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 미로에 선 수집가 김연수의 서사적 행로는 꾸불꾸불 검은 선들의 뒤엉킴을 보여준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1994) 시작한 그의 서사적 행로는 변전하는 “7번국도”(『7번국도』, 1997)를 지나, 이상(李箱)의 비밀 그 “한 가운데의 검은 꽃”(『?빠이, 이상』, 2001)으로 다가가는가 하면, 대중문화적 코드가 기입된 연애소설(『사랑이라니, 선영아』, 2003)로 선회하는 등 방향을 짐작하기 힘든 미로를 그리고 있다. 미로에는 80년대의 끄트머리 혹은 90년대의 문턱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한 세대의 감수성으로 거대담론의 환상이 깨어지는 시대의 우울과 공허함을 공명하고 있는 작품집 『스무 살』(2000)과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2002) 또한 자신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김연수의 소설은 진실/거짓, 사실/허구, 필연/우연, 현실/꿈의 무수한 이분법적 경계를 넘나들면서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 〈* 보르헤스, 황병하 역,『픽션들』(민음사, 1994)에 수록된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 인용, p.145.〉 위에 서 있다. 비슷한 자리를 맴도는 듯하고, 생각하지 못한 장소에서 샛길을 발견하는 듯한 그의 서사적 미로는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수집가의 서랍을 연상시킨다. “그가 발견한 돌, 꺾은 꽃, 잡은 나비는 수집의 시작이다. 그가 가진 각각의 사물이 거대한 수집을 구성한다.” 〈* 그램 질로크, 노명우 역,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효형출판, 2005), p.179.〉 동물원이 되기도 하고, 박물관이 되기도 하는 수집가의 서랍은 사물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맥락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이미지와 구상으로 재구성되고 재배치되는 세계이다.
김연수의 재구성·재배치 욕망의 이면에는 선험적 지식과 세계를 거부하는 혹은 부정하는 비순응적 인식과 태도가 내재해 있다. 알레고리, 메타픽션, 하이퍼텍스트의 소설기법을 비롯해서 인용과 참조의 문학적 고고학·박물학으로 나아가는 그의 서사적 실험은 과감한 단절과 도약을 거쳐 서사의 외연을 팽창시켜 왔다. 이러한 단절과 도약은 그의 비순응적 인식과 태도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것의 방법적 모색에 붙들린 작가의식을 예증해 준다. 김연수는 팽창된 서사의 표면장력 속에서 ‘지금-여기’가 아닌 다른 공간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그는 ‘절망과 포기’의 포즈가 아니라 ‘야심 찬’ 서사적 모험으로 비순응적 삶의 자세를 재기발랄하게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서사적 행로에 놓인 검은 선들의 뒤엉킴과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이 글에서는 세 권의 단편소설집 『스무 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2005)를 중심으로 김연수의 “짐승의 내장처럼 어둡고 습하고 꾸불꾸불한”(「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상상의 길을 따라가며, 길 위에 선 수집가의 서사적 욕망의 지형도를 탐사해보고자 한다. ‘안/밖’을 동시에 보고자 하는 균형감각 혹은 모순과 역설에서 미로를 통과할 수 있는 실타래를 찾아본다. 2. 낭하·터널·동굴, 검은 구멍의 수수께끼:‘스무 살’ “……어느 날 나는 문득 1991년 5월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그때 나는 군대에 있었고 서울에서 전화를 받은 친구는 울먹거리고 있었다. 거대한 거짓의 현실이 우리 앞에 있었고, 우리는 패배하도록 프로그램돼 있었다. 그때의 일들이 나를 완전히 바꿔버렸다.(생략)” (김연수, 「이야기꾼이 이야기하는 창작론」, 『문학사상』, 2005년 12월호, p.268) 김연수의 첫 작품집 『스무 살』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떤 싸움에 대한 기록이다. “패배하도록 프로그램돼”있는, 불리한 입장의 패배자는 승부의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게임의 법칙과 운영 방식에 대해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싸움은 끝났지만,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누구의 싸움인가? “대충 중간쯤에서 손 흔들면서 구호나 외치다가 최루탄이 터지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스무 살」)갔던, “레닌이 아니라 그에 감화돼 청춘을 불태우는 농노가 되고 싶었던”(「마지막 롤러코스터」) ‘그들’-우리의 싸움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얼마 동안은 열심히 데모만 했”던 「구국의 꽃, 성승경」의 재민이 바로 그들 가운데 하나이다. 재민의 고독한 싸움은 “검은 기념비”의 숭고함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재민의 학교에는 80년대 운동권 학생이 분신을 하고 뛰어내리면서 “성지”처럼 된 장소가 있다. 동일한 장소에서 반복된 또 다른 투신자살이 실패로 귀결되는 순간에 기념비의 숭고함은 ‘던져진 주사위’의 한 면에 불과한 우연성으로 추락하고 만다. 우연히 목격한 이 사건을 통해 재민은 “기의 없는 기표” “텅 빈 형식”에 불과한 기념비의 비밀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작동되는 세계의 메커니즘을 눈치 채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발견은 외부 세계와 이데올로기의 텅 빈 구멍을 들여다보게 할 뿐만 아니라 재민 자신의 내부에 뚫려 있는 텅 빈 구멍을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경찰의 “토끼몰이식 진압”에 죽음을 당한 여학생을 “구국의 꽃”이란 이미지로 덧씌우려 했던 재민의 다큐멘터리 영화는 실재했던 인물의 죽음과는 무관한 “더러운 욕망 찌꺼기”였다는 자각과 함께 중도 포기될 수밖에 없다. 재민은 “구국의 꽃, 성승경”이란 “유령 필름”에 투사된 유령으로서의 자신의 실체와 마주보게 된 것이다. 작품집 『스무 살』에서 ‘텅 빔과 죽음’의 이미지는 자리를 옮겨가며 환유되면서 거대담론의 환상이 깨어지는 90년대의 공간을 왜상(歪像)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롤러코스터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던 “플라잉코스터”의 폐기처분(「마지막 롤러코스터」), “불꽃 터널” 안의 “장엄한 죽음”을 욕망했던 오토바이 폭주족의 아스팔트 위에서의 비참한 최후(「뒈져버린 도플갱어」)는 ‘좌절된 이상/깨어진 환상’의 메타포로 혹은 “극에 달한”(「스무 살」) 시대의 파토스로 이중화되고 있다. 「뒈져버린 도플갱어」에서 피사체를 모두 지워내고 여백만으로 “가장 90년대적인 공간”을 표현했던 승민의 사진은 이 작품집 전체를 아우르는 “핏기 없는” 이미지가 된다. 그런데 “그저 투명하게만 나타나는 부분들은 무(無)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뒈져버린 도플갱어」) 다시 「구국의 꽃, 성승경」으로 돌아가 죽은 누나의 검은 옷을 입고 밤거리를 배회하는 승진을 떠올려보자.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재민은 살아있는 승진과 죽은 승경 사이에서 혼돈을 일으킨다. “누나는 어쩌자고 이런 옷을 승진에게 남겨” 주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누나의 유품이 남긴 수수께끼, 그 의미의 공백은 승진으로 하여금 유령처럼 밤거리를 배회하게 한다. 그렇다면 누가 유령인가? 살아있는 승진인가, 죽은 승경인가? 여기서 현실/환상, 실체/이미지, 삶/죽음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경계가 불분명한 의미의 ‘찢김’과 ‘지워짐’을 통해 제대로 자신의 죽음을 인정받지 못한 성승경의 항변은 현실 속에 침묵의 형식으로 기입된다. 완성되지 못한, 완성될 수 없는 다큐멘터리 필름은 드러내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진실, 실패로서만 온전히 드러날 수 있는 진실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따라서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바뀌어”(「뒈져버린 도플갱어」) 간다는 자기 부정과, “지금 나가고 없는데요”(「마지막 롤러코스터」) 라고 스스로 자기 부재를 증언하는 말의 행간, 그 틈새에 내밀한 진실이 자리 잡고 있다. 길눈 밝은 작가 김연수는 여기에서 드러나지 않는 사잇길, 새로운 서사적 공간을 발견한다. “모든 논리가 사라지고 결국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이 하나로 뭉뚱그려져 존재하는 공간”(「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1954」)의 발견이다. “어두운 곳이다. 그 어두운 곳은 숨을 쉬듯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 움직이고 있다. 손을 들어 그 어둠을 만져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규칙적으로 말랑말랑한 뭔가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바로 누군가가 그 어둠 속에서 흐느끼는 소리다.” (「기억의 어두운 방」,『스무 살』, p.191) “검은 기념비” “유령필름”을 경유해 공백의 빈 공간은 주체의 내밀한 상처/고통/고독이 타자에 의해 훼손되지 않는 육체성을 담지하고 숨결로 살아 움직이는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으로 환원된다. 이렇게 세계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텅 빈 구멍, 바깥은 닫힌 공간을 열 수 있는 출구를 발견하게 해준다. “낭하”, “터널”, “동굴”의 ‘텅 빔’이 입문, 재생의 통로와 연결이 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3. 유랑하는 말의 위장, 감춤과 드러냄: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김연수가 『스무 살』에서 ‘텅 빔’을 통해 새로운 ‘열림’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다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 와서는 ‘보이지 않음’의 방식으로 현실 공간에 편재해 있는 빈 공간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김연수가 착안하고 있는 방법은 역으로 보이는 것을 지워내서 그것에 가려진 빈 공간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김연수는 제스처와 포즈로 진실을 가리고 있는 말의 위장을 걷어내기 위해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말하기/글쓰기에 주목한다. 그것은 잡담(「뉴욕제과점」), 만담(「리기다소나무 숲에 갔다가」), 낙서(「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 펜팔편지(「하늘의 끝, 땅의 귀퉁이」), 신문 스크랩(「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의 형식으로 현실 공간을 떠도는 말들이다. 상투적인 통속, 알맹이 없는 말장난, 실용예문 베껴 쓰기, 오리고 붙이는 행위의 반복 등 그저 말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전부인 말들이다. 「리기다소나무 숲에 갔다가」에서 삼촌과 “물망초여자”의 로맨스는 미수에 그치기는 했지만 자살 시도에까지 이른 ‘낭만적 사랑’의 신화를 재현하고 있다. 이러한 열정적인 사랑은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는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러나 위태로운 로맨스가 상투적인 통속으로 위장될 때, 삼촌의 순정은 죄책감 없이 반복될 수 있는 알리바이를 얻게 된다. 삼촌의 인생에서 “물망초여자”와의 로맨스는 ‘독/약’인 파르마콘이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지켜야 하는 인생 전체를 위태롭게 하는 치명적인 독소이며, 동시에 “그림자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닌 한때가 있었음을 환기시키는 각성제이다. 김연수는 만담의 방만한 말들에서 이러한 양면성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주름을 발견한다. “아기 가졌어”라는 여자친구의 고백을 “아기가 졌어, 엄마가 이겼어”로 바꿔놓는 봉우의 낙서(「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 다니지 않는 학교에 대한 거짓 에피소드를 베껴 쓰는 게이코의 펜팔편지(「하늘의 끝, 땅의 귀퉁이」), 폐점이 임박한 빵집에서 “어느 해 여름에는 빙수를 얼마나 많이 팔았었는지” “어떤 기술자가 얼마나 속을 썩였는지” 회고하는 어머니의 혼잣말(「뉴욕제과점」),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신문기사들을 오리고 붙이는 전직 신문기자의 신문 스크랩(「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 그것은 현실의 압력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결정된 현실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증상행위이기도 하다. 낙서, 거짓말, 잡담을 에둘러 무의미한 말의 잉여, ‘무의미’ 속에 감추어진 ‘의미’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김연수가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서 구사하고 있는 어법을 고려할 때, 「첫사랑」에서 “나는 비로소 사랑에 빠진 거야”라고 진술하고 있는 ‘나’의 고백은 분명 ‘사랑’의 고백이 아닌 다른 무엇이다. ‘나’는 자수를 하루 앞둔 수배자로 젊은 날의 열정과 패기에 대해 회의와 패배감에 젖어 있다. “펄럭이는 노란빛”에 매혹되었던 나비, 아름다운 빛의 반딧불, 첫사랑의 정인 등 ‘나’가 매혹되었던 것들은 모두 환멸의 대상이 되었고, 세상은 그저 혐오스러울 뿐이다. 그런데 ‘나’는 “푸른 빛”에 매혹되었던 한 시절과 단절하려는 시점에서 ‘일식’(日蝕)의 노란 빛이 그대로 밀려오는 따뜻한 느낌을 깨닫게 된다. 열정적으로 찾으려 할 때에는 느낄 수 없었던 충만함을 그러한 열정과 단절하려는 순간에 비로소 느끼게 된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눈물 방울처럼 검은 유리판에 새겨진 그 아름다운 노란빛. 언젠가 보았던 너의, 또 혜지누나의 눈물 맺힌 눈동자처럼 한쪽 부분부터 흔들리는 그 둥근 빛. 그러나 결코 부서지거나 망가지지 않을 그 소중한 동그라미. 무한히 수축됐다가 다시 온 우주로 퍼져나가는 그 노란 물결. 그제야 알 것 같았어.” (「첫사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p.118) 오르페우스는 죽은 에우리디케를 찾으러 지하세계로 내려갔다. ‘돌아보지 말라’는 금지의 명령을 망각하고 오르페우스가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에우리디케는 죽음의 세계로 돌아가고 그로 인해 영원히 사랑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 오르페우스가 본 황홀경, ‘텅 빈 충만함’―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을 봄과 동시에 잃음―은 오르페우스로 하여금 노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찰나의 순간,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의 기쁨/슬픔, 사랑/이별, 삶/죽음 모두를 본 것이다. 그렇다면 「첫사랑」에서 ‘나’가 느끼는 “초조한 마음”이란 바로 이런 진실과 조우하는 순간의 설렘과 내밀함이다. 그것은 ‘사랑’의 고백이라기보다는 ‘진실’의 발견이다. 김연수는 유랑하는 말의 위장을 통해 ‘보이지 않음’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것이 위치하고 있는 빈 공간을 어둠 속에서 끄집어낸다. 작품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서 유독 불빛―“오렌지빛 가로등 불빛”(「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 “노란색 연등”(「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 “보랏빛 꽃등”(「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고」), 기억 속의 “불빛”(「뉴욕제과점」) 등―이 자주 환기되는 것은 무언가 보고자 하는 작가의 욕망을 드러낸다. 작가는 오르페우스가 되어 ‘가면’이 아닌 ‘맨얼굴’, 사물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진실이 투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둠과 망각 속으로 걸음을 옮겨야 하고, ‘얻음/잃음’ ‘있음/없음’의 딜레마 속에서 방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오르페우스, 작가의 운명이다. 김연수는 카스텔라를 잘라내고 남은 “기레빠시”(「뉴욕제과점」)와 어둠 속으로 지나가는 “희끄무레한 것들”(「하늘의 끝, 땅의 귀퉁이」)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다. 거기에 그의 ‘에우리디케’가 있기 때문이다. 4. 봄비소리처럼 저절로 귀를 기울이게 되는, 말의 움직임:‘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의 세 번째 작품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 오르페우스의 분신들은 “끝이 과연 어디인지”(「남원고사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 한 번 가보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문명과 진보라는 근대적 신념, 즉 “상상의 눈”을 직접 실현하기 위해 ‘국제날짜변경선’을 넘어온 미국인(「거짓된 마음의 역사」), “세계의 끝”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에서 실종된 원정대(「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죽은 남편의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해 바람에 흔들리던 벚나무까지 떠올리는 세영(「그건 새였을까, 네즈미」), 총살 직전까지 무엇이 진실인지 되묻는 친일 문인(「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 등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끝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작가로서 김연수가 가고자 하는 끝은 어디인가? 그것은 말의 끝, 혹은 그것의 한계 너머이다. “뿌넝숴”(「뿌넝숴(不能設)」)―‘말할 수 없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바로 거기까지 가고자 한다.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는 6.25전쟁중 부역심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친일 문인의 최후 변론이다. 일제 말기에는 친일로, 적치(敵治) 90일 동안에는 부역으로 “구명생도”(求命生道)해온 그녀가 부역심사에서는 살아남지 못한 까닭은 무엇이고, 그녀의 진실은 무엇인가? 사랑 놀음의 한 방편으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총살당한 어이없는 죽음이 거룩한 “순교”로, 부역심사의 “바로미터”로 기능하는 “짐승의 시대”에 진실이란 없다. “저는 뭐라고 외치며 죽어야만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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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경렬 |
총살 직전에 그녀가 던지는 물음은 결코 진실을 알 수 없다는 비관적 회의주의를 피력함과 동시에 무엇도 말할 수 없는 그 순간의 자의식을 드러내준다. 그런데 여기서 ‘내용 없음’ ‘말할 수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 말을 해야 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무엇도 말할 수 없지만, 결코 침묵할 수 없는 능동적인 말의 움직임이 드러난다.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는 “더이상 쓸 수 없을 때까지 계속 써나갈 때” 가닿는 마지막 지점, “문장이 끊어진 자리”에서 시작되는 ‘꿈’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러한 이율배반적 욕망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고, 가능한 것은 그것을 짐작하고 상상하는 ‘주석’(註釋)으로서의 말하기/글쓰기이다. 소설은 히말라야 낭가바르바트에서 실종된 ‘그’가 남긴 등반일지와 수첩에 씌어진 문장의 여백에서 시작된다. 서술자 ‘나’는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라고까지 씌어지고 문장이 끊어진 빈 공간을 바라보며, 거기에 자리해 있는 “꿈의 케른”―“모든 여행이 끝나는 세계의 끝”에 대해 짐작하고 상상한다. 혜초가 남긴 『왕오천축국전』의 원본에서 사라진 세 글자를 추론하는 과정과 동일한 방법으로,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그 빈 공간에 대해 해석하고 추론한다. 그런데 ‘그’는 죽은 여자친구가 남긴 유서의 틈새, 즉 “없습니다”라는 존칭과 “후회는 없어”라는 비칭 사이에 놓인 “거대한 틈”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여자친구와 있었던 모든 일을 소설로 쓰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여자친구의 유서―‘그’의 소설과 등반일지―‘나’의 주석’ 순서로 문장의 공백들이 서로 연결되는 ‘거대한 주석’이 된다. 하나의 공백이 또 다른 공백으로 연쇄적으로 이어지면서 “모든 여행이 끝나는 세계의 끝”에 대해 소설은 끝없는 무한의 세계로 열리게 된다. 이것은 공백의 빈 공간에 끊임없이 다른 말을 불러일으키는 말의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농담’(「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농담」)과 알 수 없는 다른 사람의 ‘마음’은 사람들 사이에 관계의 단절과 고립의 “어두운 구멍”(「그건 새였을까, 네즈미」)을 남긴다. 그런데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에서는 역으로 “어두운 구멍”, 좁힐 수 없는 ‘거리’를 매개로 타자와 만나는 ‘레비나스적’인 발상을 발견할 수 있다. 세영은 죽은 남편의 모든 것을 알고자 할수록 애매모호한 불확실성 속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절대로, 확실히, 분명히”라는 부사를 쓸 수 없는 불확실함은 확실하다고 단정 지을 때 정해지는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환기시켜준다. 세영이 자신의 어린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언니 세희가 아니라 만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는 일본인, 그래서 의사소통이 부자연스러운 네즈미와 대화하게 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돌아갈 수 없어, 네즈미. 우린 계속 가야만 해. 우리는 이제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거야. 그러니 너는 내 얘기를 들어야만 해. 평생 기억하든, 금방 잊어먹든 아무 상관이 없어. 우리는 이제 다시는 만나지 않을 테니까. 어서 와. 어서.”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p.49) 김연수는 “캄캄한 어둠, 서늘한 밤을 향해 우리가 지니는 애착”을 말한다. 그것은 그 어떤 이해도 불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느껴지는 본능적인 아늑함이고, 꼭 닫아둔 마음자리가 저절로 풀어지는 열림의 황홀함이다. 세영은 ‘함께-있음’ 그 자체가 전부인 일시적인 만남을 통해 비로소 남편의 죽음과 거기에 얽힌 불확실한 오해에 대해 네즈미와 함께 대화하게 되는데, “그건 정말 새였을까, 네즈미?” 세영의 초조한 물음은 네즈미의 대답을 기다리는 말이 아니라 망상에 사로잡힌 자신의 혼돈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말이 된다. “온 세상이 전사들로, 시인들로, 영웅들로 가득했던 시절의 일들이야. 세상 가장 작은 소리에도 쫑긋 귀를 세우는 사람들로. 세상에는 그렇게 귀를 기울이는 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꽃이 피었다가는 또 져버리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어찌 봄이 왔다고 해서 그렇게 많은 꽃들이 피어오르겠는가 말이야.” (「뿌넝숴」, 위의 책, p.67) 「뿌넝숴」의 점쟁이는 봄비소리에 저절로 귀가 기울여지듯이 공백의 빈 공간으로 진동하는 말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는 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검지와 중지가 잘린 자기 오른 손에 ‘말할 수 없는’ 전쟁의 진실을 새기고 살아가는 사람이고, 그것의 아우성을 온몸으로 느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젊은 병사들의 죽음이 “매화 꽃잎”처럼 들판을 가득 메운 전쟁의 진실은 그의 잘린 손가락에 있지, 숫자로만 기록되는 역사책과 “전쟁에 나가기 싫어서 손가락을 자른 겁쟁이”라고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 속에 있지 않다. 그래서 그는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거든”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모순되게 이야기를 멈출 수 없다. 말들이 이야기꾼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김연수가 기존 텍스트의 편집자 혹은 대필 작가를 이르는 유령작가를 표명하고 있음은 이러한 말의 움직임과 기다림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연수는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 어쩔 수 없는 “어두운 구멍”,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공백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백의 빈 공간이 존재하는 한, 작가는 말의 기다림에 응답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지속해야 한다. 말의 한계, ‘말 할 수 없음’에서 비롯된 유령작가의 탐색은 곧 작가의 자의식을 확인하는 과정으로 귀결되고 있다. 5. ‘베토벤, 비틀즈, 아이의 울음소리’,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텔레파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스무 살’의 김연수를 돌이켜보자. 김연수의 ‘스무 살’은 80년대의 끄트머리와 90년대의 문턱에 걸려 있다. 그의 소설에서 차용하고 있는 ‘롤러코스터’에 비유해 보건대, 그것은 롤러코스터의 스피드/텐션이 최대치까지 상승하였다가 정점을 찍고 하강하기 직전 혹은 직후의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 낙하운동의 에너지가 김연수의 소설을 90년대를 지나 지금까지 끌고 가는 원동력이자 운동법칙이다. 왜냐하면 롤러코스터는 상승/하강의 교차, 스피드/텐션의 강약을 조절하며 레일 위를 질주해 가야 하기 때문이다. 김연수는 스피드가 던져주는 텐션을 최대한까지 끌어올리는 “롤러코스터의 이상”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그것의 한계 또는 그 너머까지 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혁명’에 대한 동경과 열정이 세계 변혁의 지배담론으로 역동적으로 작동할 수 없는 시대의 징후는 김연수에게 와서 ‘세계 내의 존재’가 과연 세계의 진실을 볼 수 있는가 하는 형이상학적 질문으로 변전한다. 세계 밖에서 안을 조망할 때 얻을 수 있는 균형 잡힌 시각을 확보하기 위해 그의 시선은 세계 밖의 한 지점을 응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소설 바깥에 존재하는 작가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메타픽션이나 문학 바깥의 모든 장르를 참조하는 하이퍼텍스트라는 실험적 소설기법은 김연수에게 필연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작품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와 『7번국도』에서 보여준 이러한 서사적 시도는 내용과 형식이 어긋나는 “균열”을 일으킨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에셔의 에칭화 ‘손을 그리는 손’처럼 안과 밖이 공존하는 글쓰기를 지향하는 김연수의 바깥을 향한 응시는 어디에서 입각점을 발견할 것인가? 그것은 모리스 블랑쇼가 “문학의 공간”〈모리스 블랑쇼, 박혜영 역, 『문학의 공간』(책세상, 1990)〉으로 사유하는 ‘바깥’―“글자와 글자 사이”(「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거대한 틈, 그 공백의 빈 공간이다. 공백의 빈 공간에는 ‘말할 수 없음’이라는 말의 끝, 말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진동하는 말의 움직임, 내밀한 진실이 자리해 있다. ‘유령작가’라 함은 이 끊임없는 말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고 침묵으로 기입된 진실을 사유하는 자이다. 그것은 곧 보이는 세계와 결별하고 보이지 않는 지하세계로 들어가는 오르페우스를 꿈꾸는 자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김영하가 『빛의 제국』(2006)에서 ‘잊혀진 스파이의 귀환’이란 설정으로 80년대의 한복판으로 들어섰다면, 김연수는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김연수는 『문학동네』 2005년 겨울호부터 현재까지 장편소설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을 연재중이다〉에서 입북하기 위해 베를린에 파견된 학생 대표의 ‘가려진’ 예비 대표자의 시선으로 80년대와 90년대를 돌아보고 있다. 김연수가 1930년대 모더니스트 이상을 재구하면서 몰두했던 “우리가 어떤 사람을 추구해도 알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빠이, 이상』)는 ‘메꿎은’ 강변에도 불구하고 작가 자신은 서사의 ‘논리’와 ‘열정’을 놓지 못하고 텍스트에 ‘피로/잉여’를 남겼다. 그러나 김연수의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은 ‘레퍼런스의 과잉’이라는 과부하에 걸리지 않고 ‘김연수표’ 도약을 제시해 줄 것이다. 바깥은 ‘잃음/얻음’의 딜레마를 작가에게 환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에서 김연수는 ‘베토벤, 비틀즈, 아기의 울음소리……’를 녹음한 레코드판을 보이저 2호에 실어 태양계 바깥, 우주 저편으로 쏘아 올린 천문학자 칼 세이건과 대화하고 있다. 김연수는 지금 ‘바깥’과 연결되고자 텔레파시를 전송중이다. 김연수의 팽창하는 서사적 외연은 꿈틀거리며 확장되고 있는 ‘비유클리드 공간’이 된다. <끝> |