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실 한 올이 툭 끊어진다. 허리를 구부리고 베틀 위로 고개를 들이민다. 끊어진 실 한쪽이 잉아 너머로 달아나 있다. 오른손을 뻗어 기둥에 매달린 솜을 뗀다. 끊긴 실 양 끝을 왼손 엄지와 검지에 쥔다. 버드나무 솜털만큼 뜯은 고치 솜을 왼손 엄지로 굴려 도르르 말아준다. 감쪽같이 실이 이어진다. 도투마리에서 풀려나온 실들은 잉아를 지나 바디까지 길게 펼쳐져 있다. 베틀에 걸려 있는 사백 올의 날은 끊어질 듯 당겨진 현 같다. 단조로운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팽팽한 현. 깊게 숨을 들이쉬며 다시 베틀을 밟는다. 씨실을 풀어내는 북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진다. 찰칵슥삭찰칵슥삭. 잉아에 걸린 날들이 어지럽게 출렁인다. 솟구쳐 올랐다 내려가는 날들에 지루한 눈길을 붙박는다. 벌써 아침이다. 도투마리에는 아직 실이 남아 있다. 자꾸만 끊어지는 실 때문에 베 짜는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실들이 바싹 말라 있는 탓이다. 밤새 틀어놓은 가습기도 별 소용이 없다. 눅눅한 여름 습기가 덮치기 전까지 실은 여기저기서 툭툭 끊어질 것이다. 눈앞으로 휘휙 빛줄기가 지나간다. 뿌연 창 너머에서 쏟아진 빛이 베틀 위로 풀어지고 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먼지들이 느릿느릿 방안을 떠돈다. 삼십 년 된 낡은 베틀 다리는 눌어붙은 시간을 보여주듯 반질반질 닳아 있다. 북 줄을 끌어당기던 손을 나도 모르게 내린다. 오른쪽 머리가 지끈지끈 쑤시기 시작한다. 눈을 질끈 감는다. 관자놀이를 지나는 핏줄기의 떨림이 눈꺼풀로 옮겨온다. 순간 수십 마리 나방 떼가 어른거린다. 힘을 주어 눈을 뜬다. 열 필씩 타래를 지은 실이 선반에서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본다. 비스듬히 놓여 있는 물레와 씨실 뭉치를 담은 비닐이 보인다. 그 옆으로 쌓여 있는 도구들을 차근차근 눈으로 훑는다. 모서리에 구멍이 난 북, 촘촘한 살들이 비치는 바디, 먼지를 뒤집어쓴 도투마리……. 한쪽 구석이 허전하다. 베 상자를 두었던 자리다. 사흘 전까지만 해도 베 백 필을 담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누렇게 바랜 벽지에 떠오른 네모난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텅텅,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유리창이 파르르 떨린다.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현관으로 다가간다. 반투명 유리 너머로 시커먼 형체가 어른거린다. 누군지 묻는 목소리가 조금 떨려 나온다. 등줄기로 땀이 솟는다. 손잡이를 잡는 손에 끈적한 거미줄이 감긴다.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던 것이다. 열리는 문을 피하려는 듯 그림자가 뒤로 물러난다. "붙잡혔대요?" 현관으로 들어서는 청년의 목소리는 들떠 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머쓱한 표정으로 청년은 머리를 쓸어올린다. 뻣뻣해 보이는 곱슬머리가 비죽비죽 치솟는다. 청년이 한 걸음 비켜서며 옆으로 몸을 돌린다. 잠을 이루지 못한 듯 붉어진 눈이 불안해 보인다. 형사는 유력한 용의자로 이층 청년을 지목했다. 근처에 좀도둑이 설쳐 날밤을 새고 있긴 한데……. 사람 속은 알 수 없는 거니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도 있고. 미묘한 웃음을 흘리며 형사가 말했다. 묵은 먼지가 수북이 쌓인 방바닥엔 잘라낸 실 거스러미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바닥을 골라 딛던 형사는 북을 거꾸로 들고 아래 달린 도르래를 손바닥으로 굴렸다. 옛날 베틀과 다르네. 도둑을 잡는 일보다 개량된 베틀을 구경하는 데 형사는 더 흥미를 가진 듯했다. 꾸리 실을 담은 카누 모양의 북은 모서리가 닳아 조금 뭉툭해져 있었다. 어쨌든 아는 사람이 한 짓이오. 바짓단에 묻은 실오라기를 털면서 형사는 아는 사람이란 말에 힘을 실었다. 줄이 묻은 손바닥이 점점 끈끈해진다. 청년이 머리 위에 걸린 거미줄을 걷어내려 손을 뻗는다. "내버려둬요."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지른다. 움찔 놀란 청년이 쳐든 팔을 슬그머니 거둔다. 소매를 걷어올린 팔뚝에 굵은 핏줄이 꿈틀거린다. "불을…… 피우려구요." 팔짱을 끼면서 청년이 말한다. 어제 저녁 병원 가는 길에 청년은 할머니의 수의(壽衣)를 부탁했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였다. 나는 청년의 어머니가 아직 수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문득 떠올렸다. 청년이 말없이 돌아선다. 갈색 셔츠 등 아래쪽으로 구김살이 가득하다. 보호자 대기실에 있던 긴 의자들이 눈앞에 떠오른다. 떠가는 뗏목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던 밤색 의자들. 청년은 무수한 사람들이 뒤척였을 의자에 웅크리고 누워 새우잠을 잤을 것이다. 실을 날거나 맬 때마다 도움을 받으면서도 한 번도 할머니의 수의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은 탓도 있다. 실을 날고 매는 일은 일당으로 계산된다. 청년이 숯을 만드는 일도 할머니의 일당에 포함된다. 매캐한 연기가 바깥에서 날아든다. 청년이 불을 피우기 시작한 모양이다. 갑자기 마음이 바빠진다. 늦어진 베 네 필 때문에 어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오른쪽 이마를 꾹꾹 누르며 베틀 방으로 들어간다. 구석에 놓인 홍두깨를 집어들고 잠시 머뭇거린다. 베틀 다리 아래 두텁게 쌓여 있는 먼지가 보인다. 낯선 침입자가 들어왔을 때 먼지 위로 가벼운 바람이 일었을 테지. 베 도둑은 손전등으로 방 안을 비췄을지도 모른다. 베틀과 물레와 구석에 처박힌 도구들이 차례로 불빛 속에 떠올랐겠지. 베는 두 개의 상자에 나뉘어 담겨 있었다. 두 필씩 끊어 단단하게 말아 차곡차곡 넣어두었다. 침입자는 허리를 구부린 채 베 상자들을 들고 살금살금 마루로 나갔을 것이다. 아니, 아무도 없는 걸 알고 좀더 대담하게 나갔을지도 모른다. 마루를 쿵쿵 밟으면서. 주문받은 백 필을 넘기고 나서 좀 쉴 계획이었다. 더 이상 베를 짠다면 몸이 너덜너덜 닳아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 필이라니. 반 년 동안 방에 처박혀 짠 것들이다. 꾸덕꾸덕 마른 베가 스르르 바닥으로 떨어진다. 삼베 끝자락을 홍두깨에 말아 단단하게 감기 시작한다. 구김이 가지 않게 양 끝을 잡아당긴다. 맞물린 날실과 씨실, 어느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 장의사집 조 여사는 어그러진 베올을 귀신같이 잡아낸다. 까다롭고 말 많은 그녀에게 베를 넘길 땐 더 신경이 쓰인다. 스삭스삭 두툼하게 베가 감긴다. 방망이로 베를 두드린다. 베 뭉치는 포근한 느낌이 든다. 관 속에 누운 사람들은 정작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베올이 굵고 거칠거나 가늘고 부드럽거나, 맞물린 짜임이 어그러지거나 고르거나……. 어차피 수의는 몸과 함께 썩어갈 테니. 탁탁, 방망이를 두드리는 오른쪽 어깨가 뻣뻣하다. 내리치는 팔의 감각이 조금씩 무뎌진다. 베 위에 광목을 덮어씌우고 올라서서 발로 꾹꾹 누른다. 거미 한 마리가 천장에서 내려온다. 긴 더듬이 같은 다리를 가진 집유령거미. 베틀 위로 줄을 내리곤 하던 놈이다. 베를 밟는 몸이 조금씩 기우뚱거리기 시작한다. "바람을 잘 탄 거미는 멀리 날아가지." "바람?" 나는 끈끈하게 얼굴에 감기는 거미줄을 닦아 내며 그를 쳐다보았다. "풀줄기나 나뭇가지에 오른 새끼 거미들은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여덟 개의 다리를 쭉 뻗어 발돋움하면서 배 끝을 하늘로 치켜들지. 그 다음엔 실젖에서 수십 가닥의 거미줄을 공중으로 뽑아내어 흘리는 거야. 그리곤 바람에 실려 날아가지. 유사비행이라고 해." 포충망을 어깨에 둘러멘 채 안경알 너머로 흘긋 바라보는 그는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하는 듯했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려는 순간 그는 고개를 돌려 멀리 눈길을 보냈다. 햇빛에 반짝이며 날아다니는 풍선 같은 거미줄들이 무수히 펼쳐져 있었다. 나는 두어 걸음 떨어져 서서 빛을 반사하며 허공에 떠 있는 가느다란 실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대로 한없이 작아져 우윳빛 새끼 거미가 된다면 멀리 날아갈 수도 있다는 걸까.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걸까. 떠나가라고? 머릿속이 온통 흰빛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다. 느닷없이 내리덮치는 흰빛을 나는 미리 상상한다. 무수히 날아 오르는 칼날들의 환영. 베를 밟던 발을 헛디딘다. 가까스로 두 손을 바닥에 짚는다. 넘어지는 순간 어김없이 흰빛이 지나간다. 들떠 있는 마룻바닥이 눈앞에 가까이 있다. 긁히고 흠이 가고 군데군데 벗겨진 나무 합판을 짚고 벌떡 일어선다. 거미줄은 아주 가늘면서도 매우 강하지. 강철보다 다섯 배나 더 강하다는 거 알고 있니? 어디선가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자기 무게의 사천 배를 견딘다고 해. 사람들은 거미에서 누에처럼 실을 얻고 싶어하지만 거미는 사육이 불가능하대. 서로 잡아먹거든. 베를 밟으면서 허공에 멈춰 있는 집유령거미를 멀거니 바라본다. 강철보다 튼튼한 줄이 있다면 높이 날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먼 곳으로. 그래도 나는 다시 베를 짤 것이다. 실을 뽑아 집을 짓는 거미처럼. 한올 한올 펼쳐진 실 끝엔 낯선 사람들과 집들, 가본 적이 없는 많은 길들이 있다. 그것들은 세상의 바깥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언제나 어렴풋하다. 실들이 내주는 길을 따라가면 언젠가는 새로운 집과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광목을 들추고 홍두깨를 뽑아낸다. 두들기고 밟은 베는 매끄럽게 윤이 난다. '맞춤 수의'라고 새겨진 흰 보자기에 삼베 네 필을 싼다. 현관을 나선다. 검은 연기가 담을 타고 밖으로 몰려 나간다. 함석통 옆에 서 있는 청년과 눈이 마주친다. 이글거리는 불길에 벌겋게 익은 얼굴이 땀으로 뒤범벅되어 있다. 청년에게 보퉁이를 들어 보이고 서둘러 대문을 나선다. 모래가 섞인 듯한 바람에 살갗이 따끔거린다. 허옇게 각질이 일어난 얼굴이 바람에 쓸려 쓰라리다. 맞은편에서 갈색 파카를 입은 노인이 느릿느릿 걸어온다. 양손에 든 비닐 가방이 터질 듯 팽팽하다. 쓰레기통 옆에서 걸음을 멈춘 노인이 버려진 운동화를 주워 올린다. 문득 커다란 갈색 파카 위로 누런 수의가 겹쳐진다. 가슬가슬한 수의를 입었을 때야 노인의 얼굴은 환하게 살아날지도 모른다. 비로소 고통이 끝나게 될 테니. 엉겨붙은 흰머리 위로 노란 종이비행기가 지나간다. 이층 미술학원 간판 아래 올망졸망 고개를 내민 아이들이 보인다. 종이비행기는 노인의 몸을 한 바퀴 돌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메마른 대기를 후르르 휘젓는다. 노인이 비닐 가방을 내려놓고 올려다본다. 반쯤 벌어진 입안이 아득히 검게 보인다. 바닥에 놓인 비닐 가방에는 쑤셔박은 옷들과 낡은 탁상 시계, 꼭지 없는 법랑 주전자 따위가 비죽비죽 드러나 있다. 운동화와 비행기를 가방에 집어넣고 노인은 다시 걷기 시작한다. 큼직한 수의를 걸친 듯한 노인의 몸은 왼발을 뗄 때마다 오른쪽으로 기운다. 천당 장의사. 노란색 바탕에 검정색으로 글자가 쓰인 간판은 멀리서도 눈에 띈다. 가게 문은 늘 닫혀 있다. 검게 선팅된 유리 탓에 내부는 보이지 않는다. 가게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선다. 조금 열린 대문을 밀고 들어간다. 삐걱이는 소리에 조 여사가 고개를 쳐든다. 마루에 둘러앉은 세 여자의 시선이 내게 쏠린다. 눈에 익은 얼굴들이다. 그들은 내 손에 들린 보퉁이를 한번 흘긋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돌린다. 드르륵거리는 재봉틀에서 옷이 밀려 나온다. 요즘엔 수의를 짓는 데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는다. 매듭짓지 않은 실로 한땀 한땀 정성껏 바느질한 수의를 찾기란 쉽지 않다. "관을 열었더니 날실이 썩지 않고 그대로 있더라는 거야." 파마 머리의 여자가 눈살을 찌푸린다. 아무도 내게 앉으라고 권하지 않는다. 보퉁이를 내려놓고 마루 끝에 걸터앉는다. "끔찍스러웠겠네." "쥑일 놈들……." 세 사람 모두 쯧쯧 혀를 찬다. 조 여사가 보자기를 풀어 삼베를 확인하는 동안 나는 활짝 열린 대문 바깥을 내다본다.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대문이 저절로 열렸다 닫힌다. 수의 베는 금세 썩을 삼실로 짜야 한다. 끊기지 않는 화학사를 날실로 베를 짜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화학사가 섞인 삼베라도 눈으로 보기에는 자연 삼베와 다르지 않다. 썩지 않고 남은 날실로 온몸이 친친 감겨 있는 시신을 상상해본다. 일 년이 지났다고 했으니 살은 다 썩었을 테지. "요즘엔 주문이 많지 않아." 조 여사는 만족스러움을 감춘 덤덤한 얼굴로 말을 던진다. 베 스무 필이 필요하다면서 봉투를 건네는 조 여사의 목소리에는 베푸는 자가 보이는 거만함이 묻어 있다. 스무 필이라면 세 명 또는 다섯 명의 수의를 만들 분량이다. 수의가 아니라면 침대 시트나 한복일 수도 있다. 어렵겠다는 내 말에, 짜둔 게 많지 않으냐고 조 여사는 눈을 크게 떠 보인다. "다 없어졌어요." 없어졌다고 말을 뱉고 나자 눈앞으로 뭉쳐진 빛더미들이 휙 지나간다. 눈부신 빛그물이 얼굴을 덮치는 것 같다. 놀란 얼굴로 조 여사가 꼬치꼬치 묻는다. 백 필이면 그게 얼마치나 되느냐고 여자들이 수군거린다. 끈끈한 느낌이 드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린다. 어른대는 하얀 빛무리 사이로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던 그의 목소리가 파고든다. '갈까'라고 했던가 '갈게'라고 했던가. 대문을 닫으면서 히뜩 뒤돌아보는 순간 한꺼번에 쳐다보고 있는 그녀들의 시선과 부딪친다. 수다는 이제 베를 짜는 젊은 여자의 불행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다. "멀리 날아가기에 좋은 밤이군. 새끼 거미들처럼 말야." 사흘 전 밤늦게 전화를 걸어온 그가 대뜸 말했다. 근처에 있는 계곡에 왔다고 했다. 일 년 만이었다. 술을 마신 듯 그의 목소리는 흐트러져 있었다. 올 거냐고 그가 물었다. 나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얼마 동안 침묵이 흘렀다. 창문이 바람에 쉴새없이 덜컹거렸다. 오른쪽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바람을 맞으러 나무 위로, 바위 위로 기어오르는 새끼 거미들의 환영이 어른거렸다. 갈까? 그가 물었던가. 안 돼.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 제기랄, 배터리가 다된 모양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숨소리가 조그맣게 들리다가 까마득히 멀어졌다. 나는 한참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안 돼'라고 그에게 내뱉은 건 처음이었다. 집으로 내려온 후에도 더러 그를 만났다. 근처에 들를 때면 그는 며칠 동안 집에서 묵기도 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와 나는 술을 마셨다. 오래된 친구처럼. 미술 학원 앞 길바닥에 색종이들이 떨어져 있다. 창 너머로 새어나오는 노랫소리가 노인이 사라진 길 위로 퍼져 나간다. 아이들의 노래는 덧없이 짧게 남은 숨을 조롱하듯 가뿐하고 생기 있게 굽이친다. 길이 끝나는 멀리, 산 아래 있는 공사장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뾰족하게 솟은 철근들이 구불구불 휘어져 보인다. 집 앞에서 멈춰 선다. 칠이 벗겨진 녹색 대문과 우중충한 외벽으로 둘린 이층집. 담벼락 너머로 짙은 녹색 향나무 두 그루가 불꽃처럼 솟아 있다. 동네 사람들은 수의 베 짜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 집을 불길하게 여긴다. 언젠가는 담벼락에 '죽음의 집'이란 글자가 붉은 스프레이로 커다랗게 쓰여 있기도 했다. 검은 스프레이로 낙서를 지운 뒤부터 벽에는 사과 궤짝만한 크기의 무늬가 생겨나 있다. 마치 집으로 들어갈 수 있게 뚫린 작은 문처럼 보인다. 밖에서 안으로 또는 안에서 밖으로 가는 통로. 마을 어귀에는 어른 키보다 높게 대마들이 자랐다. 대마밭에 숨어들면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여름이 되면 대마를 잘라 대칼로 잎을 훑어냈고 물에 담갔다가 개울 옆에 내건 커다란 솥에 넣어 불을 지폈다. 온 마을이 술렁거렸고, 남자들은 모여 앉아 술을 마셨다. 대마의 겉대를 벗기고, 널고, 가리고, 빨고, 도패로 톺고, 또 널어 물에 적시고, 째고……. 베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은 백 가지가 넘는다고 했다. 마을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물에 잠겨버렸다. 댐 공사 때문이었다. 보상금을 받은 사람들은 오래 살았던 땅을 미련 없이 떠났다. 집집마다 길쌈을 했던 마을 여자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어머니는 도시로 나오면서 베틀을 들고 왔다. 일 년 뒤 훌쭉한 남자가 집으로 왔다. 얼굴이 기억 나지 않는 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에 죽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내게 남자를 아버지라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라고 부를 일은 없었다. 새아버지가 벌인 일들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베틀 소리만 아니면 집 안은 늘 조용했다. 가끔씩 잔뜩 술에 취한 새아버지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도 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작은 도시를 빠져나올 때까지 베틀 소리는 밤낮으로 이어졌다. 찰칵슥삭찰칵슥삭.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새아버지와 낯선 양옥, 꿈속까지 파고드는 베틀 소리가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차근차근 떠날 준비를 했다. 다시 돌아올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뜨거운 공기가 마당에서 밀려 나온다. 철판 위에 발그스름한 숯들이 널려 있다. 청년은 보이지 않는다. 서둘러 현관 문을 열다가 문 모서리에 발이 부딪힌다. 베틀 방으로 들어가 노끈으로 새를 묶은 실타래를 꺼내든다. 씨실과 맞물리도록 날실의 새를 나누는 일은 베 짜기에서 가장 중요하다. 새를 놓치게 된다면 실은 엉클어진 뭉치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마루에 앉아 무릎 위에 바디를 올려놓는다.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 만든 바디 살에 새를 지은 실 두 올씩을 끼워넣는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청년에게 바디를 넘겨주고 주방으로 간다. 찬장을 열고 마시다 둔 소주병을 꺼낸다. 화끈거리는 느낌이 빈속을 훑고 지나간다. 일을 시작하기 전 술 몇 잔을 마시는 게 습관이 된 지 오래다. 맑은 정신으로 자리에 앉는 건 왠지 불안하다. 들통에 담긴 풀을 들고 나온다. 치자를 우려낸 물을 섞은 탓에 풀은 카레 소스처럼 누렇다. 바디에 꿴 실을 묶고 있던 청년이 통을 내려두라 손짓한다. 마당으로 떨어지는 뜨거운 햇살에 눈이 아프다. 받침대에 도투마리를 걸친다. 실타래를 팔목에 걸고 담장을 따라 아래로 실을 풀어간다. 사백 올의 하얀 삼실들이 길게 펼쳐진다. 담벼락 아래 멈춰 서서 낡은 책상 위에 놓인 바구니에 실타래를 얹는다. 쭈그려 앉은 청년의 얼굴이 흐릿하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흰 실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고즈넉하게 흐르는 강줄기 같기도 하다. 눈부신 흰빛. 느닷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빛줄기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저거야!" 고개를 돌린 그가 손가락으로 그물 한 부분을 가리켰다. 거미줄 왼편 위쪽으로 ×자 모양의 흰 줄이 보였다. 죽음에 이르게 할 눈부신 흰빛. 햇빛을 반사하는 띠 그물에 곤충들이 날아와 걸린다고 했다. 숨은 띠로 자신의 정체를 위장하는 거라고. 그물은 아래쪽이 부서져 있었고 거미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도 어른거리는 숨은 띠를 좇아 이리저리 헤매는 거겠지. 죽는 날까지. '나의 숨은 띠는 너일까.' 거미줄에 점점이 걸려 있는 하루살이들을 쳐다보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조심스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풀숲에 떨어진 이슬에 바짓단이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다른 그물을 찾아보자며 그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해는 나무들 위로 점점 높이 떠올랐다. 마이크로렌즈를 끼운 카메라를 들고 그가 풀숲으로 들어갔다. '자연 친화적 이미지'를 주제로 하는 광고 시리즈라고 했다. 숨은 띠에 회사 로고를 집어넣었다고. 천천히 걷던 그가 우뚝 멈춰 섰다. 노란 얼룩 줄무늬가 뚜렷한 호랑거미가 그물 한가운데 바퀴통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아침 이슬을 맞은 거미줄 가까이 카메라를 들이밀면서 그는 낮게 탄성을 질렀다. 삼각대로 고정시킨 카메라로 들여다보자 위아래로 뻗은 숨은 띠와 둥근 모양의 거미줄과 호랑거미가 눈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숲 속을 뒤지며 그와 함께 본 그물들은 어느 한 군데가 조금씩은 부서져 있었다. 완벽한 거미줄은 컴퓨터 그래픽에나 있는 거라고 그가 말했다. 세상에 있는 건 오로지 얼룩무늬 호랑거미와 거미줄뿐이라는 듯 셔터를 눌러대는 그의 뒤통수를 나는 조금 서글픈 마음으로 눈에 담았다. 한줌 가득 풀을 떼어 실에 바른다. 하루가 지난 풀에서 쉬지근한 냄새가 난다. 거칠게 일어나 있는 거스러미들이 잘 달라붙도록 실을 쓰다듬는다. 실 매는 데 정성을 기울일수록 베 짜기는 쉬워진다. 청년이 뻣뻣한 솔을 집어든다. 덩이져 뭉친 풀이 고루 펴지도록 솔로 실을 훑어 내린다. 풀이 스며든 실이 레몬빛으로 변한다. 사람들은 묽게 치자물을 들인 베를 좋아한다.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조심스럽게 바디를 움직인다. 서로 달라붙어 있던 실들이 한 올씩 떨어진다. 낭창거리는 실 아래로 숯이 널려 있는 철판을 들이민다. 온도를 낮추느라 재를 뿌려둔 숯이 발그무레하게 비친다. 실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청년은 벽돌에 엉덩이를 걸친다. 담배를 피워 문 그는 하얀 실이 끝나는 실타래에 눈길을 던진다. "다 만들어지면…… 모셔 와야겠어요." 담배 연기를 날리며 혼잣말처럼 청년이 중얼거린다. 부는 바람에 길게 뻗어 있는 실 올들이 위아래로 휘청거린다. 쿡쿡 머리가 쑤신다. 지그재그 모양을 그리는 빛이 머리를 뚫고 쏜살같이 지나가는 듯하다. 청년의 어머니는 두 달째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그녀의 가슴이 위로 들썩였다. 잠들어 있는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건 꽤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로 둘러싸인 건너편 침대 쪽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빠르게 이어지는 기도 소리가 중환자실의 차갑고 건조한 소음 위로 물줄기처럼 흘렀다. 청년이 할머니의 다리를 말없이 주무르기 시작했다. 엉거주춤 선 채 나는 침대 옆 모니터에 그려지는 푸른 곡선을 보고 있었다. 청년이 허리를 굽혀 링거 바늘이 꽂힌 할머니의 팔을 들여다보다가 힘없이 늘어진 손을 들어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엄마……." 나직한 목소리로 청년이 그녀를 불렀다. 반쯤 벌어져 있던 그의 입이 천천히 닫혔다. 나는 앞으로 조금 내밀고 있는 듯한 그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엄마. 물수제비가 날아가듯 그 말은 통통거리며 가슴으로 떨어졌다. 잉아에 걸린 실들이 솟구쳐 오를 때나 슥삭 바디집을 끌어당길 때, 모서리에 찰칵이며 북이 부딪힐 때……. 이따금 그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았다. 바짝 풀이 마른다. 실을 감아야겠다고 청년에게 말한다. 끝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쥔 청년의 오른손이 희미하게 떨린다. 약지에 끼워져 있던 반지는 지난겨울부터 보이지 않았다. 청년이 꽁초를 창고 쪽으로 튀긴다. 뻣뻣하게 마른 실이 도투마리에 감긴다. 한 움큼 풀을 떼 실에 바른다. 겨자빛이 도는 풀은 더 뻑뻑해진 느낌이다. 미처 풀리지 않은 덩이 안에서 밀가루가 터져 나온다. 청년이 솔로 실을 쓸어내린다. "그래도 되겠죠?" 동의를 구하듯 청년이 크게 외친다. 대답을 바란 건 아닐 거라 생각한다. 그 물음은 나보다는 다른 누구에게, 자기 자신에게나 그의 어머니에게 또는 실을 감고 웅크리고 있는 도투마리에게 던진 것처럼 들린다. 갑자기 몰아치는 바람에 숯을 덮고 있던 재가 날아 오른다. 불티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나는 눈을 찌푸리며 벌겋게 살아나는 숯불을 본다. 재가 들어갔는지 오른쪽 눈이 아리다. 옷소매로 닦아보지만 눈은 더 따가워진다. 수돗가로 달려가 손을 씻는다. 플라스틱 대야에 담긴 물이 뿌옇게 흐려진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청년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온다. 눈을 감은 채 이리저리 눈알을 굴린다. 눈알이 움직일 때마다 깔끄러운 알갱이가 아프게 눈을 찌른다. 재가 아니라 모래가 들어간 것 같다. 나는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키며 현관으로 들어간다. 거울 앞에 서서 눈을 깜박거린다. 오른쪽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다. 핏발 선 눈으로 오랫동안 거울 속의 나를 쏘아보던 때가 있었다. 그 무렵 저녁마다 눈물을 찔끔거렸던 것 같다. 아침이면 퉁퉁 부어오른 눈에 얼음을 올려놓아야 했다. 부기가 가라앉길 기다리느라 출근이 늦어지기도 했다. 그가 떠난 지 석 달이 지났을 무렵 어머니와 새아버지가 죽었다. 두 사람이 탄 낡은 지프는 중앙선을 넘어온 덤프트럭과 충돌했다. 실을 사러 가던 길이었다고 했다. 십일 년. 떠나온 햇수를 헤아리면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은행에서 날마다 전화가 걸려왔다. 그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빚은 고스란히 내 몫으로 남게 되었다. 곧 쓰러질 것처럼 피로했지만 불면증이 계속되고 있었다. 작은 도시 변두리에 있는 허름한 양옥이 꿈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지 끝에 매달린 채 바람을 기다리는 새끼 거미들처럼, 한때 나는 그곳을 벗어나려 무던히도 애를 썼지. 장례를 치르고 서울로 돌아온 날 저녁, 나는 더 이상 어디에도 기댈 수 없다는 허전함과 무슨 일이 일어나도 거리낄 게 없다는 후련함에 젖어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여기저기 옮겨가던 눈길은 벽에 걸린 패널에서 멈췄다.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거미줄과 바퀴통에 매달린 호랑거미, 목숨을 걸어야 할 숨은 띠……. 그가 찍은 사진들이 말을 걸었다. 너는 기껏 거미줄 위를 기어다니고 있을 뿐이야. 주방으로 가 소주병을 꺼낸다. 아침부터 마신 술은 병 아래쪽으로 손가락 두 마디쯤 남아 있다. 마당으로 난 쪽문을 밀어젖힌다. 푸른 이끼가 낀 뒷담이 나타난다. 두 그루의 향나무가 서 있는 사이로 낡은 철제 책상이 있고 실타래를 담은 바구니가 그 위에 얹혀져 있다. 청년이 도투마리를 감는지 조금씩 실이 풀린다. 두 잔을 채우지 못하고 술이 바닥난다. 슬리퍼를 신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담장 아래로 다가가 실이 잘 풀리도록 타래를 흔들어준다. 얼굴에 실 같은 거미줄이 닿는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거미들이 비행한 흔적일까. 거미줄을 손등으로 닦아낸다. 멀리 날지 못하고 마당으로 떨어진 새끼 거미들은 나뭇가지 뒤에 숨어 바깥을 엿보고 있겠지. 여덟 개의 홑눈에 맺히는 빛무리는 흐릿하게 어른거리겠지. 향나무 줄기 사이로 빛이 스친다. 나는 자리에서 멈칫한다. 망막에 갇혀 있다가 불쑥불쑥 튀어오르던 빛더미가 아니다. 짧게 번지는 노란빛. 걸음을 앞뒤로 옮기면서 나뭇가지들을 살핀다. 두리번거리며 막대기를 찾는다. 사침으로 쓰는 가느다란 대나무를 집어들고 가지들을 흔든다. 뭔가 툭 떨어진다. 청년의 반지다. 윤기를 잃어 흐릿한 반지를 호주머니에 넣는다. 눈물이 나올 만큼 매섭게 추운 날이었다. 누군가 청년을 업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술에 취해 거리에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불쌍해서……. 어찌야 쓰까. 할머니는 내게로 와 같은 소리만 되풀이했다. 새벽녘 잠에서 깬 듯한 그의 울음소리가 집 안을 뒤흔들었다. 나는 파랗게 질려 있는 청년의 어머니를 내 방으로 들어와 쉬게 했다. 고르게 잦아든 그녀의 숨결 사이로 이따금씩 우우우, 괴성이 들려왔다. 살얼음이 얼어 있는 철계단을 조심스레 밟았다. 활짝 열린 이층 현관 앞에서 나는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뭉그적거렸다. 고함을 지르다 지쳤는지 청년은 벽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눈길이 잠시 내게 머물렀다. 일어선 청년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베란다로 나갔다. 얼마 동안 머뭇거림의 시간이 지났을 것이다. 청년은 덜덜 떨며 벌그름한 얼굴로 들어왔다. 청년이 반지를 뽑아들어 향나무 쪽 어둠 속으로 힘껏 내던졌을 순간, 지나간 시간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려 헛되게 애썼을 동안, 나는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강철보다 단단한 거미줄에 매달려 떠나라고 했던 그. 현기증처럼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쪽가위를 들어 실에 뭉쳐진 거스러미들을 하나씩 잘라낸다. 떨어진 실 가닥들이 생강나무 꽃처럼 누렇게 마당을 뒤덮고 있다. 어느새 해는 하늘 한가운데에 꽂혀 있다. 담장 너머로 흥겨운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놀이 기구 주변으로 들뜬 아이들이 몰려들고 있을 것이다. 청년이 노래를 따라 부른다. 그림자 길이가 뭉툭하게 짧아진 한낮, 그가 흥얼거리는 동요는 왠지 구슬프게 들린다. 호주머니에서 청년의 반지를 꺼낸다. 흘긋 쳐다보던 청년이 반지를 받아들어 풀을 먹인 날실들 위에 올려놓는다. 뜻밖에도 담담한 얼굴이다. "잘살고 있겠죠." 활달한 목소리로 그가 말한다. 청년의 손에 들린 솔이 실 위를 쓱 지나간다. 숯 위로 반지가 떨어지는 순간 청년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떠나기 전부터 낌새가 이상했지요. 젠장, 모른 척 내버려뒀어요." 청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어머니의 반대는 핑계였죠. 부담스러웠어요. 세상을 너무 많이 아는 여자와 산다는 건 좀 끔찍스럽단 느낌이 들었죠. 그러나 차마 말을 꺼내진 못했어요. 쇼윈도 너머로 남자가 보일 때면 일부러 자릴 피해주기도 했죠. 그 여자, 빚이 많았어요. 그 돈으로도 부족했을 거예요. 잘된 일이죠. 그냥 보내긴 미안했는데." 타닥타닥, 비스듬히 놓인 숯 한 덩이가 천천히 쓰러진다. 청년의 머리 뒤 멀리 높이 솟은 대학병원 건물이 보인다. 산 중턱에 지어진 하얀 건물은 도시 어디에서나 쉽게 눈에 띌 것이다. 호흡기를 뗀다면 그녀는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개 같은 새끼. 어떻게 짠 건지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저, 절대로 훔치지 못했을걸요." 느닷없이 흥분한 목소리로 청년이 내뱉는다. 무겁게 가라앉은 기분을 훌훌 털어버리려는 듯. 눈앞으로 휙휙 흰빛이 스쳐간다. 눈이 아프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개 같은 자식. 청년의 말을 마음속으로 따라 뱉는다.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숨은 띠를 향해 날아가는 꿀벌이나 하루살이들이 있다고.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맹렬한 비행의 속도가 있다고.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음성이다. 나는 목소리를 기억해내려 애쓴다. 벨이 울린다. 청년이 바지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의식이 돌아오고 있대요." 휴대폰을 귀에서 뗀 청년이 짧게 외친다. 얼굴이 치자꽃처럼 허옇다.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청년이 허둥거리며 뛰어나간다. 이번엔 마루에 놓인 전화가 울리기 시작한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형사의 목소리에서 덫에 걸린 짐승을 잡은 듯한 쾌감이 전해진다. 동네를 털던 좀도둑이 잡혔다고. 베는 벌써 서울로 넘겨졌다고 말한다. 타탁 라이터 켜는 소리가 들린다. 베를 누구에게 건넸을까. 그 베로는 수의를 만들어야 한다고 형사에게 말한다. 형사는 잠시 말을 끊는다. 연기를 내뿜는 듯한 긴 날숨 소리가 연거푸 들려온다. 수의를 만들거나 침대보를 만들거나 형사에겐 상관없는 일이겠지. 숯 위에서 바싹 마르고 있는 실을 초조한 마음으로 내다본다.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하고 형사는 전화를 끊는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마당으로 나간다. 마당에 누운 그림자들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 바람은 더 이상 불지 않는다. 도투마리에 실이 모두 감긴다. 말코에 걸 실을 묶는다. 숯은 아직 열기를 내뿜고 있다. 묵직한 도투마리를 들고 방으로 들어간다. 꾸리를 담은 종이 상자를 발로 밀쳐내고 도투마리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상자를 들어본 형사는 무슨 일로 집을 비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저 바람을 쐬러 갔다고 했다. 바람? 미간을 찌푸리며 형사가 되물었다. 그날 밤 나는 바람을 맞으러 그가 머무르는 곳과 반대 방향으로 떠났다. 수화기 너머로 멀어지던 그의 목소리가 뚝 끊기자 사방은 적막해졌다. 그는 어디론가 또 훌쩍 갈 것이고 한 달이나 두 달, 일 년이나 이 년 동안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곤 불쑥 나타날 때마다 내게 떠나라고 했다. 어디로? 나는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섰다. 더 이상 떠날 곳은 없었다. 밤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간다면 종착역엔 바다가 출렁거리고 있을 터였다. 어둠이 풀어지는 새벽 바다를 볼 수도 있겠지. 나는 종착역 대합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다시 집으로 왔다. 덜컹거리는 기차에 몸을 맡기지 않았더라면 별일 아니라는 듯 언젠가 그와 함께 묵었던 산장으로 달려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누굴까. 그의 전화일 리 없지만 벨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그의 목소리를 먼저 떠올린다. 뭔가를 더 캐물으려는 형사의 전화일 수도 있다. 열 번째 신호음이 울리는 순간 수화기를 든다. "돌아가셨어요. 도착하기도 전에……." 청년의 목소리는 꽉 잠겨 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도 모르게 주저앉고 만다. 다리를 세워 한 손으로 무릎을 감싼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실 한 올이 툭 끊어지는 듯하다. 방으로 들어가 옷장 서랍을 연다. 하얀 보퉁이를 꺼낸다. 매듭을 풀어 수의를 쓰다듬어 본다. 처음 짰던 삼베로 만든 것이다. 설핏한 베 올. 거친 올들이 손바닥을 간지럽힌다. 죽을 때 입으려고 만들어 둔 수의다. 잠들 때마다 머리맡에 수의 보퉁이를 놓았다. 깊이 잠들 수 있게. 꿈은 거의 꾸지 않았다. 아주 가끔 꾸는 꿈속에서 나는 먼지만큼 작아진 날벌레였다. 완전 둥근그물을 친 호랑거미가 거미줄 한가운데 바퀴통에 매달려 있었다. 눈을 뜰 수 없게 눈부신 빛줄기. 별똥별처럼 빠르게 숨은 띠로 날아가는 내가 보였다. 보자기로 수의를 싼다. 새로 짤 시간이 없으니 그녀에게 내줄 수밖에. 얼마 지나지 않아 올들은 썩기 시작하겠지. 새로 술병을 꺼내 들고 방으로 온다. 낡은 베틀 다리에 잠시 등을 기댄다. 일하기 전 술을 마시는 건 습관이다. 허둥거릴 까닭은 없다. 내가 입을 수의를 다시 짜면 되는 일이다. 도투마리를 들어 베틀에 올린다. 새를 나눈 실을 잉아에 건다. 바디집에 바디를 걸고 실 끝을 말코에 묶는다. 이백 올씩 나누어진 날실은 씨실과 단단하게 맞물려 바탕을 이루게 된다. 유리창을 흔들며 바람이 지나간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온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베틀을 밟기 시작한다. 씨실을 풀어내는 북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진다. 누렇게 풀을 먹인 날실들이 물결처럼 출렁인다. 솟구쳐 올랐다 내려가는 날들에 눈길을 붙박는다. 올올이 당겨진 실들 위로 그림자들이 어른거린다. 발을 까닥일 때마다 그들은 가까워지고 또 멀어진다. 춤추는 날들이 눈부시다. 옴짝달싹 못하고 숨은 띠에 달라붙은 날벌레가 된 기분이다. 머지않아 거미줄에 온몸이 친친 감기겠지. 멀리 떠나라구. 어디선가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새끼 거미가 될 수 있을까? 사백 올의 실 위로 바람을 기다리는 새끼 거미가 줄을 내린다. 실들이 노래한다. 엄마, 새끼 거미들은 어디로 날아가? 작고 연한 거미는 다리를 오그린 채 베틀의 노래를 듣는다. 찰칵슥삭찰칵슥삭. 여름이 올 때까지 실은 여기저기서 툭툭 끊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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