릇된 인식 상태에 머물고 마는 최달식 화자에 대한 비판으로 읽혀진다. 이에 비해 오기섭 화자는 붉은 방 체험을 통해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① 이렇게 간단하게 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렇다. 알고보면 어느 한 사람의 목숨 쯤이야 참으로 손쉽고도 간단하게 해치워버릴 수 있는, 그렇듯 소름끼치는 야만과 폭력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도, 사람들은 막상 그걸 까맣게 모르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② 불현듯 피잉 눈물이 돈다. 돌아온 것이다. 내 집으로. 아내와 딸이 기다리는 우리 집으로…… 그러나 얼른 걸음을 옮길 수가 없다. [……] 붉은 방에서 보낸 그 몇 개의 밤과 낮 동안 내 육신과 영혼은 만신창이로 갈가리 찢겨져버렸고, 그자들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소름끼치는 환멸과 증오로 걸레쪽처럼 찢겨져버린 내 육신을 다시 내 집 앞에다가 멋대로 내팽개친 채 유유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자 가슴 속에서 무언가 뜨겁고 단단한 불덩이 같 은 것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차츰차츰 내 전신의 구석구석까지 뜨겁게 퍼져나가다가 이윽고는 엄청난 열기로 타 오르는 그것은 분노였다. 자신에게 행해졌던 고문의 의미를 개인적 차원의 문제를 벗어나 동시대 보편의 문제로 확대한다는 점에서 오기섭 화자의 위의 진술은 가치를 지닌다. 개인에게 행해진 국가 기관의 폭력에서 '야만과 폭력의 시대'을 읽어 낸 오기섭 화자의 인식 능력에 의해 독자의 인식 범위는 자연스럽게 확대된다. 이런 인식 행위의 밑바탕에는 어느 시대에든 개인의 삶은 고립된 개별자의 의미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공동체적 세계관이 자리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자신에 대한 반성적 성찰(인용문 ①)을 거쳐 시대에 대한 분노(인용문 ②)에 이르는 오기섭 화자의 의식의 변이 과정은 독자의 독서 체험에서 효과적으로 재현된다. 따라서 오기섭 화자의 발언에 구태여 최달식 화자에서와 같은 반어의 형식을 취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작가는 최달식 화자의 반어법과 오기섭 화자의 진지한 어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독자에게 전달한 것이다. 스테레오적 시점이 활용된 작품을 읽은 독자가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명확한 현실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작가의 전략이 작품에 교묘히 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펴본 세 편의 소설은 모두 대립적인 위치의 두 인물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런데 [사수]는 주인공인 1인칭 화자의 한쪽 진술에만 의존함으로써 총체적 삶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다른 두 편의 소설과는 구별된다. [춘몽]과 [붉은 방]은 1인칭 화자의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스테레오적 시점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활용했다. 우리는 이 두 편의 소설에서 대립적인 입장에 처한 두 화자의 진술을 마치 무릎맞춤하듯 따져 들음으로써 사건을 좀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테레오적 시점은 인생의 양면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기 위한 소설 장치일 뿐 그것 자체로서 완결된 판단 행위가 아니라는 점에 우리는 또한 주목해야 한다. 스테레오적 시점을 통해 작가는 독자에게 새로운 시야를 제공하지만 시야에 들어온 것 모두가 진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스테레오적 시점에만 머무르지 않고 작중 인물들의 인식 능력과 어조 등 작가 자신의 교묘한 기법들을 동원해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진실'을 말한다. 그 삶의 진실의 무게 중심을 작중 인물들 가운데 어느 쪽에 놓을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은, 작가의 '역사 의식'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솔로몬의 재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실이 천의 얼굴을 가졌다는 말은 비유적인 차원에서는 일면 타당하다. 문제는, 그 말의 의미가 현실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의 불가해성을 주장하는 곳까지 치닫는다는 데 있다. 아무리 현실의 구체적인 양상이 많고 그 양상들을 이어 주는 인과 관계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고 해서, 현실에 대한 이해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다. 현실은 파편화된 삶의 단순한 양적 집합이 아니다. 현실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는 무책임한 주장과 다름없다. 현실은 천의 얼굴을 가진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이 아니라, 천의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우리네 인간들이 한 땀 한 땀 직조해 내는 삶의 모습일 따름이다. 천의 표정으로 거짓을 화려하게 꾸미는 현실 속에서, 역사 의식을 지닌 작가와 비평가는 나름의 삶의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그 같은 삶의 진실이 과거 혹은 동시대의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문학의 죽음 대신 문학의 존재 이유 하나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