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명 : 웃음과 망각의 수사학-성석제론
성 명 : 정은경

1. 죽느냐, 이야기하느냐


천일 하고도 하루동안 벌어지는 이야기의 향연인 '천일야화'는 죽음 앞에 놓인 세헤라자드의 처절하면서도 기발한 생존 전략이다. 익히 알다시피 삼 년 동안 첫날밤을 지낸 신부를 죽이는 왕의 횡포에 온 나라가 슬픔과 비탄에 빠져 있을 때, 총명하고 해박한 세헤라자드는 그녀의 동생 두냐자드와 일종의 음모를 꾸민다. 전설과 역사, 신화와 구전을 오가는 신부의 무궁무진한 이야기 속에 예정된 처형이 하루하루 연기되고, 샤리아르 왕과 세헤라자드는 아이를 낳고 국사를 논하면서 평화로운 나날 속에 '죽음'을 망각하며 애초에 예정된 죽음의 시간에 다가간다. 그러니까 이 거대한 이야기의 보고인 '아라비안 나이트'는 신부의 규방에서 잔학무도하게 계속되는 술탄의 카니발리즘에 대항하여 자신은 물론 다른 처자의 목숨까지 구한 용감무쌍한 투사이자, 희대의 이야기꾼인 세헤라자드의 목숨 건 도박이었던 셈이다.


"자동차 한 대가 떨어지고 있다. 막 떨어지기 시작했다"로 시작되는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는 떨어지는 바로 그 순간, 즉 몰락의 시간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추락하는 자동차의 짧은 4.5초라는 시간은 무수한 일념과 일념으로 쪼개지며, 그 속으로 한 위대한 깡패의 일대기가 들어온다. 한 칼잡이가 탄생하고 레미콘 트럭 운전사의 팔뚝을 그으며 종횡무진하는 동안, 1주야의 10만8000 분의 1에 해당하는 수많은 일념들이 지나가지만, 자동차는 좀처럼 땅에 닿지 않는다. 칼잡이가 고향에 돌아와 술집을 내고 전설적인 깡패, 마사오 형님의 오른팔을 등산용 도끼로 잘게 부수는 동안에도 그 무수한 찰나는 다함이 없다. 그것은 원래 찰나가 다함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한 야비하고 잔인무도한 칼잡이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에만 허공에 들려있고, 칼잡이의 삶 또한 이야기되는 동안만 지속된다.


액자를 이루고 있는 자동차의 추락에 따른 죽음의 시간은 액자 내부를 이루고 있는 칼잡이의 일대기라는 이야기의 시간과 텍스트 외부와 내부를 끊임없이 간섭하고 넘나드는 각주에 의해, 정지되고 해체되는 것이다. 이러한 외부와 내부 구조의 끊임없는 교체 속에 이야기의 단선적 서사는 지리멸렬하게 흩어지며, 애초의 추락이라는 직선은 완만한 포물선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야기'는 자동차의 추락하는 속도의 힘에 대한 배신이자, 절대적인 시간과의 힘겨운 혹은 유쾌한 한판 대결인 셈이다. 결코 과녁에 닿지 않는 화살처럼, 무수히 분할된 미분의 시간 속에서 죽음은 '정지'되고, 그 틈을 한가롭게 헤집는 농담과 긴박감 넘치는 영웅담 속에 죽음은 '망각'된다. 소설 속의 시계는 시간의 실현이 아니라 시간의 배신인 셈이다. 그리하여 한 인간의 죽음과 이를 저지하려는 무시무시한 망각술 속에서 '위대한 이야기꾼'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제 '죽느냐, 이야기 하느냐'라는 일종의 궤변론적 대결 상황에서 현대판 세헤라자드인 성석제는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따라서 이 능청스럽고 영리한 이야기꾼은 그의 이야기가 꼭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소설'이기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게 우화이든 만담이든, 모험담이나 영웅담이든, 혹은 이도 저도 아닌 그저 이야기 비스무레한 것일지라도, 그 이야기들이 '그래서' 혹은 '왜?'라는 호기심을 유발하여 다음날 또다시 이야기 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상관없는 것이다.

2. 노름, 놀음, 놀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음날을 불러올 수 있는 충분한 어떤 '힘'을 지녀야 한다. 그 힘은, 작가에 의하면 절대진리나 역사적 실천의 문제 혹은 내면적 성찰에서 오는 게 아니다. 그것의 진정한 힘은 '재미'에서 온다. "정말 재미있는 거짓말이야말로 일상의 반복, 권태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힘"("재미나는 인생 1"-'거짓말에 관하여')이자 미궁에 빠진 현대인의 실존적 상황을 잊게 만드는 망각의 힘이다. 더 적극적으로는 소위 이데올로기의 시대, 거대서사의 시대가 몰각한 이후, 가공할만한 불안과 혼돈에 빠져버린 시대적 상황을 초월할 수 있는 구원의 힘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역사와 이념의 부정, 혹은 근대적 동일성이 해체되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근본적으로 현대인이 놓일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와 역설적 상황에 대한 가장 간명하고 확실한 방법은 "그것에 대해 생각도 말고 걱정도 않는 것이다" ('내인생의 마지막 4.5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몰두하는 인간, 일종의 중독 상태에 빠진 인물들은 성석제 소설의 주된 테마가 된다. 당구, 내기 바둑, 알콜, 춤, 심지어 책수집에 이르기까지 중독증에 걸린 인간들은 몸이 끊어져도 한번 박은 머리를 빼지 않는 '진드기'의 현현들이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남다른 재능의 소유자로 자신의 재능 못지 않게 놀이에 몰입할 줄 아는 디오니소스적 열정을 지닌 인물들이다.


일종의 홀린 인간들에 대한 헌사로 읽혀지는 '홀림'에 수록된 소설들은 아예 '노름하는 인간', '술마시는 인간', '소설 쓰는 인간' 등의 부제나 제목을 달고 있다. 세계 최고의 도박사 피스톨 송선생의 연설을 채록한 '꽃 피우는 시간', 한 알콜중독자의 기구한 인생역정을 담은 '해방-술 마시는 인간', 호두알 두 쪽과 인생을 바꾼 왕제비족의 이야기인 '소설 쓰는 인간'에 이르기까지, 성석제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도취와 열정은 이전의 연대기의 이념형 인물들의 치열성을 육박하고 있다.


몰두하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세계의 특징은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사물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춤꾼의 세계는 '춤, 춤방, 남자, 여자' 네 요소로 이루어지며, 그의 권태는 '진정 춤은 무엇이고 위대한 제비는 뭔가'라는 의혹으로 시작되며, '진정한 자아'는 춤 속에 있다. 춤꾼에게는 "춤이 직업이고 취미였고 이상"('소설 쓰는 인간')이듯이, 알콜중독자에게도 "술은 술이고 안주이자 마약이고 인생의 극치이며 일상생활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며, 술은 "제가 지겨워질 때까지는 중독자를 마음대로 죽게 하지도 않는"('해방'), 진정한 삶의 주인이요, 주체이자, 신(神)인 것이다.


몰두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그가 속한 사물의 세계에서 사물의 극치에 다다른, '갈 데 까지 간' 이른바 도통한 자들로, 그럼으로써 얻은 사물의 철리를 통해 인생의 철리를 깨친 이들이다. 화투에서 투견, 경마, 내기바둑, 심지어 슬롯머신에 이르기까지 온갖 노름이 총집결되어 있는 '꽃의 피, 피의 꽃'에 등장하는 한 노름꾼은 화투를 통해 "어차피 인생은 거는 것(賭)이며 도(睹)로써 도(蹈하)고 도(渡)하며 도(道)에 도(到)한다"('꽃의 피, 피의 꽃')는 철리를 깨달은 자이며, '꽃피우는 시간'의 도박사는 노름의 열 가지 철칙을 통해 삶에 도통한 자이다.


성석제 소설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이러한 유희적 성격은 소설의 언술방식이나 형식적 측면에서도 철저히 구현된다. 그의 소설들은 근대 동일성 담론이 일궈온 분별과 경계의 표상에서 가볍게 탈주하여 쟝르적 경계를 해체할 뿐만 아니라, 벗어난 자리가 가져다 주는 자유를 한껏 누리며 풍요로운 활기를 띤다. 현대 소설의 중요한 덕목인 '개연성'과 '인과성' 내지는 문자언어의 단정함 대신 전통 서사양식의 '구연성'과 '우연성' 및 '가변성', '서술자의 적극적인 개입' 등을 적극 활용하여 새로운 서사적 언술방식의 가능성을 여는 작가의 솜씨는 무림고수들이 보여주는 활극처럼 날렵하고 거침없다. 다소 진부하고 상투적이까지 한 고전서사들의 양식이 성석제의 소설에서 새삼 생기를 띠는 것은 성석제의 소설이 이들을 구태의연하게 답습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이들의 상투성을 뒤집고 패러디하고, 새롭게 변주하기 하기 때문이다. 성석제 소설의 유희성은 이런 기존 서사의 변형에서뿐 아니라 새로운 기법의 형식실험과 텍스트 내의 언술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호랑이를 봤다'에서 보여지는 물고 물리는 식의 연쇄 고리의 원환적 구성에 의한 선조적 플롯의 와해, 그리고 성석제 소설의 특유한 수사법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말꼬리 잇기식의 언어 유희가 그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서사적 모험에 의해 소설은 "언제나 허기진 고요한 우주의 탐식자"('재미나는 인생'-'고요한 우주의 탐식자')처럼 온갖 서사적 양태로부터 에너지와 생명력를 먹어치우고, 왕성한 사유와 생명력을 띤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놀이로서의 소설은 진실의 순정한 '거짓됨'과 거짓말의 진정한 '거짓됨'을 거듭 강조하는 작가의 역설에서도 잘 드러낸다. "세상은 위대한 거짓말쟁이들의 역사이고, 자연조차 둥근 지구를 평평한 것처럼 표현하므로 거짓말쟁이 협회의 회원"이기 때문에, 거짓된 진실로 악질적인 인간이 되기보다는 "자신조차 그것을 진실로 믿을 수 있을 때까지 끈덕지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진정한 거짓말쟁이가 되자"('재미나는 인생'-'거짓말에 관하여')라는 식의 순정한 '가짜의 미학'은 작가 성석제의 줄기차게 주장하고 실천해온 소설 창작방법론이다. 따라서 텍스트는 기발한 상상력과 허풍, 농담은 물론, 이러한 거짓말로 가득 찬 본문에 대해 진짜인 척하는 가짜 주석에 이르기까지, 리얼리티에 대한 끈덕진 부정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현대 작가들이 '그럴듯함'을 위해 오랫동안 공들여왔고 즐겨 사용해 왔던 액자형식을 완전히 전도된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책으로 가득 찬 방에 관한 이야기인 '방'의 "그런 방은 없다. 먼저고 다음이고간에 내가 말한 방은 원래 없었다" 라는 에필로그나 또는 한 내기 바둑꾼의 이야기를 담은 '고수'에서의 "내가 만났던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나 하는 의심"으로 표명되는 허구와 실제 사이의 모호성, 또는 거의 '순정한 짜가'들로만 이루어진 '순정', 심지어 비장한 죽음의 순간에 느닷없이 내뱉는 "엄마, 무서워"라는 희극적 대사마저 이야기의 리얼리티와 진정성을 전복하는 일종의 유희의 전략인 것이다. 엽편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괴담(怪談)이나, 그 밖에 실제성을 의심하게 소설들의 수많은 화소들은, 성석제에게 있어 소설은 무엇보다 일종의 상상의 유희임을 거듭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놀이하는 인간으로서, 혹은 몰입과 망각에 빠진 인간으로서 소설가의 운명은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 '홀림'이라는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이는 순식간에 그 아이에게 사로잡힌다"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사물과 사람을 알고 관찰하기 보다는 여기에서 생기는 거리, 혹은 둘 혹은 셋으로 쪼개진 자아의 분열상을 없애고 직접적인 사물에의 일치와 자아를 통합하고자는 것으로서의 소설쓰기에 대한 이야기다. 즉, 소설이란 풍경에든, 혹은 그 풍경이 불러일으킨 어떤 상상적 유희에의 몰입이든 '진리없는 홀림의 세계'를 통해 분열에서 해방되는 일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홀림이란, 몰두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종의 자아망실, 존재소멸을 의미한다. 엑스터시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경지는 외부의 대상에 자신을 완전히 투신하고 동일시함으로써, 주체을 망각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이러한 완전한 몰입은 일종의 '자의식' 부재, 비판적 사유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탈주체적이며, 탈근대적인 것이다. 놀이하는 인간들은 게임에 중독된 자들, 워커맨과 고글안경으로 대표되는 완전히 자폐적인 놀이공간에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알레고적인 함의는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 소설에 드러나는 화자 혹은 서술자의 시선이 이러한 몰두하는 인간에 대해 비판적이라기보다는 긍정적이라는 데 있다. 즉, 성석제 소설에 있어서 놀이에 대한 '몰입'과 '망각'은 훨씬 해방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3. 무한반복의 삶, 류(類)적 개념으로서의 인간학


존재소멸을 통해 주체성을 망각한, '놀이하는 인간'은 성석제 소설이 갖는 통속성과도 연결되어 있다. 놀이하는 인간은 복잡다단하고 착종되어 있는 무한한 현실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다. 이미 확정된 게임의 규칙이 지배하는 놀이의 세계에는 규칙의 습득과 전략전술, 승리와 패배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회의하지 않는 인간이며, 질문하지 않는 인간이며, 다만 무한히 다시 열리는 새로운 판만을 생각하는 인간이다.

진정한 노름꾼은 남이 놀 때 같이 놀고 남이 칼을 갈면 같이 갈아준다. 세상에 리듬을 맞춘다, 이게 노는 것이고 아름답게 사는 것이다. 노름에도 도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드라마가 있다.-'꽃피우는 시간'

세상이라는 놀이판에 나선 노름꾼에게 있어 삶의 진정한 자세는 세상의 리듬에 맞춰, 아름답게 노는 것이다. 그에게는 삶은 중요하지도 불합리하지도 않으며 그저 아주 단순히 존재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없는 무한반복의 삶이라는 놀이판은 끊임없이 변주된, 그러나 근본적 차이가 있을 수 없는 동어반복인 셈이다.

인생은 반복이다. 오늘은 어제의 동어반복이며 나는 남의 반복이다. 달라지려고 해도 달라지려는 것 자체가 평범한 게 되고 말며 게다가 그게 힘들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류의 동네 장기 같은 훈수라든가, '소년은 어제와 오늘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답니다'와 같은 (중략) 전통있는 사탕이 여전히 극성을 부리고 있다.-'호랑이를 봤다'의 작가의 말

그리하여 성석제 소설에는 끊임없이 돌고 도는 인간군상들의 통속적이고 진부한 인생유전이 장중하고 유장하게 펼쳐진다. 부잣집 딸과 결혼하고, 카바레에서 바람나고, 이혼하고, 암에 걸리고, 그래서 결국 죽고만다는 형과 아우 이야기('붐빔과 텅빔'), "돈많은 광부와 결혼해서 평생 놀고 먹는 것을 꿈꾸는" 한 남자의 여성편력 ('욕탕의 여인들'), 작부의 아들로 태어나 모진 환난과 시련을 딛고 도둑 중의 도둑으로 우뚝 서는 이치도의 인생편력 ('순정'), 한 남자에게 유린당하고 첩실이 되어 한평생 굴욕과 배신 속에 살아온 하세가와 도미코라는 일본 여인의 기구한 인생역정 ('유랑'), '쾌활 냇가의 명랑한 곗날'에 모인 잡다한 인간 군상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보여주는 인생유전은 "봄날처럼 붐비고 다양하고 충만한" 붐빔 속에 떠도는 소란스럽고 요란한 풍문처럼 지극히 통속적일 뿐이다.


무한반복으로서의 삶, 이 안에서는 자유롭고 능동적이며 자기 동일적인 주체로서의 삶에 대한 환상이나 형이상학적 열정, 존재론적 탐색이나 계몽의 의지가 있을 수 없다. 있다면 그것은 평균적인 삶을 초월하는 방식이 아니라, 평균 이하를 저공낙하하는 인물들의 '자주적이며 주체적'인 비속한 삶에 있다. 아무리 위대한 역사적 사건이라도 반복되면 소극(笑劇)이 되어버리는 이 무한반복의 삶에서는 동일자로서의 개체, 혹은 특수한 개인, 문제적 개인은 거대한 '인간'이라는 류(類)적 개념 속에 묻혀버린다. 그리하여 류적 개념으로서의 그들은 '기역', '리을' '미음' 혹은 '놀이하는 인간' '술 마시는 인간' 등의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 속에 분류되어 개성을 상실하고 보편적 '인간'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을 유영할 뿐이다.


이들 내면이 없는 인간, 숨겨진 심층이 없는 인간들에게 있어서의 인간관계는 다만 피상적이고 희극적일 뿐이다. 따라서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인간관계인 남녀관계에 있어서조차 그 통속성을 면치 못한다. '욕탕의 여인들'이 보여주는 '애정행각'이 그러하고, '통속'에서의 '기역'과 '리을'의 불륜이나 바람둥이 '미음'의 엽색행각, '칠십년대식 철갑'에서의 원두와 향아와의 '거들'을 둘러싼 우스꽝스런 신경전이 그러하다. '순정'에서의 이치도의 '왕두련'에 대한 순정조차 이 삶의 거대한 통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류적 개념으로서의 인간에게는 개인의 최후의 영역이자 절대적 동일성에 대한 염원인 '사랑'이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다만 통정(通情)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80년대 이후의 소설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불륜의 테마들은 성석제의 소설에 있어서 존재론적 탐색으로서의 일탈이 아니다. 오히려 불륜 또한 삶의 어쩔 수 없는 한 부분이라는 의식, 그리하여 '심슨 부인의 위대한 사랑'조차도 일종의 우스꽝스러운 '오입'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근대가 발견한 주체적 실존으로서의 '개인'의 실종은 성석제 소설에 나타나는 시공간과도 관련된다. '은척'으로 상징되는 성석제 소설의 공간, 예를 들어 '조동관 약전' "순정" "왕을 찾아서" "궁전의 새" 등의 공간은 지방의 소도시 혹은 변두리로 설정되어있지만, '텔레비전이나 신문, 라디오'도 없는, 그래서 은관 형제의 이야기나 깡패와 도둑의 활약상에 대한 소란스러운 풍문만이 '유일한 뉴스이고 연재소설이고 연속극이자 신화'인 설화적 차원의 공간이다. 그곳은 '홍길동전'의 조선중기라도 좋고, '돈키호테'가 살던 스페인의 어느 중세시대여도 좋다. 따라서 그곳은 고전서사의 영웅담의 펼치는 '현장성'만이 있지, 구체적인 역사성과 현실성을 잃어버린 초월의 공간인 것이다. 일종의 신화적 공간이자 가상의 공간인 그곳에서는 인간의 기원과 본질과 역사와 개인의 실존은 괄호로 묶이고, 원환적인 삶의 연쇄와 환유들만이 펼쳐지는 것이다.

4. 외디푸스 서사 비틀기와 농담

그러나 작가가 선택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길, 세속의 다양함에 대한 숭상"('홀림'의 작가의 말)은 세속적 가치의 숭상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 통속적이고 세속적 인간들이 보여주는 위선과 허위의식에 대한 작가의 냉소적 태도에서 그것은 반속(反俗)적이며, 이러한 세상에 들고나는 인간의 허망한 삶을 유희적 차원에서 그리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것은 탈속(脫俗)적이기까지 하다.


성석제 소설의 통속성의 핵심은 신성하고 숭고한 일체의 것에 대한 탈신비화 내지는 비속화의 전략이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 속령화된 기존 가치의 엄숙함과 권위에 대한 전복과 도전, 이것이야말로 성석제의 우스꽝스럽고 비루한 인물들과 부정적 영웅들이 의도하는 바이다. 고전 영웅서사들에 대한 패러디인 '조동관 약전'이나 '왕을 찾아서' '순정'의 주인공들은 난세를 구하는 진짜 영웅들이 아니라, 오히려 질서와 풍속을 어지럽히며 혹세무민하는 깡패나 도둑들이다. 이러한 전도된 영웅서사는 기존의 억압과 금기의 독사(doxa)와 싸우는 성석제만의 독특한 전략전술을 보여주고 있다. 즉, 기존의 권력과 권위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닌 희화화라는 우회적 전술로서의 '웃음'인데, 이것은 강고한 적에 대적할 수 없는 자가 정공법이 아닌 편법으로 고안한 일종의 꾀바른 술책인 것이다.


퇴역 군인인 아버지와 나, 그리고 형과의 끊임없는 투쟁에 관한 기록인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는 일종의 '아버지에 대항하는 아들' 이라는 외디푸스 서사의 세속적 진전(주:프로이트에 따르면 인류 정신생활의 상수로 간주되는 '외디푸스 콤플렉스'는 억압의 세속적인 진전과 함께 현대 소설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즉, 애초에 소포클레스의 '외디푸스 왕'에서 가장 순수한 꿈의 소망 충족의 실현으로 발현되지만, '햄릿'에 이르러서는 억압된 채로 존재하며, 그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된다는 것이다.)에 따른 90년대식 비틀기로 읽을 수 있다. 언제나 형과 나에게 '보안사령관'처럼 군림하고, '감시'하고 '처벌'하는 아버지는, 사실 알고 보면 소심하고 쩨쩨하고 유약하고 우스꽝스러운 퇴락한 늙은 군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그에 대한 나의 패배와 굴종조차 거짓이며, 일종의 강자의 아량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적을 무장해제하고 우스꽝스럽게 만들면서 얻는 부전승, 세상의 모든 것은 거짓이며 따라서 '순수한 거짓말, 지독한 거짓말, 가짜 거짓말, 진정한 거짓말'이 있을 뿐이라는 '위악'과 '위증'의 전술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위대한 모독자이자 '반칙왕'인 이 이야기꾼이 늘어놓는 날렵하고 통쾌한 입담이 불러일으키는 이 '웃음'은 무엇인가? 첫째, 성석제 소설에 있어서의 그것은 대상을 희화화하고 비웃고 조소하지만, 교정적이거나 교훈적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측면에서 풍자적 관점에서 빗겨난다. 이 웃음이 상대화하는 것은 주로 권위적인 '아버지'와 '조동관 약전'의 번쩍거리는 견장과 훈장을 자랑하는 '공권력', '쾌활 냇가의 명랑한 곗날'의 증경회장, '순정'의 대기업 회장과 같은 권력의 표상이지만, 낭만적 사랑이나 작가를 대변하는 비교적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화자조차 이 대상에 벗어나지 못한다. 즉 이 웃음에는 우월성을 주장하는 주체가 없고, 따라서 공격이나 비판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풍자적이기보다는 골계나 해학에 가깝다. 둘째 성석제 소설의 희극성은 상황이나 서사구조에 기인하기 보다는 서술자의 담론에서 비롯된다는 측면에서 농담의 성격에 가깝다. 농담은 주로 언술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일종의 재담이다. 예를 들면 "'내 눈에 눈물이 나면 네 눈물에 피눈물이 날 것이요, 내 눈에 피눈물이 나면 네 눈깔을 빼서 다마(구슬의 일본말)을 칠 것이다'는 신조에 따라 악착같이 자객인지 지원병인지, 추격병인지 뭔지를 보내왔던 것이다"('순정')와 같은 말놀이는 철저히 구연성에 기초하는 재담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농담은 꿈과 몽상처럼 진행되는 일종의 소망충족이자 '쾌락원리'의 가장 소란하고도 가시적인 표현이다. 청자의 적극적인 동의 아래 이뤄지는 농담의 목표는 듣는 제 3자도 우리의 적에게 적대적이 되도록 설득하는 것, 공격의 대상인 적을 왜소하고 경멸적이며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우회적으로 그를 이기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제 3자는 재담을 듣고 웃음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승리를 향유하는 것이다. 셋째, 이러한 농담이 차례로 맞서 싸우는 대상이 '이성, 비판적 판단'과 같은 근대적 사유이자, 단일한 개인 주체에 대한 해체라는 점에서 탈근대적 성격을 지닌다. 웃음의 악마적 성격에 대해 성찰하고 있는 보들레르에 의하면 "모든 지식과 모든 권력의 근본에는 희극의 세계는 없다. 오직 타락한 인간만이 웃을 수 있고, 희극은 절대자가 아닌 상대자의 예술"이다. 따라서 농담은 이성과 사유, 진리의 담론이 아니라, 육체의 담론이며 감각과 놀이의 담론이자, 오류의 담론인 셈이다. 이 감각과 놀이의 공간 속에서 의식에 억압되어 있던 '무의식'이라는 타자성은 자기를 드러내면서 인간의 본원적인 이중성과 분열상을 드러낸다. 인간이 행위의 주인, 역사의 주인이라는 신화가 무너지고, 자신의 행동이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배반하는 역설적 상황과 분열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는 이러한 농담은 근본적으로 아이러니의 한 표현일 수밖에 없다. 성석제 소설의 희극성은 따라서 삶의 비극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에서부터 출발하지만, 이러한 비극성과 맞서 싸우는 전략으로서의 '웃음'에 공격과 비판의 신랄함이 없다는 면에서 풍자나 냉소가 갖는 반성적 차원과 궤를 달리한다. 즉, 비판과 개선을 목표로 하지 않는 성석제 소설의 웃음은 이러한 역설과의 대결 국면 자체를 부정하고 와해시켜버리는, 그리하여 아예 대립되는 지점들을 없애버리고 '초월'과 '망각'의 차원으로 끌어내린다. 결국 성석제 소설의 웃음이 목표로 하는 것은, 모든 가치를 상대화하고 타락시킴으로써, 참과 거짓,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와해시켜버리는 것이다. 진리가 오류가 되고 오류가 참이 되는, 사실이 허구가 되고 허구가 진실이 되어버리는, 사랑이 '오입'이 되고, '통정'이 순정이 되어버리는 뫼비우스 띠와 같은 역설 속에서 죽음은 삶이 되고, 삶은 죽음이 된다. 그러니까, 이러한 웃음 속에 펼쳐지는 가치의 역전과 세속화는 결국 모든 것이 허망하고 무의미하다는 허무주의에 다름 아니다. 성석제 소설에서 '웃음'을 통해 날개를 달고 생기를 얻는 것은 결국 이러한 비속한 인물들, 놀이하는 인간들, 즉 무가치와 무의미의 장에서 가장 '주체적이고 역동적'으로 살고 있는 영웅들인 것이다. 이들 비속한 영웅들이 맞서 싸우는 것은 사실, 진리나 사실이나 본질이 아니라, 진리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의미를 지키는 머저리 경찰'인 것이다.

5. 그곳에는 어처구니가 산다

애초의 이 글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보자. '천일야화'의 샤리아르 왕이 세헤라자드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기 전, 그는 왜 그 수많은 죄없는 여인을 죽였을까? 샤리아르 왕에게는 멀리서 자신의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동생이 있었다. 형의 초대를 받아 집을 나선 동생은 어쩌다 자신의 왕비와 흑인 노예 사이에 벌어지는 정사를 목격하게 된다. 왕비와 흑인 노예를 죽여버리고 형의 왕국에 도착했을 때, 그는 형수에게서 똑같은 모습을 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형, 샤리아르 왕 또한 이들을 처형해 버리고, 동생과 함께 먼 길을 떠난다. 길을 떠난 두 형제가 만난 것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무시무시한 마신(魔神)을 속이고 온갖 남자들과 놀아나는 아름다운 여인의 실체이다. 그러니까, 샤리아르 왕이 길에서 맞닥뜨린 것은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한 나라의 통치자는 물론 마신조차 비켜갈 수 없는 이 삶의 허망함, 삶의 어이없음이라는 무시무시한 '허무'인 것이다. 이 도저한 허무주의에 빠진 왕이 결국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와서 벌인 죽음의 카니발은, 결국 배신과 허위의 가면을 쓰고 있는 '진리와 의미의 실체 죽이기'였던 것이다.


'그곳에는 어처구니가 산다'라는 산문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기이한 이야기들을 들고 나오기 전에, 성석제는 시인이었다. 그의 시작(詩作)이 성공적이지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낯선 길에서 묻다'라는 시집을 갖고 있는 시인이었다. '낯선 길'에서 그는 무엇을 물었던가? 진실을 추구하는 가장 진지하고 원초적인 예술형태라는 측면에서 시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과 공포라는 비극적 비전을 내포한다. 시인 성석제 또한 모든 진지한 예술가들의 출발점, 즉 심원한 곳으로부터의 모든 문제 가운데 가장 최초이자 최후의 문제인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그가 시적 여정에서 발견한 것은 혼돈과 부조리와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갇혀버린 인간의 존재, 자기 증오와 모멸 가운데 존속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비극적 운명이다. 감정의 치열성만이 시적 진술에 대한 증거가 되는 시의 세계에서 시인의 열정은 "우리에게 죽음은 가장 흔한 정거장이었다. 그는 그 중 하나를 찾아갔을 뿐이다"('파리는…찾아다닌다])라는 역설과 "진실을 진실을 말한다면 뭐라 할 것인가"('꽃피는 시절'), "살아있음이 악인 존재의 가벼움"과 같은 위악과 냉소, 그리고 "지난 사랑과 다가올 길이 여기서 만나느니/이 하잘 것 없는 깨달음을 위하여/공연히 머리 그을리며 연기의 번제 올린다"('쓰레기를 태우면서')와 같은 비관적 허무주의에 바쳐진다. 죽음과 삶의 부조리가 도처에 깔려있는 이 존재론적 탐색의 여정에서 성석제는 그리하여 다시 묻는다. "이대로 달아나기만 해야 할까. 이 낯선 길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닭') 결국, '낯선 길에 묻다'라는 이 한 권의 시집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 삶의 부조리와 죽음에서 오는 비극성, 삶의 덧없음에 대한 정직한 고백인 셈이다.


이러한 허무의식에서 비롯된 비극적 태도는 이후 그의 소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대체로 그것은 작가의 의뭉스러운 입담 속에 웃음으로 와해되어버리지만, 때론 반어적으로 때론 풍자적으로, 때론 진솔하게 노출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상의 '날개'의 패러디적 성격을 띤 '새가 되었네'라는 작품은 평범하고 지극히 낙천적인 한 가장이 현대의 자본주의 논리에 희생되어 파산에 파산을 거듭하고 아파트에서 몸을 던지는 죽음의 과정을 비극적 정조 속에 담고 있다. 이러한 비극적 정조를 견딜 수 없어 하는 작가 특유의 기질 속에 주인공의 자살이라는 비극적 몸짓은 '새가 되었네' 라는 농담조의 환유 속에 가볍게 날아오르지만, 전체적인 소설의 무거움은 그 부피와 밀도를 부려놓지 못한다. 한 아이의 성장과정을 아름다운 시적 리듬과 동화적 분위기로 담은 '황금의 나날', 뺑소니차에 희생되어 참담하게 죽어간 소년의 이야기인 '경두'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허무주의에서 비롯된 비애와 페이소스는 어쩔 수 없이 정체를 드러내고 마는 것이다.


결국 시적 여정에서 맞닥뜨린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비관론적 인식은 그의 '무의미와의 놀이'의 기원이 되는 셈이다. 어쩌면 이것은 작가의 시작(詩作)이 동시대적인 작가들처럼 문학의 역사와 실천에 복무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작가가 놓인 9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이 가져다 준 '환멸'과 '허무의식'과 동궤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진리의 부재, 역사의 종언, 동일성 해체 등의 커다란 혼돈을 일찌감치 자신의 시적 탐구 속에서 스스로 간파하고 허무의 심연에 도달한 시인이 결국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혼돈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길은 여전히 있다. 이 근처에서는 이 길만이 진실('어두운 길')'인 삶에서 죽음이 아니라면, 절망이 아니라면, 그것은 어처구니라도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래 묵은 책 냄새가 나는 그 방, 반지르르한 바닥, 낡은 소파가 있고 이상한 형광등이 매달린 그 방, 그러나 방이 비었다. 주인은 오래전에 떠났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누군가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무엇인가, 방이라도 살고 있으리라. 나는 그곳에 내 첫사랑이 살고 있기를 바란다. (중략) 나는 그곳에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가 와 있기를 바란다. (중략) 그들이 오지 못한다면 그곳에 어처구니라도 살아주었으면 좋겠다. 어처구니는 나와 몇 해 전에 전에 어느 책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는 '상상보다 큰 물건, 사람'이라고 풀이되어 있었다. 나는 상상보다 큰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데 그 어처구니가 그 방에 살아준다면 적당할 것 같다. 그 방은 이제 나의 상상보다 충분히 크고 아름답고 오래되었으리라. -'홀림', '방', 따옴표 : 인용자

6. 숭고한 유머

'어처구니'의 발견은 일종의 '인간의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부질없는 질문을 괄호에 묶는 것이다. '진리는 없다', 혹은 '있어도 알 수 없다, 알아도 전달 할 수 없다'는 식의 불가지론이나 허무주의는 인간이 스스로의 유한성을 철저하게 자각하는 속에서 발생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니힐리즘의 내밀한 본질은 모든 가치들의 전환과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존재망각이다. 존재망각이란 존재를 사유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와 아울러 존재와 공속 관계에 있는 무(無)를 사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석제 소설은 이러한 건강함의 한 형식인 망각술로서의 '이야기' 와 '웃음'을 통해, 인간 앞에 놓인 죽음과 허무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난다. 그렇다면, 성석제 소설은 '소설은 일종의 물음이며, 탐구이며, 발견이며,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일'이라는 소설의 궁극적인 존재방식에 대한 망각이기도 한 것인가? 앞서 시적 여정에서 맞닥뜨린 삶의 부조리와 어쩔 수 없는 희극성에 대한 인식과 함께,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성석제는 또다시 망막하게 펼쳐진 길 위에서 선다. 그리고 다른 방식의 여정을 떠나는데, 그것은 '길 찾기'가 아닌, '길 안 찾기', 혹은 오롯한 하나의 길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없애고, 다만 끊임없는 떠나고 돌아오는 길을 인정하는, 다양함과 다원성에 대한 탐색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버려지고 황폐해져버린 주변의 무수한 길들, '세속의 길', 민담, 설화, 고전서사의 '오래된 길', 순정한 허구와 같이 '없는 길'에서 '인간'이 된다는 먼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심심하고 평범하며 한심한 가짜투성이와 부딪치고 맞닥뜨리는 삶의 행로이지만 어느 구석에, 그래, 네 인생이 바로 '그것'이라는, 나아가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존재의 오의(奧義), 삶의 비의(秘義)가 올굳게 다물고 있지는 않을까. 가까이 가게 되면 입을 쩌어억 벌리며 어흥, 소리치는 건 아닌지. 돌고 돌다 보면 언젠가는 '그것'을 만날 것이다. 그 순간이 호랑이처럼 나를 잡아먹는다 하더라도 좋다. 그런 생각이 이 소설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 "호랑이를 봤다"의 작가의 말

그것은 가짜투성이의 삶의 행로이고 어쩔 수 없는 삶의 통속성을 통감하는 길이지만, 그 속에서 '인생이라는 존재의 오의(奧義), 호랑이'를 만나지 못한다하더라도 그는 절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것은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라 '어처구니'라도 있음, 어처구니와의 즐거운 유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상상보다 큰 물건, 사람', 수많은 유쾌하고 비루하고 보기드문 인생과의 만남 속에서 엄청나게 어처구니없는, 그야말로 그를 '압도'하는 '숭고한 어처구니'를 만난다.


최근에 발표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라는 작품집에는 이러한 '숭고한 어처구니'들이 살고 있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의 황만근은 성석제의 이전의 인물들처럼, 어리석고 무용하고, 철저하게 무의미한 삶을 사는 인물이지만, 타락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부정적 영웅이 아니다. 그는 팔삭둥이에다 '반근이, 반푼'으로 불릴 만큼 좀 많이 모자라고 가난하지만, 깡패도 아니고 도둑도 아니며 노름꾼도 아니다. 부지런한 술주정뱅이긴 하지만, 홀어머니와 업둥이 아들을 하늘처럼 여기는 극진한 효자이자 자애로운 아버지이며, 마을에서는 염습, 산역, 풀깍기, 도랑 청소 등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최고의 허드렛일 전문가이다. 그는 농가부채와 연쇄파산으로 농민궐기대회이니, 융자금 상환이니 하는 무거운 대화가 오가는 속에서도 자신의 술차례만을 생각하는 모자란 인물이지만, 현실의 우울한 풍경 속에서도 "참 똘똘하기 잘도 돈다. 저 빌(별)들 말이라. 시계맨쭈로 하루도 쉬지 않고 똑딱똑딱 나왔다가 들어갔다, 나왔다가 들어갔다 하지 않는기요." 라며 참으로 낯설고 오랜 '진실'을 보는 자이다. 또한 그는 부채도 없으면서, 그저 마을회관에서 몇 잔의 술을 얻어먹고는, 마을회관에서 결의한 대로 '농가부채 해결을 위한 전국농민 총궐기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다 낡아빠진 경운기를 끌고 외로이 홀로 백릿길을 달려, 약속장소인 군청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얼어죽어버리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순진한 바보'인 것이다.


'천애윤락'의 동환도 이와 별다르지 않은 인물이다. 가진 건 불운 밖에 없는 동환은 친구들과 아내와 운명에게 천대받고 학대받으면서도, 자신의 고통 속에서 타인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어하는 그지없이 착한 바보이다. "모두 다 아득히 먼 곳을 떠도는 외로운 사람 어쩌자고 서로 만나 알게 된" 이 우연하고 기이한 만남 속에도 자신을 둘러싼 인간에 대한 애정과 호의를 잃지 않는 대책없이 착한 사람인 것이다.


이 두 편의 작품에서 작가는 여전히 능청스럽고 의뭉스러운 입담과 장난기로 끊임없이 독자를 웃게 만들지만, 그 웃음은 이전 소설의 '통쾌하고 산뜻한' 웃음만을 지향하고 있지 않다. 그 웃음은 이상한 페이소스와 함께 오는 따뜻한 웃음, 비애가 섞인 복잡한 웃음인, '유머'인 것이다. 난장판이 되어버린 이 소란스러운 삶의 풍광 속에서 "남의 비웃음을 받으며 살면서도 비루하지 아니하고 홀로 할 바를 이루어 초지를 일관하는" 황만근이나 동환같은 인물들이 펼치는 희비극에서 느껴지는 웃음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숙연한 웃음, 허무와 유희와 상상력을 압도하는 어처구니없는 '숭고'한 웃음이다.


한때 히피의 성경이기도 했던 헤르만 헷세의 "황야의 이리"의 문제적 인물, 하리할러가 가 오랜 방황 끝에 도달한 지점에서 발견한 것은 '유머'였다. 그는 유머를 통해, 즉 '웃는 법'을 배움으로써 자아의 분열을 극복하고, 시민사회와 화해할 수 있었다. 유머는 경험적 세계의 무한성과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는 것이고, 모순된 삶을 정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미치지 않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며, 인간의 무한한 다양성을 유희적으로 자신 안에 실현시킬 수 있는 힘이며, 시간과 죽음을 상대화함으로써 현재적 삶을 즐길 수 있는 힘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상과 유희를 통해 경쾌하고 희극적인 세계를 열어보여 주었던 작가 성석제가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서 발견한 '유머'는 그의 소설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그리스도적 백치'에 가까운 이 '어처구니'들은 비속하고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추락하면서도 타락하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의 먼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자, 세속의 다양함과 유쾌한 웃음 속에서도 '진정성'을 잃지 않는 소설의 존재 방식에 대한 모색이다. '죽음과 허무'를 '웃음과 유희'로 지우고, 수많은 세속의 다양함 속에서 '인생의 비의(秘義)'를 탐색해온, '웃음의 가장 진지한 탐구자'이자 '망각술사'인 작가 성석제가 도달한 것은 어쩜 이러한 순진한 바보들의 웃음인지도 모른다.

비밀결사의 강령, 구성원의 공통된 인간이었다. 불운한 인간, 시대의 톱니바퀴에 걸린 평범하고 소박한 인간, 서민, 군중, 다수. 그들을 위해 언제든지 눈물 흘릴 수 있는 일체감, 진실한 애정, 인간을 가엾게 만드는 부조리에 대한 비판, 풍자, 저항. 그러한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들의 결사도, 그들의 이름도 불후할 것이다. 나는 일단 이 비밀결사의 이름을 '따뜻한 인문주의자'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 결사의 이름을 공표하는 것은 아직 빠르다. 아니, 이름 따위는 없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충성하려는 것은 이름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명목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 특히 더럽고 가난하며 고통받은 모든 인간의 웃음, 최대의, 최후의, 최고의 웃음. 웃음이야말로 그들의 투명한 배지이며 찬란한 표징이고 가슴 속에서 항상 펄럭이는 국기이다. 내가 영합하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이 나를 알리는 없지만. -"그곳에는 어처구니가 산다",'비밀결사'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의 순진한 바보들에게서 작가는 더럽고 가난하며 고통받는 모든 인간의 웃음, 최대의, 최후의 웃음을 발견했을지 모른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세속의 길에서 발견하고자 한 존재의 오의(奧義)의 실체인지도 모르고, 혹은 그도 아니라면 정말로 어처구니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이 순진한 바보들과 함께 '따뜻한 인문주의자'들의 모임인 비밀결사의 투명한 배지를 단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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